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르뤼에에 잠든 자
* * *
일지에는 그동안 해왔던 의식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물론 여기 납치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이 전부 실패했다는 뜻이겠지만.
그렇게 일지를 살펴보던 그들은 자신들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잡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을 모두 구하고 탈출할지 혹은 먼저 탈출하고 경찰에게 맡길지.
탈출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어딨는지도 모를 사람들을 구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누군가.
일지대로라면 의식을 할 텐데 이대로 우리들만 탈출하면 우리가 죽이는 거라며 구해야 한다는 정의감 넘치는 청년.
우리가 탈출하면 의식에 사용할 사람이 부족할 테니 괜찮을 거라고 설득하는 여성.
일단 일행을 탈출시키고 다시 돌아와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제임스까지.
아주 총체적 난국이다.
저러다가 밧줄 사다리가 풀어진 걸 알아채고 올라오면 어쩌려고 저렇게 말싸움을 할까.
어떻게든 합의를 한 건지 모두 함께다니면서 탈출을 도운 후에 빠져나간 사람은 경찰에 신고하고 남은 사람은 다른 납치된 이들을 구하기로 했다.
일행은 일단 방을 나가기 전에 좀 더 자세히 방 안을 살펴봤다.
2층 침대 여섯 개와 그 옆에 있는 서랍들.
서랍 안에는 어떤 책이 있었는데 다곤 밀교의 책이었다.
책을 대충 훑어보더니 탈출해서 경찰에게 제출하겠다는 말을 한다.
'경찰이 과연 수사를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아직 자기들이 어떤 곳에 있는지도 제대로 모를 테니까.
방을 얼추 전부 둘러본 일행은 방 안에 있는 출구로 보이는 문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혼종이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하나씩 넣어 보면서 잠금을 풀려고 했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왜 이쪽에서 잠겨 있는 거지?
맞는 말이다.
출입구라면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열 수 없어야 하는데 이곳은 반대였다.
제임스는 모두를 안심시키듯이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일 거라고 말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꼭꼭 숨겨져 있어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있거나 바깥쪽에 하나 더 잠금장치가 있거나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를 발견하고 문을 열자 보이는 광경은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왜냐하면—
"이게… 뭐야?"
—그곳은 출구가 아닌 무기고였으니까.
일행을 반기는 건 복도나 계단이 아닌 여러 총기와 총알이 들어 있는 상자 뿐이었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제임스가 아직 살펴보지 않은 곳이 하나 더 있다며 아직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긴 의식장에 있는 딥 원과 밝은 불빛때문에 그쪽에 시선이 모여서 다른 길이 있는 걸 보지 못한 거겠지.
게다가 그 너머에 출구가 있을 거 같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일단 이곳에서 무기를 챙기고 아직 가지 않은 곳으로 향하자는 제임스의 말에 일행은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까 봤던 권총과 소총이 여러 정이 있었고 소총은 들고 다니기 어려울거라 생각한 건지 모두 권총을 들었다.
제임스는 안전장치를 알려 주며 들고 다닐 때는 무조건 안전장치에 걸어두라고 말했다.
권총 탄환을 조금 가방에 챙긴 일행은 무기고를 다시 잠궈두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기절해 있는 혼종 세 명을 묶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했고.
그렇게 그들은 출구가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곳을 향했다.
바닥에 빛나는 돌이 박혀져 있지 않아서 길을 찾아다니기 어려웠지만 선두에 선 제임스의 허리에 묶인 밧줄을 붙잡고 가서 흩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길을 갈수록 어떤 소리가 점점 커져서 일행은 그쪽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고래처럼 큰 생물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 그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자 퉤—하고 뱉으며 엄청 짜다고 말한다.
여길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구멍을 쳐다보던 일행은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빛에 비친 건 특이하게 생긴 물고기였다.
커다란 눈과 입, 그리고 뾰족한 이빨이 튀어나온 흉측한 생김새가 마치 심해어같다.
아니, 심해어같은 게 아니라 심해어다.
그도 그럴게 저 일행은 지금 심해 도시에 있으니까.
일행들은 지금 본 게 정말 맞는 건지 눈을 비비며 다시 쳐다봤다.
하지만 몇번을 쳐다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떤 오컬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여기가 심해 도시는 아닐까—하고 말을 꺼냈다.
딥 원을 보고 긴가민가 하긴 했지만 지금 심해어를 보고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서야 말하냐고 화를 내지만 납치돼서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어려웠겠지.
딥 원과 혼종이 있다고 무조건 심해 도시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거고.
하지만 여기서 심해어까지 발견했다면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여기가 심해 도시면 탈출은 어떻게 하냐며 정신력이 깎이고 있는 일행이 보인다.
심해면 수압때문에 헤엄쳐서 나갈 수도 없으니 갇힌 거나 다름없다며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좌절하는 일행의 한가운데 제임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그러더니 자신들은 그럼 어떻게 이곳으로 끌려온 거냐고 말하고 있다.
심해라면 헤엄쳐서 끌고 올 수도 없을 텐데 어떤 기구나 마법적인 방법으로 데려온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저런 생물도 있는데 마법도 있지 않을까—말하며 방금 심해 도시가 아닐까 추측한 사람에게 묻고 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신화 생물 관련해서 잘 알고 있지 마법이나 주문은 잘 모르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나 다른 기구를 찾아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마법적인 방법을 찾아보자 말했다.
일행은 정신적으로 지친 건지 군말 없이 따랐다.
다시 돌아가면서 혹시 벽에 뭐가 없을까 싶어 짚으면서 가는 일행들.
