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라니아
* * *
잠에서 일어난 나는 방을 잠시 둘러봤다.
문도 창문도 없고, 가구를 조금만 더 설치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거 같다.
"이럴 땐 상점을 살펴봐야지."
상점을 찾아보니, 역시 방은 포인트로 넓힐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포인트가 많진 않으니, 방은 나중에 넓혀야겠다."
전에 벌어둔 7230포인트로 뭐든 도구를 사서 해야지 보는 맛이 있을 텐데.
위험한 책을 어딘가에 떨어뜨린다던가, 구울이나 딥 원을 어디 마을에 던져놓는다던가.
"하지만 현대에는 그렇게 위협이 될 거 같지도 않고, cctv나 블랙박스때문에 금방 들킬거 같은데. 근현대라면 모를까."
혹시 지구본의 시간 설정도 상점에서 사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지구본을 살펴보니 다행히 시간 설정을 할 수 있는 다이얼이 있었다.
"이런 중요한 걸 왜 뒤쪽에다 설치한 거야."
다이얼을 돌리자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건물이 분해되고 다시 생기면서 건축 양식이 점점 변화해 갔다.
"이건 고딕 양식인가? 너무 많이 돌리긴 했지만, 중세까지 왔네."
시간을 인간이 생기기도 전까지 돌려서 딥 원을 풀어둘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인간은 생겨날까. 궁금해졌다.
딥 원 : 1000pt
비쌀거라 생각은 했지만 하나에 천 포인트 씩이나 한다.
"이건 싸다고 봐야 하는 건가…?"
지금의 나는 거의 모든 포인트를 써야 7마리를 살 수 있다.
"2마리… 아니, 4마리만 사자. 그 정도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번식하겠지."
풀어 놓는 건 어류가 나타난 이후로 할까.
"그렇다면 지구002의 운명은 정해졌고. 이번엔 내 힘을 시험해 볼까?"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었지만, 크툴루는 핵폭탄에 맞아도 멀쩡했다는 묘사가 있었으니까.
물론 소형 증기선(웃음)에 부딪혀서 머리가 터지긴 했지만 그런 걸로 죽지는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건 누군가 나를 적대하는 것이다.
크투가와 니알라토텝, 크툴루와 하스터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다 틀어질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누굴 만날 수 있을까 싶지만, 저 지구의 복제본에서 누가 의식을 해 크툴루나 다른 그레이트 올드 원을 불러낸다면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너무 연약해 연습 상대로서의 가치도 없고, 샌드백을 사서 두들겨 패봤자 상대가 주문을 사용할 가능성도 있으니, 나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럴 땐 역시 상점이지!"
[검색 : 주문, 마법]
하급 신화서
네크로노미콘
에이본의 서
운아우스슈프레흐리헨 쿨텐
……
초보자도 쉽게 배우는 마법과 주문
"응?"
그럴듯한 이름들이 나오더니 마지막에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가격은 3천 포인트. 딥 원 네마리를 사고 이 책도 사면 몇백 포인트밖에 남지 않지만, 미래를 위해 사기로 했다.
다른 책들도 사고 싶었지만, 포인트도 부족하고 전문 서적 느낌이 들어 '초보자도 쉽게 배우는 마법과 주문'을 샀다.
책을 펴고 목차를 보니 마력과 주문, 주문 변형, 심화 마법까지 배울게 많아 보였다.
목차를 넘기고 1장을 보니 마력에 관한 글이었다.
<마력에 대해="" 알아보자!=""/>
주문을 사용하거나 유물, 마법적인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선 마력이 필요하다.
마력 외에도 정신력을 쓰는 마법이 있겠지만,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력을 느껴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한다.
피와 다른 무언가가 체내에서 흐르는 게 느껴진다.
자각하니 이렇게 세차게 흐르는 걸 왜 못 느낀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력은 느꼈으니,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다음 장인 주문은 말 그대로 다양한 주문들이었다.
좀비 생성이나 공격 주문, 마법화 주문등 다양한 주문들이 있다.
그 다음 장은 주문 변형으로, 말 그대로 아까 소개했던 주문을 변형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잠시 깜빡한 게 떠올랐다.
"아 맞다. 딥 원들 지구에다 풀어놔야지."
