소설리스트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20화 (120/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20화

세계는 끊임없이 순환한다.

프레사는 어느 고서에서 그 문장을 발견한 직후 고민했다.

‘세계의 순환’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칼리스투스가 아주 긴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는데도 이 세계는 꽤 오래도록 평온했다.

그렇다면 그 균형은 어떻게 유지된 걸까?

세계수와 정령은 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들었는데.

어쩌면 다른 무언가가 어디에서 칼리스투스의 역할을 대신한 것은 아닐까.

눈앞에 보이지도 찾을 수도 없지만, 세계의 순환 속에서 분명 무언가가 태어났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칼리스투스가 보인 반응은 의외로 솔직했다.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곤혹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던 모습이 프레사에게는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세계는 순환한다.’

그 말은 즉 세계수가 사라진다면 무언가가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수든 혹은 정령이든 아니면 이외의 존재이든 말이다.

세계라는 것은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부정된 감정에 오염된 채로 계속 살아 있다면 이 세계의 모두가 병들어 버릴 것이다.

그때는 이 세계 자체가 순환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빈자리를 채울 터였다.

프레사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랑할 것들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프레사는 결심했다.

만약 세계수가 폭주해 파멸하게 된다면 최후의 선택을 하자고.

사실 도박이나 다름없는 방법이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프레사와 동료들은 뿌리로 돌아왔다.

안개가 걷힌 숲을 한참이나 걸어 나오면서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장로의 집에 도착해서도, 그리고 장로가 준비해 준 따뜻한 수프와 빵을 나눠 먹고 나서도.

그들이 대화를 시작한 것은 이후의 일정을 의논하기 위해 원탁에 모였을 때였다.

장로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전해들은 후라서 유독 조용했다. 그가 섬기던 이 세계의 신이 사라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원탁 위에 한동안 머물렀으나 아이작이 먼저 그것을 깨트렸다.

“정말…… 세계수를 죽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감탄했다.

레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세계수가 폭주하면 모두가 위험하니까요.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레인은 세계수 가지 하나를 챙겨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가차 없이…….”

제롬이 리카온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루이제는 다친 어깨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지켜야죠.”

제드 또한 루이제의 말에 동의했다.

클로는 아무래도 좋은 듯 수프만 다섯 그릇째 비우고 있었다.

리카온은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얹지 않고 잠자코 프레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프레사는 잠시 동료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다들 고생했어요. 힘들었을 텐데 여기까지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프레사는 한 명 한 명 동료들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칼리스투스 님은 안 보이시는군요.”

아이작은 그제야 칼리스투스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의아한 낯이었다.

“아, 리스 님은…….”

그때, 쾅.

누군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그는 뽈뽈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장로를 보고 흠칫 놀라 멈추어 섰다.

“뭐야, 장로. 왜 이렇게 늙었어?”

장로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쟁반을 툭 떨어트렸다.

그의 주름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세계수님?”

파르팔라는 귀찮은 표정으로 턱짓했다.

“그래, 나다. 먹을 것 좀 내와.”

“세계수님…….”

“울지 마. 난 우는 요정이 제일 싫으니까.”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울지 말라니까!”

세계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장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뒤늦게 들어서던 칼리스투스가 파르팔라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 좀 죽이거라, 파르팔라야.”

“너야말로 그 늙은이 말투 좀 집어치워! 소름 끼치거든?”

“이 버르장머리 없는 세계수 놈! 기껏 정화해 줬더니 은혜를 그 싸가지 없는 주둥이로 갚는구나!”

“내가 너보다 수천 살은 더 먹었다!”

“너와 나는 같은 날 태어났다는 걸 잊지 말거라.”

둘이 한참 동안 유치한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산만해졌다.

“어쨌든, 잘 해결됐네요.”

프레사는 방긋 웃고 장로가 내온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폭주 직전의 세계수는 사실상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세계의 순환 덕분에 정화되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확률에 도박한 프레사의 성공이었다.

프레사는 그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따라와 준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리카온은 줄곧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곧장 눈이 마주쳤다.

프레사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잠깐 산책할래요?’

리카온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