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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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로 들어가니 몸에 수건을 두르고 앉아 있는 이브가 보였다.
이브의 등 뒤에는 똑같이 수건을 두른 메이드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말려주고 있었다.
허리까지는 아니어도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이 헝클어질까 조심스레 수건으로 감싸며 톡톡 치다가 내가 들어온 걸 발견했는지 동작을 멈췄다.
나는 손짓으로 계속 하라고 명령하고 이브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브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 마치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따듯한 물에 오래 들어가 있었는지 약간 몽롱해 보이는 게 뒤에서 머리를 말려주는 메이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누워서 잠들었을 것이다.
아까 간단하게 잠을 자긴 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것일까.
하긴 성장기에는 많이 자야지 무럭무럭 자랄테니까.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앉아 있다가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눈이 점점 떠진다.
"오셨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을 뿐인데 왜 이렇게 노곤해지는 걸까요. 아, 오래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손가락도 이렇게 쭈글쭈글해졌어요."
"호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나."
이게 삼투 현상때문이었나.
최근엔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는 연구도 있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그것이 떠올랐다.
이브의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은 있어야 언제 한 번 지구에 내려가도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특히 산수는 많이 쓰이니까.
주문을 가르칠 때 같이 가르쳐야 하나.
아니면 선생을 하나 납치해서 시키는 방법도 있겠다.
역사는 같이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배울 거고.
언어는 주문으로 어떻게든 때우던가 할 일이 없다면 배워도 되겠지.
법이라던지 사회와 관련된 것은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어 살아갈 생각이라면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리고 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주문도 있긴 하지만 왜곡하는 주문도 있어서 함께 배우면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일단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고 더 배우고 싶다 말하면 그때 생각해도 괜찮겠지.
외모만 보면 초등학생으로 보이지만 먹을 거에 보인 반응이나 오랜만의 목욕이라 말한 걸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입원했을 거다.
부모라는 자들이 병원에서 공부하라고 시켰으리라 생각도 들지 않고.
그러고 보니 아직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브가 입원했던 병원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오랬동안 입원한 병약한 소녀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종되었는데 지금쯤이면 신고하고도 남았겠지.
며칠 후에 감시로 붙여둔 별의 흡혈귀의 기억이나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의 생각을 기억의 건너편에 보관해 둔다.
공부에 대한 건 지금은 비몽사몽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테니 내일 물어보자.
메이드는 수건으로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했는지 헤어 드라이기를 가져와서 따듯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뒤에서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니 이브의 눈이 다시 감기고 있었다.
다시 깨웠다간 잠이 완전히 깰 수도 있으니 이대로 머리만 다 말리면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드라이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던 욕실은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이브의 자그마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런데 옷은 어떻게 갈아입히지.
내가 하면 내일 일어나서 부끄러워할 테니 동성인 메이드가 해주는 게 좋겠지.
자는데 드레스를 입힐 수는 없으니 잠옷을 새로 만들어 줘야 할 테고.
간단하게 새하얀 잠옷과 속옷을 만들어 주고 나는 잠시 뒤돌아 있었다.
스윽하며 천과 살이 스치는 소리가 몇 번 나고 잠시 후 뒤돌아보니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채로 누워 있는 이브가 보였다.
함께 목욕해서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메이드는 이브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하고 나는 이브를 안아 들어서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몇 번 오르고 주문으로 문을 여니 내가 만들어 준 인형이 놓여 있는 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에 이브를 눕혀주고는 인형을 안겨 주고 이불을 덮어 주니 인형을 꼬옥 껴안으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앉아서 책을 읽어 주거나 자장가라도 불러줘야 하나 인형을 만들 때 생각했었지만 오늘은 피곤했는지 방에 오기도 전에 잠들어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방금 완성한 그림이나 조금 더 손보러 가야겠다.
내가 그림을 그리던 방에 도착한 나는 나중에 화실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가려주는 천을 저리 치웠다.
그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니 붉은색으로 가득한 복도와 가만히 서 있는 갑옷 장식이 보였다.
