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그림
* * *
어느새 메인 요리도 거의 다 먹어가는 나는 다른 이들은 얼마나 먹었는지 둘러보았다.
이브는 아직 어리기도 해서 그런지 반 정도 먹었고 나머지는 나와 비슷했다.
자기 혼자만 먹는 걸 구경받는 것도 부끄러울 테니 나는 먹는 속도를 늦췄다.
이브와 같이 마지막 한 입을 먹고는 다시 종을 만들어 메이드를 불렀다.
금방 온 메이드는 접시와 식기를 정리하고는 디저트를 준비해 오겠다 말하며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배를 쓰다듬으며 배부르다는 듯이 만족한 표정을 지은 하윤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응? 신 님, 혹시 내가 바보 같은 표정이라도 지었어?"
"아니다. 그저 네가 만족해하니 기쁠 뿐이란다."
"사람 부끄럽게 그런말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윤이를 놀리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메이드가 디저트를 가져왔다.
무슨 과일에다 아이스크림을 얹은 모양새인데.
"설탕에 졸인 사과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입니다. 녹기 전에 드셔주세요."
내 앞에 놓인 접시 위에는 샛노란 과육이 아닌 설탕에 졸여서 그런지 약간의 황금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그 위에 올려진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금방 조리해서 뜨거운 졸인 사과와 잘 어울릴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마실 것이 더 끌린다.
내 앞에 놓인 접시를 이브에게 넘겨 주고 메이드에게 말한다.
"나는 괜찮으니 이브 네가 두 개 다 먹거라. 나는 포트 와인 한 잔만 가져다주게."
"네, 알겠습니다."
나는 식사를 끝 마치는 디저트를 맛있게 먹는 이브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건네주는 와인잔을 받았다.
달콤한 포도 향이 방금 먹었던 것의 기름진 것을 함께 끌고 가는 거 같아서 좋은 느낌이었다.
디저트까지 전부 먹어치운 에반과 제임스는 할 일이라도 있는 듯 먼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에반이라면 내가 준 마도서를 탐구하느라 바쁘긴 하겠지만 제임스는 어째서지.
하긴 나에겐 아니어도 오늘 처음 본 사람 세 명과 함께 식당에 계속 있는 것도 고역이겠지.
그나마 며칠 동안 함께 저택에서 지내오면서 친해진 에반이 할 일이 있다고 나간다고 해서 같이 나간다고 한 게 틀림없다.
그렇게 식당엔 나와 하윤이, 이브 셋만 남았다.
이브는 나에게 하나 더 받아서 아직까지 먹고 있지만, 하윤이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는 눈동자를 슬그머니 돌리며 디저트를 하나 더 부탁해도 민폐가 아닐지 고민하는 게 떡하니 보였다.
"하나 더 먹고 싶다면 부탁해도 상관없단다."
"어, 그럼 하나만 더 만들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 옆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는 하윤이의 주문을 받고는 주방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졸인 사과가 더 있던 건지 금방 가져온 아이스크림을 받은 하윤이는 물고 있던 숟가락으로 사과를 반으로 뚝 자르고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입으로 넣었다.
"음, 따듯하고 달달한 사과랑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궁합이 좋네요. 만드는 방법도 간단할 거 같은데 레시피 같은 거 없나요? 집에서 만들어 먹고 싶은데."
"원하신다면 주방장 님께 레시피를 받아올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맛있다고 해도 레시피까지 가져가다니.
저택에 찾아와서 먹으면 되겠지만 가족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
어느새 디저트까지 다 먹고 레시피가 담긴 종이까지 받은 하윤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이지.
그러고 보니 하윤이가 집에 연락은 했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집에 저녁은 먹고 들어간다고 연락은 했느냐?"
"아, 깜빡했다. 그래도 학원은 안 다니니까 9시 전까지만 들어가면 혼나지는 않을 거야."
"조금 있다가 관문을 만들어 주마. 집 근처에다가 만들면 편하겠지. 차라리 네 방의 옷장이나 다른 가구에 주문이라도 새겨둘까.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저택으로 찾아올 수 있을 텐데."
"나중에 한국에 놀러오면 그때 하면 되겠네."
나도 와인을 마저 마시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브도 일어나서 하윤이의 손을 잡고는 같이 식당을 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 전처럼 로비에 와서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한국에 몇 년 후에 갈 수도 있으니 오고 싶으면 말하거라."
"언니 잘 가요!"
"응. 이브도 잘 지내고."
하윤이는 무릎을 꿇고 이브를 꼬옥 끌어안아주고 다시 일어섰다.
나는 가장 사람이 다니지 않으면서 하윤이네 집에 최대한 가까운 곳을 찾아 관문을 열었다.
으슥한 골목길이긴 해도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겠지.
어두운 밤이라 괴한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때는 괴한의 명복을 빌어 줘야 할 거고.
"그럼 잘 돌아가거라. 이상한 사람 만나면 본때를 보여주고."
"그런 사람들은 예전에 다 교육했으니까 새로 이사 온 사람만 아니면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구나. 아무튼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네에."
