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밤하늘의 화신
* * *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결국 다시 일어난 나는 아이쇼핑이나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좋은 시나리오도 떠오르지 않을까.
저택에 초대하는 건 준비가 좀 많이 필요할 거 같고.
그렇게 상점을 찾아보다 좋은 걸 발견했다.
명계의 약.
이 약을 섭취한 사람의 정신을 과거로 보낸다고 한다.
잘못하면 틴달로스의 사냥개를 만날 정도로 먼 과거까지 갈 수도 있다는데….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일지가 문제인데."
한 번 지구에서 이중생활이라도 해야 할까.
분신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변신시키면 가능할 거다.
신분은… 최면이나 정신 지배로 만들어야겠네.
니알라토텝처럼 세계적인 규모의 비밀결사를 만들어 볼까.
아니면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어서 돕다가 마지막에 배신을 때릴까.
아니면 명계의 약은 잊고 다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까.
"나도 화신체를 다양하게 만들어 볼까. '노란 옷의 왕'이나 '검은 파라오'처럼 멋진 이명을 가진 화신체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일단 나는 분신을 만드는 느낌으로 의식을 집중시켰다.
마치 화면 두 개를 동시에 보는 것처럼 시선이 분산된다.
내 손 위에 있는 평범한 인간처럼 생긴 화신체를 쳐다본다.
그와 동시에 내 화신체가 보는 나 자신—본체도 보인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할 만한 육체가 있었다.
여기에 정장…은 좀 그러니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히고 지구로 가면 되겠네.
간단하게 마력을 끌어올려 옷을 만들어내고 좌표를 생각하고 바로 공간이동을 한다.
물론 본체가 공간이동을 해서 SAN치 체크 축제를 벌이는 일은 없었다.
내 방과 지구의 한 길거리가 동시에 보이는 기분은 꽤 이상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좀 어려울 거 같은데 지금은 눈을 감고 화신체에 집중을 할까.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아서 원래 몸과는 다른 신체를 확인한다.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팔, 다리를 움직여 보고 고개를 돌려 몸을 살펴보며 옷이 멀쩡한지 살펴봤다.
"아아, 다 정상이군. 그럼 이제 골목에서 나가야… 응?"
내 몸이 정상인지 확인하고 골목길에서 나가려는데 출구 쪽에 어떤 인영이 보인다.
이쪽에서 보기엔 교복같은데 지금 시각이 6시니 하교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긴 했다.
이쪽 길로 가야만 집이 나오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 같은 골목으로 소녀가 천천히 걸어온다.
"너, 누구야. 익숙하면서 낯선 기운이 느껴지길래 이쪽으로 왔는데."
'하윤이? 왜 교복을— 아. 지금 시간대는 아직 하윤이가 고등학생인가.'
"나는—"
"뭐, 좋아. 일단 조금만 패면 알아서 불겠지."
하윤이는 땅을 약하게 박차는 듯 싶더니 순식간에 내게 다가와 멱살을 붙잡는다.
"엑."
그리고 벽에 밀어붙이고는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성불 펀—치!"
—쾅!
살과 살이 맞대는 소리가 아니라 무슨 차가 벽에 충돌하는 거 같은 소리가 난다.
물론 변신을 해도 보유한 능력은 그대로기 때문에 내 얼굴은 멀쩡했다.
오히려 하윤이의 주먹이 빨갛게 변한 게 부러진 거 같지는 않지만 많이 아파 보인다.
"아이고, 아프진 않느냐?"
나는 하윤이가 후후 불고 있는 주먹은 쥐고는 간단하게 치유를 한다.
"누가 이렇게 가르쳤—"
"신 님이 이렇게 가르쳤잖아."
"알아보느냐? 그건 그렇고 내가 언제… 아."
'분명 괴이를 상대할 때는 가장 먼저 주먹을 날리라고 했지.'
분명 괴력난신만 있을 때는 지구 최강이 하윤이였지만 르뤼에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이제는 아니다.