붉은 커튼에 붉은 카페트에 벽에도 붉은 배경에 은색으로 꽃이라도 표현하려는 건지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 하나가 피를 흘려도 티 하나 나지 않을 거 같은 복도에서 실험 삼아 기어다니는 것을 소환했다.
사람처럼 생긴 형상이 기어서 내게 다가왔다.
구더기와 벌레들이 모여져서 만들어진 육체는 서 있기엔 힘든지 구더기가 떨어지는 팔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마법사였던 것이라 그런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인지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나저나 이러면 조금 곤란한데.
기어 다녀서 그림이 걸린 곳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얘가 그림으로 팔을 뻗어서 납치하는 장면을 원하는데.
납치할 때까지는 잠시 액자를 내려 둘까.
주문으로 액자를 내리고 그림에다가 손을 넣어보라고 시키니 제대로 들어가진다.
"잠깐. 방에 구더기랑 벌레가 떨어졌잖아."
내가 이렇게 말하니 기어다니는 것은 움찔거리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몸짓을 했다.
뭐, 소환을 해제하면 사라지겠지.
아무튼 기어다니는 것에게 따라오라고 시키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가지런히 서 있는 갑옷 장식들.
저것 하나하나에 주문을 새길 생각을 하니 약간 귀찮아진다.
게다가 잡일을 하는 목각 인형도 만들어야 하니.
고생을 하는 만큼 더 재밌는 시나리오가 될 거라며 정신을 가다듬고는 지하실로 향했다.
계단을 기어서 내려가는 게 불편해 보이는지 확인해보고 어느 문을 열어 보니 쇠창살과 그 안에 벽과 연결된 사슬 수갑이 있었다.
여긴 납치한 사람을 위한 장소로 쓰일 예정이고, 옆 방에 들어가니 부글부글 끓는 시약과 시험관 안에 든 이상한 생물이 보였다.
게다가 낡아 보이는 책장에는 오래돼서 헤진 고서들도 놓여 있어 마치 늙은 마법사가 쓸 법한 연구실처럼 보인다.
물론 내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거지만.
다른 방에는 나무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는 창고 같은 느낌이다.
물론 열지 못하도록 못질까지 해 둬서 이거를 열려고 노력하는 일은 없을 거다.
에반이라면 주문으로 파괴할지도 모르지만 지하실에 들어왔다는 건 실마리를 찾았거나 감옥을 찾는 중일 테니까.
굳이 머리 아프게 주문까지 써가면서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저 실험에 쓸 재료나 들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나저나 여기 그림 속 세계 시나리오는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할까.
일단 존의 사무실에 브라운이 놀러왔을 때에 그림을 택배로 보내고.
둘 중 아무나 한 명 잡히는 사람을 끌고 와서 감옥에 가두면 나머지 하나는 알아서 따라오겠지.
에반은 따로 미리 들여보내거나 다른 입구를 만들까.
그동안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면 그다지 퍼즐같은 요소는 없었던 거 같다.
솔직히 현실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
하지만 현실이 아닌 그림 속 세계라면 가능하다.
책장에 책을 꽂으면 천장에서 열쇠가 떨어진다던가.
현실이라면 누가 그따구로 열쇠를 숨겨 놓냐고 묻겠지만 여긴 그림 속이니까.
어느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문을 열면 다른 방이 있다거나 하는 일도 가능하다.
기어다니는 것이 된 마법사가 성격이 안 좋다고 하면 알아서 이해하겠지.
아니면 그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과 기어다니는 것이 힘겨루기를 하느라 저택이 엉망이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존 왓슨이라면 내가 흑막인걸 아니까 소용없으려나.
그렇다면 존을 납치하는 것으로 하고.
내가 마법을 걸어 준 권총은 탈출할 때 알아서 쓰겠지.
아무튼 여차저차 해서 기어다니는 것을 쓰러뜨리고 탈출하는 일행들.
그 이후엔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면서 그림을 태우려 들지 않을까.
내가 들인 노력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데.
어딘가에 또 다른 통로용 그림을 만들어 두자.
구석에 있는 방에다가 아무런 가구도 놓지 않고 벽에 큼지막하게 그림 하나만 걸려 있으면 그것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겠다.