하지만 만져지는 건 단단한 바위뿐이라 실망감을 금치 못 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쭉 걸어오다 다시 도착한 의식장.
하지만 조금 전과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밧줄 사다리가 망가진 걸 발견했는지 경비를 서던 혼종이 무전을 하면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기절해서 묶여 있는 사람이 무전을 듣고 일어난다 해도 대답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잊고 있던 일행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에서 소리가 나면서 모두 당황해했다.
경계를 서던 혼종들도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소총을 견착하고 천천히 일행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로브를 쓴 마법사같은 딥 원이 없다는 것일까.
그래도 모포를 둘러입어서 잘 안 보이는 덕에 선공을 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흩어지라고 속삭인 후 소총을 어깨에 견착한 제임스는 그대로 가장 앞에 있던 혼종의 머리를 노렸다.
—탕!
그대로 머리에 구멍이 뚫려서는 쓰러지는 혼종 뒤로 당황해하며 조준을 하는 녀석이 둘 보인다.
녀석들은 총을 쏘지만 제임스는 이미 쏜 자리에서 옆으로 이동해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조준을 해 발사된 총알은 정확히 머리를 노렸고 몇 초의 총격전 후에는 땅에 쓰러진 세 명의 혼종뿐이었다.
흩어져서 숨어 있다 제임스 곁으로 돌아온 일행은 그의 실력에 다시 한 번 놀라워하며 칭찬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식장에서 빛 같은 게 뿜어져 나오더니 아까는 안보였던 딥 원들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마법사였는지 다른 지부로 공간이동을 해서 지원을 데려온 거 같다.
로브를 입은 딥 원 마법사 둘의 뒤로 혼종이 여럿 보인다.
제단에서 내려오는 딥 원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혼종을 발견했는지 빠르게 다가와 살펴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총을 쏘지만 벽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딥 원에게 총알이 닿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혼종들에게 포위된 일행은 권총으로 저항해 보려 했지만 주문을 속삭인 딥 원이 손을 뻗자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혀를 씹으며 저항해 보려 했지만 마법적인 힘이라서 버틸 수 없었던 건지 결국 잠들고 말았다.
모두 기절한 이후에는 곧 의식을 할 시간인건지 혼종들이 제임스 일행을 기둥에 묶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사람들을 더 데려왔다.
기둥에 사람들을 모두 묶은 혼종은 기둥 바깥으로 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딥 원 마법사들은 제단에 그려진 마법진을 바꾸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평소에는 공간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가 의식을 할 때 바꾸는 모양이다.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마법진을 고친 딥 원들은 잠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식을 동시에 하기 위해서 시간을 맞춘 모양인데.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제임스는 어느새 눈을 떴다.
눈을 뜬 제임스는 곧바로 정신을 차린 건지 주변을 살펴보는데 딥 원이 음산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건지 밧줄을 풀려고 시도하는 제임스의 눈에 보인 건 칼을 들고 가까이 오는 혼종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목이 베이는 걸 보며 자신도 그렇게 될 예정이란 걸 깨달았는지 밧줄을 푸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한다.
이윽고 혼종이 완전히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때 밧줄이 풀린 손으로 손목을 붙잡는다.
붙잡힌 녀석은 당황해하다 칼을 빼앗기고 제임스는 곧바로 목에 있는 경동맥을 긋는다.
마치 숙련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경동맥을 그은 그는 혼종을 바닥에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목이 베어져 죽어 있었고 그는 불길함을 느꼈나보다.
기둥 바깥으로 벗어난 그의 뒤로 엄청난 빛이 쏟아졌고 큰 진동이 그가 있는 공간 전체를 강타한다.
나도 무언가를 느껴 내 몸을 쳐다보니 별들이 움직이고 있다.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경하기 위해 봉인식을 좀 느슨하게 했더니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물론 크툴루가 깨어나진 못하고 르뤼에가 있는 대륙이 살짝 움직이는 정도?
하지만 해저 도시가 르뤼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정도의 움직임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나 보다.
저들의 목적은 르뤼에 근처의 해저 도시 다섯 곳에서 동시에 의식을 벌인 후 크툴루를 깨우는 것이었겠지만 르뤼에가 있는 대륙이 솟아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나 보지.
결국 그들이 있는 해저 도시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직 아가미가 생기지 못한 혼종은 물속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다른 아가미가 있는 혼종은 떨어지는 바위에 깔려 죽었고.
제임스는… 이번 시나리오에서 멋진 활약을 한 거 같으니 회수해야겠지.
"잠들어라—."
무너져 내리는 바위들 사이에서 분위기와 맞지 않게 편안히 잠든 제임스를 회수한다.
이번 시나리오의 기억은… 약간씩 남겨두는 게 좋을까.
나중에 다른 시나리오에서 구를 때 쓸모가 있을 테니.
이윽고 내 몸의 별들이 다시 잠잠해졌을 때 나는 지구005를 리셋했다.
[엔딩 실패한 의식]
"다음엔 증기선으로 돌격하는 걸 보고 싶은데. 기대해봤자 소용없겠지?"
나는 손바닥 위에 잠들어 있는 제임스를 바라본다.
"흠…. 그런데 얘는 어디다가 두지? 상점에서 파는 게 있나?"
상점을 찾아보니 호텔이나 대형 저택같은 건물도 있었다.
"대형 저택이라…. 아, 다음엔 이걸 써볼까. 일단 얘는 여기다 넣어 두고."
그렇게 대형 저택을 구매한 나는 미니어처같은 저택의 어느방에 있는 침대에 그를 눕혀둔다.
"다음 시나리오는 여기에 누구든지 초대해야겠군."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