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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40화 (40/154)

〈 40화 〉 그림

* * *

내가 준 마도서에 적혀 있는 주문들을 보면서 공부하는 이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연무장에 가서 직접 사용해 보지는 못 하지만 옆에 있는 내게 주문의 효과는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하는지 질문하며 내일 사용해 볼 주문들을 추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눈을 비비면서 하품을 하는 게 졸려 보인다.

마도서를 서랍에다가 집어넣고는 램프를 켜고 불을 끄려 방문 옆에 있는 스위치 쪽으로 가려 하길래 간단하게 주문으로 대신 꺼주었다.

"내일 연습할 주문에 염동력 같은 걸 넣어야겠어요. 그럼 이런 귀찮은 일도 간단히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방금 사용한 것은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주문의 위력을 아주 약하게 한 것인데.

어찌 보면 이것도 염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구의 마법사들이 개발한 주문 중에도 비슷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

저번에 마주쳤던 사제들만 봐도 단순하지만 내가 본 적 없는 주문을 사용했었고.

내가 괴력난신을 퍼뜨려서 일어난 일인 걸까.

아니면 너무나 단순해 빠져서 마도서에 적히지 않은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위력은 강력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주문에 드는 마력을 생각해 보면 더 강력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을 거다.

순수한 마력 덩어리를 발사하면서 그것이 흩어지지 않도록 간단한 조치만 했을 뿐.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던 이가 사용한 '마지막 심판'이라는 오글거리는 이름의 주문은 좀 더 보강하긴 했지만 솔직히 마력 낭비라고 볼 만하다.

신을 믿지 않는 마법사와 타협할 수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제의 마력은 특별해서 날 것 그대로 쓰는 건지.

지구를 관찰할 때 마법사들만 봐서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하다.

그건 나중에 하나를 납치해서 실험해 보는 걸로 하고.

지금은 이브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켜 주며 기다리자.

인형을 껴안은 채로 내 손을 잡고 있다가 점점 눈이 감기는 걸 보고 나는 빈손으로 램프의 줄을 당겨서 불을 껐다.

이윽고 눈이 완전히 감긴 걸 확인하고 숨소리도 들어 보니 규칙적인 게 잠든 게 확실하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빛이라도 새어 들어올까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서 나왔다.

낮 동안에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림을 전부 완성했으니 브라운이 영국에 갈 때만 기다리면 끝이다.

그럼 지금 항공사 이벤트는 얼마나 진행됐는지 확인할까.

설마 엉뚱하게 다른 나라로 여행지를 바꿨다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지구를 슬쩍 바라보니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벤트에 응모할 수 있도록 여행을 보내는 기간이 성수기로 정해져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아직 잡지가 인쇄되지도 않았지만 지금 표지를 디자인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컴퓨터 화면을 보니 누구나 한 번쯤은 시선이 갈 만하게 만들었다.

그럼 이제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은 건가.

그동안은 이브나 가르치면서 가끔씩 그림 속도 정비하고 지내야겠다.

***

이브에게 주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친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오늘은 아마도 잡지가 발간되는 날 일 거다.

오늘도 여느 때와 똑같이 이브의 곁을 지켜 주다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와 지구를 살펴봤다.

주로 서점을 살펴보니 몇십권씩 쌓여 있는 잡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벤트에 응모하려고 서점에서 읽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일까.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게 자연이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사람들의 손에 들려서 나가는 잡지의 소식은 입소문을 거치고 거쳐서 이윽고 브라운에게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브라운의 친구처럼 보이는 녀석이 친구 좋은 게 뭐냐면서 함께 응모하자고 잡지를 보여주는 게 사실상 그냥 인터넷으로 방법을 알아내면 끝인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응모는 잡지 하나당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

브라운은 마치 생각하는 사람 동상처럼 한 손으로 턱을 쥐고는 잡지 한 권의 가격과 미국에서 런던까지 왕복하는 값을 저울질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응모자도 많을 테니 확률은 작겠지만 응모를 안 하는 것보단 실낱 같은 확률에 기대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겠지.

아직 수업이 남은 건지 바로 서점으로 직행하지 않고 대학교 건물로 들어가는 그.

그런데 관광을 가서 존에게 찾아갈까.

날짜는 2박3일로 충분해 보이긴 하지만.

잡지에는 딱히 여행 가이드나 다른 것들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으니 존에게 런던이나 소개시켜 달라고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브라운이 잡지를 사서 응모하는 것까지만 보고 그림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점검을 하자.

딱히 공부하는 걸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시간이나 죽일만한 일거리가 없을까.

한국은 지금 밤일 테니 하윤이네로 놀러가서 관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술식을 새겨줄 수도 없고.

이브도 방금 잠들었고.

에반과 제임스는 나를 많이 어려워해서 저택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고.

그래도 그림 속으로 들어갈 예정인데 한 번쯤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나타나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말하고는 강제로 넣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제임스 같은 경우는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데 저번 시나리오로 정의감은 더 강해진 거 같아서 따로 말은 못 할 거 같고.

브라운이 이전에 자신을 쫓던 에반을 믿을 수 있을지가 문제인데.