물론 그쪽으로 탈출할 수도 있으니 문은 잠궈두고 주문으로도 파괴하지 못하게 마법적인 보호도 걸어두고.
그 외에 정원도 만들어둘까.
하늘은 아이가 그린 것처럼 노란색으로 별과 달을 그리는 게 좋으려나.
그건 분위기가 맞지 않으니까 현실의 하늘처럼 그리자.
별은 사계절 별자리를 모두 그려놓고.
천체에 관심이 많다면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림 속에 들어왔는데 이게 당연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없던 것은 붓질 몇 번이면 금방 만드니까 상관없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다른 통로 그리기, 갑옷에 주문 새기기, 목각 인형을 만들고 똑같이 주문 새기기가 있네.
스케일을 너무 키웠나.
…이렇게 한탄할 시간에 그림이나 그리자.
대충 구석의 방에 들어와서 방을 둘러본다.
보이는 가구들은 전부 치워 버리고 캔버스를 공중에다가 고정한다.
여기 방은 크기를 마음껏 늘릴 수 있으나 저택의 방은 불가능하니 사람 한 명은 넉넉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하자.
아니면 벽에다가 똑같이 생긴 그림을 걸어두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헷갈리도록 만들까.
그렇다면 바깥의 잠금이 의미가 없어지니 패스.
차라리 여러 괴물들을 그려놓고 문에다가 걸어둔 마법적인 방비까지 뚫어 버린다면 풀어나도록 해도 괜찮겠다.
넓은 방에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큰 액자를 하나 두고 여백의 미라고 하는 건 양심이 없어 보이고.
그냥 방의 크기를 작게 만들면 되겠다.
캔버스에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던 방을 그린다.
그런데 그림 속에서 현실과 통하도록 그림을 그리면 그곳에 액자와 함께 그림이 생기나?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그리자.
나는 고정해 두었던 캔버스를 없애버리고 문을 나섰다.
문을 닫고 방호 주문을 새기면서 붓으로 열쇠를 만들어낸다.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잠기는 소리가 나면서 열쇠가 공중에서 녹아 없어진다.
이제 여길 들어가려면 붓으로 열쇠를 만들어야만 한다.
나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뒤쪽에 내 명령으로 아직까지 따라다니는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고생했다고 말하며 다시 돌려보내고 액자를 찾아가 저택으로 왔다.
내가 나온 캔버스는 이제 액자에 담겨져서 택배로 보낼 거고.
다른 통로를 만들 시간이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 보이는 캔버스를 만들어 허공에 고정한다.
액자라던지 다른 것들을 생각해서 생성한 캔버스에 내가 방금 작게 만든 그림 속 세계의 구석진 방을 그렸다.
그릴 거라곤 벽과 문밖에 없어서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고, 그대로 뒤쪽에 주문까지 새겨서 방과 이었다.
그대로 팔을 뻗으니 역시나 통과해서 그림 너머의 팔이 보인다.
완전히 들어가서 문을 열고 나오니 똑같이 붉은 복도가 나온다.
저 너머로 이어진 복도를 계속 가보니 바닥에 내려져서 벽에 기대어 있는 액자가 보인다.
성공적으로 연결한 것을 확인했으니 다시 저택으로 돌아간다.
이젤에 놓인 그림은 액자에 담아서 택배하면 떠오르는 갈색 골판지 상자에 담고 운송장에다가 존의 이름과 사무실 주소를 적고는 붙인다.
보내는 이는 영국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의 이름과 주소를 빌리도록 하자.
배송 도중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그냥 내가 변장해서 전하는 거로 바꾸고.
그렇게 하면 브라운이 놀러오는 날짜에 딱 맞출 수도 있으니까.
완성된 택배는 방구석에다가 두고 이번엔 다른 통로인 캔버스를 액자에 담는다.
그리고 벽 한가운데에다가 고정시키니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제 할 일은 브라운이 영국 여행 이벤트에 당첨되게 하는 일과 갑옷하고 목각 인형인가.
빠르게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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