시간 배속을 해뒀지만, 어느새 고딕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변한 서양을 보고 책에 너무 집중했나 싶었다.
나는 빨리 다이얼을 돌려서 지구의 시간을 뒤로 돌렸다.
인간의 문명이 사라지고, 세상이 얼어붙었다 다시 녹고, 대륙의 모양이 서서히 바뀌었다.
지상에 있는 생물들이 없어지고, 조금 있다가 지구가 붉어졌다.
"잠깐, 시간이 너무 뒤로 갔네."
지구의 시간을 멈추고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렸다.
지구가 식고,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단순한 생물에서 점점 진화하더니, 이윽고 바다가 녹색으로 물든다.
"저게 그 사이아노박테리안가 그건가."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물로, 점점 진화해가며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어류까지 출몰했다.
"이제 슬슬 딥 원을 풀어야겠네."
시간 배속을 잠시 정상으로 돌려놓고, 바다에다 딥 원 네마리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 배속을 빠르게 해 놓고 다시 시선을 책을 향했다.
심화 주문을 살펴보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게 보였다.
변신과 강림, 소환 주문들까지.
내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법한 주문들이었다.
변신을 하면 지구에 놀러갈 때 사람들이 실성하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지구에 강림시킬 수는 없었다.
인간이든 다른 종족이든 의식을 통해 나를 불러내야 했다.
'이건 좀 불편하네.'
심지어 다른 그레이트 올드 원이나 아우터 갓의 강림 주문들도 있었다.
다른 신의 강림은 위험성이 높으니, 소환 주문을 살펴봤다.
소환 주문은 말 그대로 외계의 종족과 생물들을 소환하는 주문이었다.
"아 이거 괜히 딥 원 산 거 아니야? 포인트 낭비했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한 번 소환하면 끝인 게 아니라, 계속 마력을 소모해야 하는 주문이었다.
이 주문은 내가 주로 관찰할 사람—탐사자에게 시련을 내릴 때 쓸모 있을 것이다.
'음… 그럼 이제 주문을 시험해 봐야 할 텐데, 인간들로 시험해 봐야 하려나. 지구는 지금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지구를 살펴보니, 어느새 이렇게 번색했는지 딥 원들은 심해에 자기들끼리 문명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었다.
지상에는 포유류들이 많이 보였고, 인간도 보였지만 아직 청동기시대 정도였다.
사람들은 부족끼리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고 몇몇 부족들은 연합을 해 작은 나라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일단 작은 부족에다 시험해 볼까. 이 정도 시대면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같은 원시 종교를 섬길 테니,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괜찮겠지.'
부족을 둘러보다가 장례를 할 때 시체를 땅에 묻는 풍습을 가진 부족을 찾았다.
그렇다면 주문은 좀비 생성이 좋겠지.
"주문을 조금 변형시켜서 1시간 정도만 돌아다니도록 할까. 주문의 이름은'불완전한 소생'으로 하자."
무덤을 바라보며 주문을 조금 외자 마력이 조금 빠져나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땅이 들썩거리다 팔이 튀어나오고, 이윽고 시체가 완전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명령을 내려야지."
그저 시체를 잠시 되살릴 뿐인 주문이니, 의식도 없는 시체에다 명령을 내려야 한다.
'너희 부족을 공격해라.'
명령을 들은 좀비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족원들이 저 좀비를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가족이면 가족이 살아돌아왔다고 기뻐할까? 아니면 시체가 돌아온걸 무서워할까?"
기대하던 장면은 금방 볼 수 있었다.
마을 근처에서 수렵을 하던 부족원이 마을을 향해 걸어오는 좀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맨 앞의 좀비랑 닮은 걸 보면 가족인가? 정말 기대되는 걸."
그 사람은 당황해 하다가 좀비를 향해 달려갔다.
확실히 맨 앞의 좀비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니, 누가 보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몸이 멀쩡하니 가장 빨라서 맨 앞에 서 있는 걸테고.
빠르게 뛰어가 그 좀비를 껴안은 사람은 표정이 이상해졌다.
시체가 따듯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 청년이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좀비에게 물려 있었다.
목 부근을 물린 녀석은 좀비를 내치고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해하며 마을을 향해 도망쳤다.
'엄청 당황했나 보네. 사냥해 온 것도 두고 가고.'