그래도 딥 원이나 다른 마법사는 간단하게 이기겠지만.
"확실히 세상에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네가 강하긴 하지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무작정 주먹을 날리면 안 되지."
"혹시 화났어요? 신 님인 줄 몰랐다니까."
하윤이는 내가 화났다고 생각한 건지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화 안났다. 그리고 애초에 네가 너보다 강한 녀석을 만날 상황은 왠만해서는 없겠지."
"신 님을 빼면 애초에 저보다 강한 녀석이 있긴 해요?"
"있긴 한데 한 놈은 바닷속에서 자고 있고, 또 한 녀석은 바닷 속에서 생활하니까 바다 멀리까지 가서 싸움을 거는 게 아니면 애초에 싸울 일도 없겠지."
"그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저는 강림 주문은 쓴 적이 없는데."
"그냥, 유희라고 해야겠지. 그 옛날이야기 보면 있지 않으냐."
사람 한 명 골라서 과거로 보내버리겠다는 말은 절대 못하겠다.
자식 키우듯이 키운 내 신도면서 친한 친구같은 느낌도 있으니 '인간이 바라봤을 때' 악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말은 못 하겠다.
이렇게 된 거 여행이라도 갈까.
"하윤아. 방학은 언제 하느냐?"
"응? 며칠 전에 시험 끝났으니까 한 달 정도?"
"그럼 여행이라도 떠나는 건 어떠느냐. 계곡이든 바다던 간에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해주마."
"방학에 친구들이랑 바다로 여행가기로 했는데."
"앗."
"미리 내려온다고 말했으면 약속 안 잡았을 텐데. 미안, 신 님."
"아…. 그래, 네 약속도 중요하니 이해한다."
이렇게 된 거 명계의 약 따위 나중에 쓰기로 하고 하윤이가 가는 여행이나 몰래 따라가야겠다.
스토커가 아니고 부모의 마음으로 따라가는 거다.
만약 같이 간 친구 중에 남학생이 있다면….
아까 하윤이가 한 '성불 펀치'처럼 '유교 펀치'를 먹여 줘야겠지.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구나."
"벌써 돌아가는 거야? 아니면 지낼 곳은 있어?"
"내 힘으로 어떻게든 가능하단다."
"그래? 우리 집은… 부모님 때문에 안 되겠네.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괜찮다니까. 아무튼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서 친구들이랑 놀거라."
"응, 그럼 난 갈게."
이렇게 하윤이를 떠나보내고 나는 비가시화 주문을 통해 투명 인간처럼 변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가서 만약을 위해 보호막까지 두른 후 시간을 빠르게 돌렸다.
차라리 과거로 돌아가서 약속을 잡기 전에 말을 걸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기도 하니까.
그렇게 약 한 달 정도가 지나고 나는 비가시화 주문을 해제했다.
'하윤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군. 여기 동네는 아니니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길이겠지.'
그럼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간 이동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뭔가 할 일을 찾다가 PC방으로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주문으로 빌린 돈으로 충전을 하고 컴퓨터를 켰지만 신분이 없는 몸이라서 할 수 있는 게임은 거의 없었다.
그냥 웹툰이나 보며 시간을 때우면서 하윤이의 위치를 확인하다가 바다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컴퓨터를 끄고는 비상 계단으로 들어간다.
'누가 씨, 계단에서 담배를 피는 거야. 정말 짜증 나게.'
담배는 흡연실에서 필 것이지, 열 받게 왜 여기서 피우는 건지 주문으로 녀석을 손봐주고 싶어졌다.
'넌 폐의 소중함을 느끼거라.'
난간 너머로 슬쩍 쳐다본 후 녀석의 폐에다가 부패의 저주를 걸고는 다시 윗 층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하윤이가 있는 바다 근처로 공간이동을 한다.
칙칙한 비상 계단에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의 드넓은 바다가 보인다.