하윤이는 새카만 관문으로 걸어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문은 빠르게 닫혔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잠을 자지 않으니까 이브가 자기 전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가 맞는 질문이겠지.
방금 저녁을 먹었으니 양치라도 시켜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모든 방을 알려 준 게 아니니 다른 방이나 소개시켜줄까.
혹은 목욕을 하러 욕실로 가도 상관없겠다.
그 규모를 생각하면 욕실이라기 보단 실내 온천이나 목욕탕이라 해도 될 정도지만.
양치를 하려면 화장실은… 손님용 화장실을 알려 줘야겠네.
애초에 화장실은 방에 이어져 있어서 양치를 할 땐 그곳을 사용하면 되지만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신호가 오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보단 손님용 화장실을 쓰는 게 나을 테니까.
그럼 양치는 자기 전에 자기 방 화장실에서 하도록 시키고 나는 손님용 화장실과 욕실이나 소개시켜 줘야겠다.
이브가 목욕하는 동안 나는 그림이나 마저 그리고 있을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제대로 된 목욕은 오랬동안 못 했을 테니까.
기껏해야 따듯한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준 정도겠지.
목욕하는데 서툴 테니 메이드 한 명과 함께 들어가는 게 좋을 거고.
그럼 바로 실행에 옮기자.
"이브, 낮에는 공용 서재와 연무장 정도만 알려 줬었지."
"네. 그리고 방금 나온 식당도요."
"오늘은 손님용 화장실과 욕실만 알려주마. 화장실은 네 방에도 하나 있지만 네 방에서 멀리 있을 때는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편할 테니까."
"욕실이면 목욕해도 되나요? 따듯한 물에 들어간 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인데."
"그럼 바로 욕실로 가마. 화장실은 나중에 설명해도 충분하겠지. 아니면 도면이라도 만들어서 주마."
"네! 빨리 가요!"
나는 욕실로 걸어가며 중간에 커튼을 청소하고 있는 메이드에게 손짓해 따라오라고 했다.
내 뒤에 붙어서 따라오고 있는 걸 확인하고 옆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브가 보인다.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려는 게 목욕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보여주는 거 같았다.
금방 도착한 욕실의 문을 열자 옷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보였다.
그리고 저 미닫이문을 열면 커다란 욕조가 보이겠지.
"오랜만에 하는 목욕이니 마음껏 하거라. 다만 현기증이 일어나면 빠르게 나오도록 하고."
"네에. 메이드 언니, 빨리 들어가요!"
메이드의 옷소매를 쥐고는 잡아당기면서 저러다가 옷을 입은 채로 욕탕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메이드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고 나는 그림을 그리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니 커튼이라던가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이 위치가 약간 바뀌어 있었지만 청소하면서 캔버스는 건들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커튼 옆의 갑옷들과 다른 배경을 마저 그리며 그림을 완성시켜 나갔다.
잠시 후 그림을 살펴보니 커튼의 주름 하나하나와 갑옷의 광택까지 마치 TV 화면 너머의 복도를 보는 거 같았다.
이제 정말로 움직이게 해야겠지.
캠퍼스의 물감을 전부 마르게 만들고 반대로 돌린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려 주문을 새긴다.
캔버스의 모서리 부분에 전부 새기고는 다시 돌려보자 방금과 똑같은 그림이 보인다.
실패한 건 아닐까 싶어 그림으로 손을 뻗어보지만 손가락이 그림에 닿자 점점 파고들어가졌다.
그리고 그림 속으로 내 팔이 보이는 게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팔부터 몸통, 다리까지 전부 그림 속으로 넣으니 붉은 커튼이 쳐지고 옆에는 갑옷에 서 있는 복도에 내가 서 있었다.
그럼 이제 기어다니는 것을 소환해야 할까.
아니면 직접 흑마법사를 만들어서 벌레에 파먹히도록 만들고는 종속시킬까.
일단 존의 시나리오에선 소환하는 게 좋겠지.
기어다니는 것을 만들려면 아마도 시행착오가 여러 번 있을 거 같으니까.
나는 잠시 복도를 걸어다니며 내가 생각했던 장소가 만들어졌는지 확인했다.
일단 중요한 지하실부터 확인할까.
계단을 찾아서 내려가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저택과 어울리지 않는 회색 돌 계단이 보인다.
그곳을 내려가보니 벽에 걸려 있는 횃불과 실험실로 보이는 방도 여럿 있었다.
완성된 것은 확인했으니 나중에 살아 움직이는 갑옷이나 목각 인형 골렘을 두도록 하고 나는 내가 이쪽으로 왔던 그림이 걸려 있는 복도로 다시 갔다.
복도에 걸린 화려한 액자에 보이는 그림.
그것은 내가 그림을 그렸던 방이 그대로 보였다.
존의 사무실에 걸어둔다면 이것과 다른 그림이 있겠지.
출입을 할 때의 제한은 나중에 걸어두기로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그림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과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의 높이차 때문에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이런 것도 약간 조정을 해 두는 게 좋을까.
어차피 들어갈 건 내가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완성된 그림에 다시 천을 덮어두고는 시간을 확인하며 아직까지 목욕을 하고 있을까 싶어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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