청년이 마을에 도착한 건지,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돌 창을 든 청년들이 여럿 모였다.
그새 좀비들도 마을 입구에 가까이 왔다.
마을 청년들은 살이 파여 뼈가 보이고, 구더기가 파먹으며 돌아다니는데도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보고 패닉에 빠진 듯했다.
몇몇은 도망갔지만 다른 이들은 정신력이 높은 건지, 도망가기는커녕 창을 더욱 세게 쥐었다.
싸움은 그저 그랬다.
무기를 든 건장한 청년들과 죽었다 일어나서 몸도 굳어 있고, 어딘가는 썩어 있는 좀비가 상대가 되겠는가.
하지만 재밌는 건 그다음이었다.
아까보다도 마을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광장같은 곳에 누군가 끌려나왔다.
다른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는 의복과 장신구들이 촌창—아니, 제사장인가.
아무래도 제사장이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생각하겠지.
제사장이 신께 바칠 제물을 가로챘다던가, 잘못된 의식을 치렀던가 말이다.
광장을 자세히 보니 평평한 돌판 같은 게 마치 제단처럼 보였다.
제단위에 무릎 꿇려진 제사장은 시끄럽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주변 부족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윽고 또 다른 화려하게 입은 사람이 제사장에게 다가간다.
저 제사장의 제자인걸까?
제사장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손에서 번쩍이는 청동제 단검이 대신 답하고 있었다.
너는 여기서 신께 바쳐질 것이란 것을.
단검을 보니 아까 배웠던 다른 주문이 생각난다.
마법화 주문—장비나 유물에 마법을 불어넣는 주문.
마침 상황도 상황이니 저 단검에다 마법이나 걸어볼까.
청년이 제사장의 목을 그을 때 주문을 걸었다.
단검에 묻은 피가 문양으로 변하며 새겨진다.
단검에서 빛이 나더니 그 청년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라?'
—그 청년의 영혼이 내 앞에 있었다.
내가 아직 주문에 미숙해서 그럴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미쳐 버릴라. 정신 보호 주문을 써야지.'
청년의 영혼을 가리키며 주문을 외자, 청년이 정신 차린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영혼의 크기는 내 손에 잡힐 정도였다.
"흠, 이제 돌아가라."
이렇게 말하며 송환 주문을 걸었더니, 영혼이 다시 몸으로 되돌아갔다.
'진짜 깜짝 놀랐네.'
역시 한동안은 주문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그 부족을 살펴보니, 깨어난 청년이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치켜들며 주변에 소리쳤다.
'응? 뭐라고?'
이제는 제사장이 된 청년이 자신이 신과 만났다며 그 증거로 단검을 내밀고 있다.
"이런 건 의도치 않았는데… 뭐 괜찮겠지. 오히려 포인트를 더 벌 수도 있고."
그렇게 나를 향한 신앙이 탄생했다.
***
그날 밤, 마을에서 축제가 열렸다.
크게 나무를 쌓고 모닥불을 피워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소를 끌고 와 신께 바친다며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
소의 목을 베어내며 머리가 완전히 몸에서 분리되고, 제단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제사에 사용한 소는 부족원들끼리 나눠먹을지 모르니, 일단 머리만 가져가기로 했다.
소의 머리를 제대로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니, 허공에서 어둠이 나타나 머리를 삼키더니 내 눈앞에 나타났다.
"으, 별로네."
내가 굳이 이런 걸 먹을 필요도 없고, 식량은 상점에서 파니까 그냥 태워 버리기로 했다.
넘치는 마력으로 불을 일으켜 소머리를 재도 남기지 않고 태우고, 다시 바라보니 축제의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바라봤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오늘도 열심히 했으니, 이제 밥을 먹을 시간이다.
그리 생각하며 상점에 들어오니 포인트가 이상했다.
[포인트 : 240]
원래 230포인트가 남았을 텐데 10포인트가 늘어나 있었다.
"혹시 방금 제사때문에 그런가?"
제사 한번당 10포인트… 혹은 제물 하나당 10포인트일 수 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네."
이럴 땐 치킨이다.
앞으로 제사를 받으며 벌 포인트를 생각하며 나는 치킨을 구매했다.
치킨을 먹으며 나는, 세상에 퍼질 나에 대한 신앙과 딥 원을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