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39화 (39/154)

〈 39화 〉 그림

* * *

사서 인형은 있어 봤자 쓸모가 없을 테고.

서재라는 장소도 퍼즐을 넣기에 좋은 장소긴 하지만 그리 넓게 만들 것도 아니고.

하는 일이라곤 책을 정리하거나 제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일 뿐일 텐데 원래 마법사였던 게 책이 꽂혀 있는 위치 하나 기억하지 못하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공격할 때는 책이라도 휘두르나?

그러니까 사서 인형은 탈락.

경호라던가 보안은 갑옷이 책임지고 청소나 다른 잡일은 집사와 메이드 인형이 맡는다.

정원과 주방에서 일 할 인형들도 만들었다.

저택을 더 크게 늘릴 생각이 아니면 여기서 멈춰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인형들을 각각 자리에 배치해 두었다.

정원사 인형은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중앙의 정원에서 일을 하도록 만들고.

주방에 배치된 요리사 인형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프라이팬을 들고 있거나 무언가를 써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도마 위에 놓인 것 없이 칼을 내리치며 무언가를 자르는 시늉을 하거나 텅 빈 프라이팬을 들고 휘적거리는 모습이 누군가 보면 섬뜩해 보이겠다.

불 앞에서 목각 인형이 요리를 하면 위험하겠지만 불을 켜지도 않았고 그런 방법도 모르는 거 같으니 넘기기로 하자.

도마를 칼로 내리치며 탁탁—소리를 내는 인형은 그대로 들고 있는 칼로 공격하면 되겠지만 옆에 요리하는 척하는 인형은 어떻게 할까.

쟤도 똑같이 식칼을 들게 할까, 아니면 다양성을 위해 프라이팬을 들게 할까.

그래, 주구장창 칼 든 녀석만 나오면 돌려쓰기한다고 욕먹는다.

프라이팬 말고도 꼬챙이나 가위같은 것도 들려주자.

이제 이 녀석들은 주방을 지키면서 누군가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들고 있는 도구에 맞는 행동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그럼 지하실에 들어가기 위한 칼 두 자루를 어딘가에 숨겨야 하는데.

이런 거는 중간 보스가 가지고 있어야 제맛이다.

그렇다고 두 자루를 숨기려 중간 보스를 둘이나 만들긴 귀찮으니까 하나는 적당한 곳에다가 보관해야겠다.

차라리 대놓고 있으면 못 알아보지 않을까.

내가 방금 인형을 배치해 둔 정원 같은 곳에 말이다.

나는 곧장 문을 열어 정원으로 향했다.

중앙의 분수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키가 작은 나무의 삐져나온 잔가지를 제거하는 4기의 인형들도 보였다.

중앙에 있는 분수를 지워내고 무엇을 그려낼지 생각한다.

일단 동상같은 걸 만들어야 검을 들려줘도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재질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대리석, 청동, 철 등등 여러 가지 있는데.

동상이 들 게 강철 검이니까 똑같이 철로 만들까.

녹슬고 나면 에메랄드나 비취처럼 녹색을 띄는 청동도 나쁘지 않겠다.

조각상 하면 떠오르는 새하얀 색의 순수한 대리석도 좋다.

대리석하면 역시 그리스 조각상이 떠오르는군.

검을 쓰던 그리스의 영웅은 누가 있더라.

헤라클레스는 칼을 쓴 적이 있겠지만, 맨손이나 몽둥이, 활을 많이 쓰는 이미지가 강하니 패스.

헥토르는 창, 오리온은 활이 유명하고.

메두사의 목을 벤 것으로 유명한 페르세우스는 하르페라는 검을 쓰긴 했지만….

퍼즐 기믹으로 쓰일만한 이야기가 없다.

아르고 호 원정대의 이아손이 좋을까.

들고 있는 검과 황금양털을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황금양털은 어디서 구하도록 해야 하지.

전승을 따지면 양털을 지키고 있는 잠들지 않는 용이 있는 거고, 그런 게 없으면 그냥 유리 장식장에다가 보관하는 거다.

황금양털을 지키던 용은 잠들지 않는 눈을 가졌다는 것에 무색하게 메데이아가 만든 마법약에 잠들어 버렸지.

잠든 용을 지나쳐 검과 거래하기 위한 양털을 가지러 가는 것도 두려운 경험일 거다.

그렇다면 서재에다가 관련된 신화와 약의 제조법을 두면 되겠다.

이아손의 동상은 당연히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들고.

그럼 일단 첫 번째 검은 해결이고 다음은 두 번째 검을 가질 중간 보스인데.

패배의 상징인 쌍검을 든 갑옷으로 할까.

아니면 정원에다가 숨겼으니 주방에?

주방장 인형은 사실 장검으로 요리를 했다던가.

…내가 봐도 이상하니 넘기도록 하고.

그냥 중간 보스따위 만들지 말고 조건을 만족하면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할까.

그렇다면 또 다른 검과 관련된 이야기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북유럽 신화라던지 여러 가지 전설 중에 쓸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흠… 아서 왕 전설의 엑스칼리버?

