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역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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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니알라토텝처럼 세계적인 규모의 비밀결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
하지만 21세기에 그런 걸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인터넷에 흑마법사 모집 공고라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세계에는 흑마법사끼리 만든 결사단이 여럿 있다.
크툴루를 숭배한다던가, 딥 원과 함께 지낸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그들을 전부 통합해서 내 밑으로 넣을게 아니라면 이번 지구는 리셋을 하고 다음 지구에서 중세 즈음에 시작하는 게 나을 거다.
하지만 존 왓슨에게 선물도 하나 했는데 그걸 쓰는걸 구경 한 번 하지 않고 리셋하는 건 안타까우니까.
물론 리셋해도 그 기록은 남겠지만 중세 시대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희석된 감정으로 보는 것보단 지금의 기대감 그대로 보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그렇다면 중세 시대때 사용할 방법을 지금 생각해 볼까.
아직 존에게 주어질 시련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것도 함께 말이다.
아무래도 부호의 지원이 있으면 결사단을 만들 때에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어떤 부호가 아무런 대가없이 나를 도우려 할까.
힘을 내려 줘봤자 마법사가 아니면 그 진가를 이해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본신을 보여주면 금방 미쳐 버리겠지.
미쳐 버린 부호의 재산만 받고 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의심도 많이 받을 테고 나는 지속적인 지원을 바라는 거니까.
무언가를 충족시켜 준다면 되는 걸까?
하지만 부자라면 웬만한 건 전부 할 수 있을 터.
"어떤 부자라도 해결할 수 없는 건 무엇일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아!"
어떤 부자라도, 아니.
어떤 인간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수명을 늘려 줘? 그건 너무 많이 주는 거 같은데."
모든 사람은 죽는 법이니 침대 위에서 평안히 잠드는 듯이 죽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면?
암이나 불치병에 걸려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연명이나 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내미는 손을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가족, 자식이 불치병에 걸렸다면 더욱 그럴 거고."
그렇다면 두 번째 화신체를 만들 시간이다.
첫 번째 화신체가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는 인간형이라면 두 번째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물론 화신체 하나로 우려 먹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개가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니알라토텝도 999개의 화신체를 가졌다는데.
일단 죽음이 가까운 자에게 다가갈 예정이니 의사 이미지가 좋겠지.
하지만 현대의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이미지는 별로 끌리지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새로워 보이겠지만 내가 시험해 볼 현대에서는 지나가던 의사A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의사 이미지를 가졌으면서 사람들이 알 만한 무언가….
"아, 역병 의사가 좋겠군. 분위기도 나쁘지 않겠고."
역병 의사.
새 부리 가면과 검은 코트를 입은 모습은 마치 까마귀같은 느낌도 든다.
컨셉은 정해졌고 육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화신체가 인간형이었으니 다른 것으로 하고 싶은데.
"역병… 역병이라. 전염병을 옮기는 건 주로 쥐 나 곤충이었지. 그렇다고 쥐를 뭉쳐서 만들 수는 없으니 곤충의 군집형으로 할까."
모기나 파리같은 곤충들부터 전염병과는 관계가 없는 메뚜기나 다른 것들까지 점점 뭉쳐져서 사람 같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위를 덮는 하얀 셔츠와 검은 정장.
역병 의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새 부리 가면과 검은 모자도 씌운다.
거기에 검은 코트와 지팡이까지 들게 하면 할로윈에나 볼 법한 역병 의사가 완성이다.
하지만 목이나 뒤통수는 제대로 가려지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사람이 아니라는 게 들킬 거다.
난 어차피 병세가 심한 사람만 만날 생각이니까 일반인에겐 보이지 않게 하면 되겠지.
비가시화 주문처럼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아닌 존재 자체를 모르도록.
그렇게 완성된 두 번째 화신체를 바라보며 어디에서 실험을 시작해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 미국이 좋겠지. 부자도 많기도 할 테고 의료비도 만만치 않으니 병실에 있는 사람은…. 잠깐, 부자라면 집에서 치료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미국 어딘가의 시내에 화신체를 떨어뜨렸다.
이런 군집형의 몸은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슬쩍 몸을 움직여가며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해 봤고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역병 의사 코스플레이어가 있다면 모두의 시선을 이끌겠지만, 놀랍게도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뭐,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아무튼, 두 번째 화신체도 성공적이라 생각한 나는 그대로 길을 걸어 다니며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붉은색이나 초록색의 십자가가 있나 찾아다녀보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다.
'큰 건물을 찾아봐야 하나.'
일단 큰 건물을 찾아다니며 병원인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기 너머로 보이는 건물로 향하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다.
화신체의 육신을 이루는 곤충 중 하나의 시각을 빌려 뒤를 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지켜보는 어떤 늙어보이는 사제가 있었다.
'내가 보이는 건가? 병세가 위독한 사람이나 나를 볼 수 있을 텐데. 저 사제는 건강해 보이고 말이지.'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해보자.
그러면 정확한 답을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뒤에서 몰래 나를 쫓아오는 사제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길거리로 향했다.
마침내 거리에 나와 사제밖에 보이지 않자 뒤에 있는 그가 말을 걸었다.
"이 사악한 악마야. 도대체 어떤 사람을 괴롭히려 이리도 돌아다니는 게냐."
"오, 이런. 그저 그런 엑소시스트… 구마사였구나."
어떻게 나를 볼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카톨릭의 엑소시스트.