저번에 내가 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알아서 말해 줬겠지.

기어다니는 것을 상대하려면 에반의 존재는 필수일 테니까.

하지만 탈출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중간에 어떤 일이 없다면 셋 모두 복도의 그림을 통해 존의 사무실로 탈출할 테니까.

중간에 가로채서 납치하거나 사무실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것도 좋겠다.

전자는 그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후자는 존에게 나의 인상을 더욱 각인시키겠지.

일단 에반에게 찾아가보자.

***

다행히 에반은 잠들지 않고 내가 준 실패작을 읽으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으로 정신을 부지하는 방향으로 잡은 거 같은데 내 감상은 굳이 쓸모없는 일을 하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은 광기에 사로잡혀야 주문을 더 잘 쓴다는 매력이 있는데 말이지.

차라리 주문을 사용하지 않고도 광기를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잡는 게 더 좋아 보인다.

마치 항상 화가 나 있는 초록색 덩치처럼 말이다.

나는 몰두해 있는 녀석에게 눈치를 좀 채라고 헛기침을 하면서 기척을 냈다.

"크흠!"

"우왓!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서는 척을 떨어트리고 뒤를 돌아보는 게 헛웃음이 나온다.

공부하는 모습이 좋은 학생이긴 하지만.

"내가 방해한 게 아닌가 싶군. 꼭 말해야 할게 있어어 말이야."

"괜찮습니다. 저도 곧 잘 생각이었고요."

"흐음, 그런가?"

방금 전까지 집중하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말이야.

나를 무안하지 않게 하려고 배려하는 거겠지.

"아무튼 자네가 활약할 곳이 정해졌다네."

"저번의 두 사람을 쫓던 것처럼요?"

"비슷하지만 다르지. 이번의 자네는 제정신으로 다닐 테니까."

나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서는 문을 나섰다.

내 뒤로 따라오는 에반의 기척을 느끼며 이제는 어느 정도 화실처럼 느껴지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할 일이 없을 때 그린 그림들이 벽이나 이젤에 걸려 있었고 중앙의 캔버스는 아직 미완성된 상태로 천으로 덮여 있었다.

"오…. 여긴 화실인가 보네요. 그런데 왜 이곳으로…?"

"일단 여기 앞에 서 보게나."

나는 벽 중앙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그림 옆에 서서 손으로 가리켰다.

에반은 어리둥절해 하며 그림 앞에 섰고 나는 그대로 그를 밀쳤다.

"우와악!"

그대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넘어진 그를 따라 나도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밀칠 때 액자에 발이 걸린 모양이다.

"아이고 머리야. 어, 어라?"

"그림 속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거 진짜예요? 사실 벽에 구멍을 뚫어 놓고 액자로 그림인 척했다던가 그런 거 아니예요?"

"진짜일세. 믿기지 않는다면 나중에 벽에서 액자를 떼어내서 증명하도록 해주마."

나는 문을 열어서 새빨간 복도로 나왔다.

에반도 같이 나오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이 그림 속 세상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림 속 세상이면 파스텔 톤의 그런 세상을 떠올리는 건가?"

"아뇨. 그림이란 게 기법이 다양하니까 이런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도 있겠죠."

"나중엔 파스텔로도 한 번 그려보도록 하지."

나는 복도를 거닐며 에반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반은 대화를 지나가면서 장식되어 있는 갑옷을 탕탕—치고는 세심하게 살펴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음? 저기 미완성된 느낌의 구체관절인형은 뭔가요?"

"말 그대로 인형이지. 꼭두각시같은 느낌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떤가."

"꼭두각시라기엔 실이 없는데요."

"자네는 주문을 배웠는데도 그런 말을 꺼내나. 독학해서 그런 건가?"

"저도 당연히 주문을 새긴 거라고 생각은 했죠. 꼭두각시보단 오토마톤을 더 닮아서 그랬어요."

이런 이야기나 하며 복도를 걸으니 어느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도착했다.

"근데 저기 로비 중앙의 칼은 도대체 뭔가요."

"그건 나중에 알아내야지."

"여기 계단을 막고 있는 갑옷들은 또 뭐고요."

"그것도 마찬가지 일세. 아무튼 자네에게 미리 경험을 시켜준 거니 나중에 잘 활용하라고."

보여 준 거라고는 복도와 정원의 인형들, 로비 중앙의 칼, 그리고 지하실을 가로막는 갑옷 뿐이지만 이 정도면 많은 힌트라고 생각한다.

정원을 봤으면 동상도 봤을 테니까.

"아무튼 이제 돌아가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는 그림을 통과하니 다시 화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액자를 떼어내서는 이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허어. 그래서 제가 이곳에서 일 할 예정이라고요?"

"그래.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 너는 수련이나 열심히 하라고.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에반의 이마에다가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주문을 새겼다.

"이건 뭐죠?"

"제약이다. 그림 속에서 만날 사람이 있을 텐데 모든 것을 말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머리가 아파오지. 서유기를 읽어 봤나? 거기에 나오는 손오공에게 씌워진 긴고아와 비슷하다고 보면 편하네."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어떻게 화실에 왔으니 그림이나 마저 그리기 위해서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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