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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33화 (33/154)

〈 33화 〉 저택

* * *

나를 찾아온 메이드와 함께 내 방으로 향하니 침대에 반쯤 앉은 채로 기지개를 하는 이브가 보였다.

"으으으으, 후아아."

손을 깍지끼고 위로 뻗고는 마치 고양이처럼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며 등허리에서 뚜둑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곧게 편다.

"그래, 낮잠은 잘 잤느냐."

"조금이라도 자니까 개운해졌어요. 잠에서 깰 때는 다시 병실 침대가 아닐까 무섭기도 했는데, 다행히 꿈은 아니었네요."

"네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지."

에반과 제임스가 가구 쇼핑을 하는 동안 소모된 시간이 두세 시간 정도니 하윤이가 하교하기까지 아직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그동안 이브의 침실이나 마무리해야지.

이브를 만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얘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분홍색투성이의 방은 좋아하지 않을 거 같아 보인다.

오히려 정색하면서 말로는 표현하지 않겠지만 눈빛으로 욕하겠지.

"이브. 내가 말한 언니가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네 방을 정해서 꾸미는 게 좋겠구나."

"저는 이대로도 마음에 드는 걸요?"

"아, 여긴 내 방이란다. 아직 네 방을 정하지 않아서 일단 여기에서 자게 눕혀 뒀단다."

나는 이브의 작은 손을 잡아주고는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눈 깜짝할 세에 마력으로 만든 슬리퍼를 신겨 주고는 잡은 손 그대로 문밖으로 향했다.

키가 작은 이브의 발걸음에 맞춰 계단을 내려가 아래층의 어떤 방 앞에 선다.

문을 열자 윗층의 내 방보다는 약간 작은 방이 보인다.

"이 방은 어떠느냐. 기본적인 건 갖춰져 있지만 따로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보거라."

"저는 이대로도 괜찮아요. 그런데 꼭 혼자서 방을 써야 해요? 병원에서 지내느라 익숙해지긴 했지만…"

"혼자 자기엔 쓸쓸한가 보구나. 하윤이는 따로 지내고 있으니 불가능하고, 저기 밖의 메이드는 어떠느냐?"

나는 방금까지 따라다녔던 지금은 문밖에서 대기 중인 메이드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옷소매를 잡고는 살짝 당겼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제 부모 역할이니까요. 그, 딱히 외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흐음. 이브는 어리구나. 하지만 매일 같이 함께 있어 줄 수는 없을 텐데."

"실제로 어리긴 한데요."

나는 손을 뻗어 침대 위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폭신한 이불 위로 떨어진 그것들은 이브가 껴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인형이었다.

하나는 정장을 입은 모습의 첫 번째 화신체이고, 또 하나는 얼핏 보면 까마귀 인형으로 착각할 만한 두 번째 화신체인 역병 의사 인형이었다.

물론 크기가 작아지기도 하고 데포르메되어서 그저 귀엽게만 생긴 인형이다.

"가능하다면 잠들 때까지는 함께 있어 주마. 내가 없다면 이 인형들을 나라고 생각하고."

"오, 귀여운 인형이네요."

"이런 게 좋다면 더 만들어 줄 수 있단다."

"괜찮아요. 여기 검은색투성이의 까마귀같이 생긴 인형이 처음에 만났던 그 두 번째라는 화신? 그걸 인형으로 만드신거죠? 여기 이 인형은 누가 모티브인지 눈앞에 보이네요."

"네 생각대로란다. 나라고 생각하려면 닮아야 하니까."

"두 번째가 있다면 세 번째는 어디 있나요?"

"아직은 없단다. 나중에 생긴다면 인형으로 만들어 주는 게 좋겠느냐?"

"꼭이예요"

이브는 인형이 마음에 든 것인지 각각 양팔에 껴안고는 침대에 앉았다.

이브의 방을 꾸미는데 시간이 들거라 생각했는데 이대로도 좋다고 해서 생각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소모되지 않았다.

이대로 할 것도 없는데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다가 그냥 하윤이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지내는지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무슨 일이 생겨서 학교가 빨리 끝났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책상에 앉은 채로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하윤이가 보일 뿐이었다.

수학 시간인지 교탁 앞에 선 머리가 조금 벗겨진 교사가 녹색 칠판에 분필로 어떤 수학 기호를 적는 것이 보였다.

어떤 공식을 설명하고 예제 문제를 풀어 주고는 교과서에 있는 어떤 문제를 칠판에 적고 학생들이 나와서 풀도록 시키는 게 전형적인 수업 시간의 모습이었다.

수업에 열성적이거나 태도가 좋아 보이려고 손을 들며 자기가 풀겠다 나서는 학생들 사이에는 하윤이도 보였다.

하윤이는 실제로 열성적인 부류겠지만.

왠지 나 혼자만 온 학부모 참관같은 기분이다.

저기 교사는 학생에게 오늘 날짜를 묻고는 번호순으로 문제를 풀 학생을 선택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중 한 명에 하윤이가 끼어 있었다.

내가 봐도 간단한 문제여서 하윤이나 다른 학생들도 간단하게 풀었고, 간단한 문제긴 해도 푼 거에 의미를 두어 칭찬해주기로 했다.

사실 약간 놀리는 감도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후후, 사칙연산이 어렵다고 도와달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런 문제도 푸는구나.'

'아니 그때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부끄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신 님.'

'장하다, 장해.'

'진짜 화낸다?'

'어이쿠. 그래서 끝날 때까지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게냐.'

'앞으로 2교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끝이야. 오늘은 청소 당번도 아니어서 더 빨리 가지.'

'그래. 학교를 나오면 마중 나가주마.'

하윤이를 놀리면서 미소를 지은 걸 봤는지 이브가 나에게 질문한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그렇게 미소를 짓고."