이 세상에 실존하는 악령들을 퇴치하는 사람.
그런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던 거다.
병세가 위독한 사람에게만 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주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의 영적인 능력을 가졌다면 나를 쳐다볼 수 있겠지.
"원래라면 허락을 받고 의식을 행해야 하겠지만, 네가 너무나도 위험해 보이니 어쩔 수 없지…."
"하! 나를 묶어두고 기도문이라도 읽을 거냐."
늙은 사제는 내 말을 무시하고는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손으로 쥐더니 눈을 꼭 감았다.
하윤이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 퇴마사의 모습에 흥미가 생겨 일단 공격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속으로 기도라도 하는 건지 가만히 있는 모습에 지금이라도 공격할까 생각하던 와중 십자가가 약간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빛나는 게 아니다.
새하얀 기운이 십자가에서 피어오르더니 마치 화살처럼 나를 향해 쏘아졌다.
위력을 체감해 보기 위해 날아오는 것을 손으로 막으니 펑—하고 손이 폭발한다.
"흠…. 이 정도 위력인가."
터진 손목의 단면으로 수많은 날벌레들이 떨어지는게, 마치 검은 가루가 흩어지는 거 같다.
하지만 비어 있는 자리를 다른 곤충들이 증식하며 메우면서 비디오를 역재생한 거 처럼 손이 되돌아왔다.
저 사제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제인지 당황하지 않고 다시 기도를 이어가는 거 같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공격을 하마."
내 몸을 이루는 곤충들이 증식해가며 내 주변을 잠식해간다.
검은 날벌레들이 길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 마치 검은 안개를 보는 듯하다.
저 사제도 위협을 느꼈는지 방금처럼 새하얀 빛무리를 날려보지만 작은 구멍만 만들 뿐이었고, 그 구멍도 금세 채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그대로 저 사제에게 날려보내니 검은 파도가 그를 덮치는 모양새같았다.
그는 다급히 새하얀 보호막을 만들어 보지만 금세 깨져 버리고는 파도에 휩쓸릴 뿐이었다.
슬슬 죽었겠다 싶어 벌레들을 회수하니 몸 전체를 뒤덮은 고름과 검은 부종이 보인다.
이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런 시체를 보고도 가까이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사제의 시체를 뒤로 한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아 나섰다.
얼마나 걸어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병원을 찾아내고 말았다.
1층에서 구급차가 오가는 게 보여 그쪽으로 향하니 응급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기대를 품으며 들어가 봤지만 막상 그렇게 상태가 심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고 그냥 중환자실이나 찾아가야겠다 싶어서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병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노인 두 명이 입원한 2인1실이 보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 옆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의사에게 다가가니 옆에서 책을 읽던 노인이 나를 발견한다.
"오, 이런. 오늘이 할로윈이던가? 나는 지금 가진 사탕이 없는데."
"그것참 음산한 의상이구만. 누가 보면 사신이라도 찾아온 줄 알겠어."
의사의 말을 듣고 있던 노인도 나를 발견하더니 사신 같다고 농담을 한다.
"흠? 누가 있던가요?"
"자네는 안경도 썼으면서 그것도 안 보이나? 자네 바로 뒤에 있는데."
"둘이 친해지시더니 저에게 장난이라도 치려는 모양인데, 저는 그런 거에 안 속아요."
뒤를 돌아 내 쪽을 쳐다보지만 당연하게도 의사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아무튼 항암제를 넣을 테니 부작용이 나타나면 간호사를 불러 주세요.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의사가 나가고 문을 닫자 병실 안에는 침묵으로 가득해졌다.
"이런, 우리가 정말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건가? 역병 의사처럼 생긴 사신까지 찾아오고 말이야."
"사신은 해골이 낫을 든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역병 의사는 또 뭐야."
"역병 의사는 여기 눈앞에 있는 이 양반처럼 생겼지. 저 까마귀같은 가면은 방독면이고. 옛날에는 냄새가 전염병의 원인이라 생각해서…."
"알겠네. 자네가 말을 시작하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나서 말이야."
"거 참. 그래서 자네는 누구인가. 우리의 영혼을 수확하러 온 사신?"
"나는… 일단 그대가 칭한 대로 역병 의사라 소개하도록 하지. 일단 나는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네."
"거래?"
"방금 그 녀석이 못 본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나는 노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대신 충성이든 재산이든 뭐든지 받아가는 거지."
"…거절하도록 하지. 충성이라고 했나? 내가 따르는 분은 단 한 분이여서 말이야."
"예전같았으면 일단 해 보라고 하겠지만…. 이 친구와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어서 말이야. 물론 항암 치료를 하면서 더럽게 아프고 차라리 심장마비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도 들지만. 지금은 그저 이 녀석과 카드 게임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야."
이 노인들은 욕심이라는 게 없는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기회를 갈리는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말이야."
"거절했다고 앙심을 품는다던가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다지 그럴 생각은 없다만."
"휴우, 다행이군. 가뜩이나 아파 죽겠는데 더 아파지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야."
"나는 다른 사람이나 찾으러 가 봐야겠군. 그럼, 남은 여생은 잘 지내게나."
"그런 제안을 한 사람 치고는 퍽 괜찮은 사람이군."
이런 말을 하는 노인을 뒤로하고 나는 병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며 병실을 둘러 봤다.
어떤 사람은 잠들어 있었고, 어떤 사람은 혼수상태인지 산소호흡기를 차고 기계가 연결되어 심전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방을 돌아다녔을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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