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저택
* * *
맑은 종소리와 함께 마력의 파동이 울려 퍼지고 1분 정도 되었을까.
끼익—하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검은 집사 복을 입은 노년의 남성이었다.
그의 나이를 보여주는 듯이 하얗게 샌 백발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집사 복 아래에 감춰진 바위같이 단단한 근육은 나이와는 다르게 강력한 그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다.
'제임스가 날뛸 때를 대비해 제압이 가능하도록 강력하게 만들었으니 당연하겠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여기 공용 서재로 차와 같이 먹을 간식을 가져다주게. 이브, 넌 무엇이 먹고 싶으냐?"
"나는 쿠키! 초콜릿이 잔뜩 들어 있는 거로!"
"에반, 너는?"
"저는… 혹시 애플 파이도 괜찮습니까?"
"예, 주인님께서는?"
"나는 차만 마셔도 충분하네."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해 오겠습니다."
집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를 마저 들으며 나는 책상 위의 마도서를 구경했다.
에이본의 서, 네크로노미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읽기에 위험한, 그리고 지구에 반출되어도 위험한 책들은 내 개인 서재에 보관해 뒀지만 그 외의 다른 책들은 괜찮다고 판단해 이곳, 고용 서재에 보관해 두었다.
한마디로 이름도 못 들어 본, 대충 훑어봤을 때 그다지 쓸모없다고 생각한 주문이 담긴 책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서재는 조금만 봐도 미쳐 버리는 책들이 가득한 마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지.
그런 위험한 책들 말고도 하윤이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직접 만든 책도 여러 권 잠들어 있고.
하윤이가 어릴 때 주문을 배우는 데 어려워하면 주기 위해 내가 선별한 주문들이 가득한 책이었는데….
내 생각보다도 엄청난 재능 때문에 슬프게도 저 책들은 빛을 못 보고 있다.
하윤이 너란 아이는….
뭐 그래도 이제는 빛을 볼 날이 머지 않았겠지.
내 옆에서 어두운 색상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이브를 잠시 쳐다본다.
아직 하윤이와 상담은 안 했지만 만일 이 아이에게 문장을 새긴다고 해도 하윤이처럼 주문의 천재가 되는 일은 없겠지.
그저 책을 읽어도 광기에 빠지지 않도록 도울 뿐이다.
내의 첫 사제인 제사장, 그는 감응력을 가지긴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손쉽게 광기에 빠지기 쉬운 사내였다.
그걸 막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정신 보호 주문을 걸었지만 만날 때마다 계속 걸어 줄 수는 없으니까 문장에 합쳐둔건데.
물론 하윤이는 넘치는 재능과 그에 걸맞은 정신력 덕분에 문장따위 필요 없었지만.
단지 제사장과의 약속,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때문에 새겨 준 것이다.
그의 혈통이 문장을 계승하는 의식을 한다면 그것을 이행한다는 것이었지.
물론 그의 혈통이 아닌 자에게 새겨 주지 않는다는 약속은 안 해서 누구에게나 새겨 주는 건 가능하지만.
그 많은 시간 동안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곤 제사장의 혈통 뿐이었으니.
그것도 얼마 안 가서 맥이 끊겼고, 인간의 기준으로 아득한 시간이 흘러서 하윤이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지.
결국엔 내가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아이, 이브가 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면서 못 봤던 것들을 모두 보고 싶다고 했던가.
그 소망을 위해선 본연의 힘을 길러야겠지.
언제까지나 내가 보호할 수는 없으니까.
그걸 위한 문장을 새기기 위해 하윤이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냥 지금 저택으로 데려올까? 지금 여유로운지 모르겠네.'
지구에 있는 하윤이를 쳐다보니 학교에서 책상에 앉아 졸음을 떨쳐 내려 하지만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게 보인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매서운 눈빛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시선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깨달고는 다시 순둥순둥한 눈으로 돌아갔다.
'신 님, 이런 시간에 왜 쳐다봐. 덕분에 잠 깨긴 했지만.'
'뭐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여유로우면 집으로 초대하려 했지.'
'집? 나도 빨리 구경하고 싶은데 곧 수업 시간이라.'
'방과 후에 약속이 없다면 초대해주마. 괜찮겠느냐?'
'나야 좋지. 신 님의 집이라니, 너무 기대되는데—'
곧 수업 시간이라 지금은 못 오겠다라.
뭐, 어릴 적부터 이런 세계에 발을 들인 아이니까.
다른 친구들은 싫어할 수업 시간이라도 하윤이에겐 소중한 일상이라는 거겠지.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소중한 건 나에게도 소중한 것이니 이 정도 시간이야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집사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대화나 해 볼까.
이런 침묵도 어색하기 마련이니까.
이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말을 걸기도 어려울 테고.
"이브, 보고 싶은 책이라도 있느냐?"
"으음…. 동화책은 별로고, 소설? 내용이 재밌으면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이게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구나."
나는 주문 : 요그소토스의 주먹을 응용해 저 멀리 있는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스 문자로 적혀진 제목은 일리아스라 적혀 있었다.
"이건 뭐라고 읽어요?"
"일리아스라고 한단다. 그리스 신화는 아느냐?"
"네, 제우스가 난봉꾼인 그거죠?"