하윤이는 지금 숙소에서 짐을 풀고 바다로 올 테니 나는 여기서 미리 자리를 잡아 둘까.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파라솔을 팔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자리를 하나 산다.
'응? 이 새끼 혼종인데?'
하프는 아니고 쿼터 정도일까.
눈이 약간 크긴 하지만 이상하다고 볼 정도는 아니다.
'이거 설마 휴식이 휴식이 아니게 되는 건가.'
불길함을 느끼며 나는 선베드 위에 누웠다.
마력으로 선글라스를 만들어내서 쓰고는 주변을 바라본다.
역시 바다는 좋구만.
이런 생각을 하며 하윤이를 기다리다 보니 일행들과 도착했나보다.
여자들끼리만 놀러 온 건지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선베드에 누워 애들끼리 노는걸 쳐다보니 힐끗힐끗 쳐다보는 하윤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내려왔을 때도 금방 찾아왔었지.
마치 놀러가는 딸을 몰래 따라온 부모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보고 있다.
시선이 너무 따갑다.
그렇게 놀던 하윤이는 잠시 쉬겠다고 말하고는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이걸 따라왔어요? 정말 놀고 싶으셨구나."
"아니 뭐, 걱정되기도 하고."
"세상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하다고 말했으면서."
"그래도 내 눈에는 귀여운 꼬멩이 시절이 보여서 말이지."
"윽! 그런 흑역사는 잊으라고요. 신 님."
나는 손을 뻗어서 하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듯이 심연같이 검은 눈으로 쳐다보지만 뭐.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다른 아이가 놀다가 지친 건지 이쪽으로 다가온다.
"하윤아! 어라?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어? 그게, 아는… 지인이라고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이런 우연도 다 있네!"
"자자, 다시 놀러 가자."
"야아— 잠깐! 방금까지 놀다 왔는데."
"에휴. 그럼 잠깐만 쉬다 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바다 쪽으로 간다.
"혹시 모델이세요? 몸이 엄청나신데!"
"하하, 고맙구나."
나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이에게 하나하나 대답해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저쪽에서 놀던 하윤이와 그 일행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 같구나."
옆에 있는 아이와 같이 하윤이 쪽으로 향했다.
"하윤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민아가 사라졌어."
"어디 화장실이라도 간 거 아니야? 아니면 쉬러 갔다던가."
"말도 안 하고 사라져서 잘 모르겠어. 일단 찾아봐야지."
딥 원의 혼종이 있는 도시와 실종된 여고생이라.
암만 봐도 범인이 눈에 선하군.
—툭툭.
"하윤아. 잠시 대화하자꾸나."
"혹시 알아차린 거라도 있나요?"
"일단 위험한 일이 될 테니 저 아이들은 숙소로 보내고 우리끼리 찾아야겠다."
"그래요? 얘들아! 일단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너희들은 숙소로 가서 경찰 좀 불러줘."
"이거 혹시 그런 일이야?"
'그런 일?'
"아마도. 그러니까 빨리 숙소로 가고 경찰 좀 불러줘."
"알았어!"
애들이 도시 쪽으로 향하는 걸 보고는 하윤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일이라니. 저 아이들이 네 힘에 대해서 아는 게냐?"
"예, 뭐. 괴이를 조지면서 겸사겸사 구해 줬거든요. 그렇게 친해진 사이라서 얼마나 센건지는 몰라도 특이한 힘을 가진 건 알고 있어요."
"좋은 친구들이구나. 오래오래 인연을 이어가거라."
"말 안 해도 그럴 거 거든요. 이무튼 애들도 갔으니까 빨리 말해줘요. 범인 새끼가 누구예요?"
"딥 원, 인간들은 심해인이라고도 하는구나. 그 녀석의 혼종이 여기 있었으니 근처에 동굴이나 해저 도시로 납치됐겠지."
"빨리 가서 조지고 조개 구이나 먹으러 가죠."
그렇게 우리는 근처의 동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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