"내가 말한 언니와 방금 대화했단다. 조금 놀리고 있었지."

"텔레파시같은 거예요? 오오, 신기하다."

"문장만 새긴다면 너도 가능할게다. 아마도 말이지."

"언니가 허락하길 빌어야겠네요."

하교할 때까지 약 두 시간인가.

그동안 할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시간을 빠르게 보낼 때는 역시 책이나 읽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공용 서재로 갔다.

이브도 일리아스를 전부 읽지 않아서 같이 왔고.

나는 그렇게 작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서재를 돌아다니며 책을 찾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

우주를 여행하는… 아무튼 긴 제목의 소설책.

두께도 사전처럼 두꺼워 흉기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약 천 페이지 가량 되는 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니 두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 있었다.

조용한 서재에서 혼자 소리를 내고 있는 벽걸이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하교 시간이 된 것을 발견하고 나는 책을 덮었다.

한참 재밌게 읽고 있었지만 책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안 읽는다고 어디로 도망치는 것도 아니니 나중을 기약하자.

하윤이는 저택에 오는 것이 처음이니 여기 서재보단 로비에서 관문을 만들어서 가는 게 좋겠지.

그 편이 저택을 구경시켜 주기도 편한테고.

이브도 내가 책을 덮는 소리에 시계를 바라보더니 집중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택에서 지내는 모든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 로비에 메이드를 모두 모이도록 명령하고 집사에겐 에반과 제임스를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로비에 문이 있는 쪽에다가 관문을 만들고는 하윤이가 다니는 학교 근처 사람이 없는 골목길에 통하도록 만들었다.

이브에게도 여기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관문을 통과하니 회색 벽으로 둘러 쌓인 좁은 골목이 보인다.

당연하게도 사람은 없었고 조금 기다리다 보니 멀리서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번처럼 내 마력을 느끼고 하윤이가 찾아오는 거겠지.

내 추측대로 저 멀리서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소녀가 뛰어온다.

치마가 펄럭거릴 정도로 뛰어오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체육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 왠 정장이야? 이렇게 입으니까 멋있네, 신 님."

"이 정도의 외모면 누더기를 입어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우와 신 님이 그런 말 하니까 좀 그렇다. 뭐, 그때 여행 갔던 내 친구들도 이름이 뭐고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긴 했었지."

"훗, 좀 더 찬양해도 괜찮단다."

"뭐래. 빨리 집 구경이나 가자. 학교에 있는 동안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그래그래. 여기 관문에 들어가면 된단다."

이렇게 말하고 하윤이와 함께 관문에 들어가자 양쪽에 서서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집사와 메이드가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 우리도 같이 인사해야 하는 건가?"

"이미 늦은 거 같은데요."

"늦었어도 일단 인사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저는 어떻게 보면 입양된 딸 같은 포지션인데."

"일단 하자!"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제임스도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했다.

에반도 같이 허리를 숙이면서 이브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이브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어떤 영화에서 본 걸 따라 하듯이 양손으로 치마를 쥐고는 가볍게 올렸다.

"오…."

하윤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인사받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감탄하는 게 보인다.

나는 하윤이에게 이브와 에반, 제임스를 소개시켜주기 위해 그 셋을 불렀다.

"모든 사용인은 자신의 업무도 돌아가도록. 이브, 에반, 제임스. 너희들은 이쪽으로 오거라."

나는 손으로 관문을 지우고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명을 소개시켜주었다.

"여기 은발의 여자아이는 이브. 금발 벽안의 사내는 제임스. 여기 갈색 머리의 멍청해 보이는 녀석은 에반이란다."

"저는 동의 못 하는데요."

"저는 동의하는데요?"

"이브, 사실이라도 사람이 상처받게 말하면 안 되지."

"제임스 너마저?!"

"어…. 그, 나이스 투 미트 유, 앤 유?"

"이런. 그건 너무 주입식 교육의 폐해같지 않느냐."

"신 님. 저는 언어 쪽이 너무 어렵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지."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윤이가 뭘 하냐는 듯이 쳐다본다.

"뭐 하세요. 신 님."

"어? 이제는 영어로 들리네요?"

"오. 나도 한국말로 들리는데? 이거라면 영어 시험도…."

"이 저택에서만 통하는 거란다."

"에잉. 하나뿐인 신도인데 그런 서비스도 없어요?"

"이게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아야!"

내가 꾸짖는 듯이 말하며 딱밤을 때리자 하윤이가 아픈 척을 한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윙크를 하는 게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셋이 서 있는 곳을 쳐다 보니 친화력이 좋은 이브가 먼저 다가온다.

"언니가 라니아 오빠가 말한 그 사람이에요?"

"아마도 그럴걸. 잠깐, 라니아 오빠? 혹시 신 님 이름이 라니아예요?"

"아, 그러고 보니 너는 처음부터 그냥 신 님이라고 불렀었지.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서 말해 준 적이 없구나."

하윤이는 이마를 탁 치며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거의 십 년 만에 이름을 알아차리다니. 아니 근데 왜 이름을 물어볼 생각을 안 했지."

"흠…. 뭐, 이제 와서 알았으니 상관없지 않느냐."

"그리고 이름이 한국 식이 아니네요. 할머니가 섬긴 신이라서 한국 계통이라 생각했는데."

"뭣하면 다른 이름도 만들 수는 있는데 말이지."

"어차피 계속 신 님이라 부를 거니까 상관없어요."

그리 말하고는 무언가 물어보는 이브에게 답해주며 조잘조잘 얘기했다.

'뭐, 문장 이야기는 대화가 끝나고 말해도 늦지 않겠지.'

그렇게 걸즈토크가 끝날 때까지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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