"그렇단다. 겉표지는 이래도 내용은 영어로 적혀 있으니 안심하고 읽거라."
"네에—"
이브는 책을 펼치더니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금세 빠져들어서는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못 들을 정도로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에반과 대화하기 딱 좋은 상황이군.
"그래, 에반. 차가 나오기 전까지 대화를 다시 해 볼까. 자네가 진정하도록 차를 가져오게 시켰지만 간식을 만드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음…. 그러니까 방금 당신의 말을 생각해 보면, 당신이 제 상급자라는 겁니까? 저 밖의 하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상급자라. 뭐,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 자네가 이해하기엔 그게 편하기도 할 것이고."
"방금 제 머리가 아프게 한 것을 보면 마법사라던가 그런 것인가요?"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조금. 아니, 많이 불편하군."
"그러시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역시 이런 분위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려볼까.
에반이 관심을 보일 만한 화제는 여기 책상 위의 마도서만 봐도 뻔히 보이는군.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자네 머리만 아파올 테니 화제를 돌리지. 이 마도서들을 보면 아무래도 마법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눈을 떠보니 수수께끼의 저택이지 않습니까. 제가 당신의 하수인이었다고 하셨으니 여기서 일했던 거 같지만 기억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상황엔 정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 여기 집사와 메이드가 적대적이지 않은 걸 확인하고 서재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도서를 발견했다 이런 건가?"
"그렇죠. 볼 수록 뭔가 빠져들면서 어떤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뭔가 명령을 들으면서 누군가를 뒤쫓던 거 같던데."
"호오, 광기가 다시 찾아오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건가? 그리고 명령을 들었다는 건—"
'—이런 식으로 들렸다는 거겠지?'
"…예, 머릿속에 울리는 듯한 이 목소리가 맞는 거 같네요."
나와 에반은 주문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집사가 여러 주전자와 간식이 담긴 트레이를 가져왔다.
이브는 고소하면서 달달한 쿠키 냄새를 맡았는지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는 집사 쪽을 바라본다.
"여기 주전자에는 따듯하게 데운 우유가, 이건 홍차가 담긴 주전자입니다. 에반 님께서 요청하신 애플 파이는 여기 있고…."
집사가 말을 흐리더니 이브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저택으로 와서 처음으로 마주친 메이드를 제외하면 통성명을 한 적은 없었지.
"이브예요!"
"예, 이브 님께서 요청하신 초콜릿 쿠키는 여기 있습니다. 각설탕은 여기 있으니 취향에 맞게 타서 드셔주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른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브가 먼저 찻잔에다 설탕을 하나 넣고는 홍차를 넣고 설탕이 녹을 때까지 살살 저어 주고 있다.
그러고는 따듯한 우유를 넣고는 붉은 홍차가 흰색으로 물드는 걸 보다가 적당한 색이 되었을 때 멈춘다.
그렇게 만든 밀크티를 마시더니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걸 바라보던 에반은 특이한 걸 봤다는 듯이 무언가 말한다.
"홍차를 먼저 넣고 우유를 넣다니. 그렇게 만들면 맛이 별로일 텐데."
"어떻게 만드는 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렇게 하는 게 제 취향인데."
"과학적으로 홍차를 먼저 넣으면—"
에반이 이렇게나 밀크티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설정할 때 그다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럼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건 당신의 생각도 듣고 싶군요. 아, 그리고보니 이름을 묻지 않았군요. 제 이름을 알고 있어서 깜빡했는데, 계속 당신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나도 알고 싶어요!"
나는 이름을 알려 줘도 괜찮을지 생각하다가 그냥 말해주기로 했다.
"…라니아라고 부르면 된단다."
"응! 라니아 오빠. 그래서 대답은 뭐야?"
"그래요. 라니아 씨… 아니, 라니아 님. 순서는 중요한 법입니다."
나는 귀찮게 말로 하기보단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내 찻잔에 각설탕을 하나 넣고 그대로 홍차를 넣는다.
홍차는 차오르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고 우유를 넣을 공간마저 차지해 버렸다.
에반은 처음엔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지금은 이상한 것을 쳐다보는 듯이 봤다.
"나는 우유는 넣지 않는다네. 향기를 즐길 뿐이지."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즐기다가 입을 갖다댄다.
"에휴, 뭐. 상급자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거겠죠."
에반은 체념한 거 처럼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이브도 쿠키를 와구와구 먹으며 밀크티를 마시는 게 온 세상의 행복은 모두 가진 거 같은 표정이다.
"역시 단 거는 최고예요! 병원에선 맛도 없는 밍밍한 거만 나오고, 그것도 못 먹을 정도인 날도 있었거든요."
"후후, 그렇구나. 그나저나 이브 너는 방금 에반처럼 이상한 눈길로는 쳐다보지 않는구나."
"제가 언제 그런 눈빛으로— 음."
나는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니 에반이 뭐라고 말하려다 침묵한다.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제 취향에 뭐라고 하는 것만 아니면 남에게 그럴 이유는 없잖아요? 물론 걸어온 싸움은 피하는 주의는 아니지만요."
"아이고, 귀여운 이브.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좀 더 세게, 하지만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렇게 우리들의 티타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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