바위에 박혀 있던 검을 뽑으면 왕이 되리라는 이야기와 호수의 요정에게 받았다는 버전도 있지.

전자가 유명하기도 하고 그림 속 저택엔 호수라고 부를 만한 물가도 없으니 바위나 그릴 준비하자.

정원에는 이미 하나 있으니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데.

1층엔 식당과 주방, 바깥엔 정원, 2층엔 서재와 그림이 숨겨진 방인가.

서재 근처에 마법약을 만들 공방도 추가할 생각이니 1층에다가 두는 게 좋겠다.

그림이 있는 장소는 2층이니 먼저 수색하는 곳도 2층일 터.

그러니 로비 한가운데에다가 둬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찾을 것이다.

검을 뽑는 방법은 전설을 살짝 비틀어서 '오직 왕만이 이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로 하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왕관, 그리고 망토 정도일까.

아서 왕 전설하면 떠오르는 원탁이 있는 방을 만들어서 왕관과 망토를 숨겨야겠다.

하지만 방을 찾는 정도로 검을 쉽게 구한다?

내가 용납하지 못하겠는데.

왠지 이대로 가다간 기껏 인형까지 배치해 둔 주방이 쓸모없어질 거 같으니 그쪽으로 가야만 하도록 만들어야겠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아서 왕 전설에는 기독교의 색체가 많이 스며들었으니 빵과 물고기라도 가져와 달라고 해야 하나.

…그다지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해야겠군.

그럼 퍼즐까지 대충 완성했으니 돌아가 볼까.

***

저택에 돌아온 나는 시계를 바라봤더니 시간이 많이 지나가 있었다.

이브를 깨우고 아침을 먹인 후 주문에 대해서 간단히 교육을 했었는데 어느새 점심을 지나 저녁까지 먹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재빨리 이브의 방으로 향하니 화장실 쪽에서 양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을 먹고 바로 하는 게 아니라면 곧 잠들 시간이라는 건데.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서 이브가 나오길 기다렸다.

금방 물이 흐르는 소리가 멎고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아침과 똑같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나오는 이브는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단다. 아직 잠들 생각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금방 저녁을 먹어가지고 양치했어요. 이빨을 갈아치우는 주문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찍이 관리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배운 것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지금 한 번 시험을 쳐 볼까요?"

"그래."

오늘 아침에 가르쳤던 것은 기초적이기도 하고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이 다음은 독학으로 해도 충분한 부분이다.

주문이란 그 존재만 모를 뿐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기 때문이다.

말 몇 마디만 한다고 손에서 불이 나가고 번개가 나간다니.

기껏 내게 배워갈 수 있는 건 내가 비유했던 것처럼 마력을 배열해서 말없이 주문을 사용하는 정도?

판타지 라이트 노벨에 흔히 나오는 무영창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하윤이도 재능이 넘치는 게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아이는 말하는 게 귀찮다고 마력으로 술식을 짜올리고, 나중엔 그것도 귀찮다며 주먹으로 팼지.

그걸 생각해 보면 육탄전만 가르칠지도 모르겠다.

하윤이도 걔만의 생활이 있는데 강요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

가끔씩 놀러왔을 때 이브가 직접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다른 교육으로 넘어가보자.

"이브야. 너는 공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야 당연히 재미있죠! 낮에 연무장에서 책을 읽다가 찾은 주문을 한 번 실험해 봤는데—"

"주문 공부말고, 일반적인 공부 말이다."

"일반적인 공부라면… 초등학교라던지 그런 곳에서 배우는 거요?"

"그래."

"병원에 있었을 때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지만, 지금 주문을 배우면서 그다지 가야 하는지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학교란 게 가 본 적이 없다면 로망이 있을 법도 하지. 하지만 국어나 수학처럼 기본적인 것은 배워야 나중에 편할 거란다."

"국어는 배우고 싶어요! 주문을 배우다 보니까 마법사처럼 고급스러운 말을 써 보고 싶거든요!"

이브는 빙그르르 돌더니 마치 귀족이 인사하는 것처럼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후후, 신사 분. 에스코트 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내게 뻗어온 앙증맞은 손을 붙잡고는 방 안을 걷다 보니 어느새 춤을 추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브는 무언가를 따라 하려는 듯이 스텝을 밟으며 움직이지만 키 차이가 나기도 하고 춤을 춰 본 적도 없어서 금세 내 발을 밟았다.

"어째서 분위기가 춤을 추는 것으로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나중에 배워야겠구나."

"으…. 음악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변명하는 것도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뭐 아무튼.

이제 밤이니 무엇을 해야 할까.

TV같은 건 들여 오지 않아서 이브에게 주어진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세 가지 중 하나뿐일 거다.

침대 옆 서랍에 내가 준 마도서가 놓여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공부를 하려던 모양이지.

이브가 잠들기 전까지는 최대한 옆에 있어 주기로 했으니 공부하는 거나 조금씩 조언해 주면서 시간이나 보낼까.

나는 의자를 침대 근처로 끌고 와 반쯤 누워서 마도서를 읽는 이브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가끔씩 던져지는 질문에 대답해주며 계속 옆에 있을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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