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42화 (42/154)

〈 42화 〉 그림 속 세상

* * *

"이봐 에반!"

"예?"

나는 화실에서 내쫓겨 다시 방으로 돌아간 에반을 찾아갔다.

이번엔 램프만 켜두고 마도서가 아닌 다른 책을 읽으면서 침대에 반 정도 누워 있는 게 금방 자려고 했던 거 같다.

"벌써 자려고 하는 건가?"

"아니, 뭐. 새벽이니까요."

"그럼 빨리 자거라."

"예? 으엌."

귀찮게 말로 하기보단 주문을 사용해 재워 버린 다음에 마도서와 함께 들어서 다시 화실로 돌아갔다.

브라운은 지금… 침실에서 일기장을 읽고 있군.

그럼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귀찮게 비가시화 주문은 사용하지 말고 바로 서재로 가자.

나는 그림을 통과해 문을 열고 붉은 복도를 조용히 걸어 서재까지 도착했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인 책상에다가 마도서를 올려놓고 의자를 당겨서 에반을 앉혔다.

그리고 약간의 배려로 엎드릴 곳의 먼지를 치워주고는 팔을 책상에 올리고는 그 팔에 머리를 눕혀줬다.

나중에 브라운이 찾아온다면 알아서 깨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벽에 붙어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마치 나를 봐달라는 듯이 반짝이는 책 제목이 보인다.

게임 속에서 아이템이 반짝이 듯이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책 겉표지에다가 빛을 받으면 반짝일 수 있도록 했다.

지금 브라운이 그림으로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돌아다니는 갑옷은 없고.

지하로 내려가서 존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겠다.

나는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실로 가는 계단으로 향하다가 위쪽에서 끼익—하고 녹슨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일기장을 전부 읽은 브라운이나 먼지때문에 잠에서 깬 에반 둘 중 하나겠지.

내가 주문을 잘못 조절해서 생각보다 약하게 들어간 게 아니라면 전자일 것이다.

아무튼 아직까지 2층을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예정대로 지하실로 가자.

주의가 분산되도록 메이드 인형도 하나 보내고.

눈앞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인형에게 2층으로 올라가라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길을 갔다.

어느새 듬직하게 계단을 막고 있는 두 갑옷이 보였고, 비키라고 손짓하자 빠릿빠릿 움직이면서 양옆으로 섰다.

저택이 붉은색으로 가득하다면 지하는 회색으로 가득 찼다고 비유해야 할까.

칙칙한 회색의 벽돌로 쌓인 벽에는 촛불도 아니고 횃불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나무는 회색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곳으로는 집사나 메이드 인형이 오지 않도록 설정해 두어서 바닥에 떨어진 잿더미가 보였다.

그런 잿더미를 신경 쓰지 않고 다닌 기어다니는 것 덕분에 틈새에도 재가 들어가서 어찌 보면 바닥이 일체형으로도 보인다.

'에휴, 내가 사는 집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쓰잘데기 없는 건 신경 쓰지 말고 감옥이나 들어가 보자.

방금 2층에서 들린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녹슨 경첩이 끼익—하며 소리를 냈다.

분위기상으로는 어울리지만 너무나도 신경 쓰여서 나중에 기름칠이라도 한번 해야 하나 생각을 하던 와중 양손이 두꺼운 수갑에 채워진 채로 감옥에 갖힌 존이 보인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잠들어 있는 게 아직 주문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거나 강한 충격—예를 들어 뺨을 맞는다 던가—을 받는다면 일어날 거다.

여긴 신경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자.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보려고 낑낑대는 기어다니는 것이 있었다.

내가 문을 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더니 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지 금세 포기하고 뻗었던 손을 내렸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나 위협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책상 위에 있는 약물에도 손이 닿지 않아서 이러는 걸 보면 나중에 녀석들이 찾아왔을 때 어쩌려고.

어차피 존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여기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상관없다.

나중에 에반과 브라운이 찾아온다면 그때 추격을 하는 게 이 녀석의 역할이다.

누가 굳이 여길 찾아올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감옥의 위치를 몰라서 여길 먼저 들어오거나 나중에 감옥과 수갑 열쇠를 찾으러 올 수밖에 없을 거다.

그때의 추격전을 위해 반대편 방은 숨기 편한 장소로 만들어 두었다.

하나는 예전에 보았던 창고이고 또 하나는 시체와 뼈들이 반 정도 차 있는 방이다.

예전에 실험을 당하고 죽은 시체들이라는 게 설정이지만 사실은 그저 인위적으로 만든 영혼도 없는 육신이다.

그런 육신을 눈이 튀어나오게 한다던가 칠공분혈을 하도록 만든다던가 해서 여기에 대충 던져두니 인상적인 방으로 탈바꿈했다.

저기 고깃덩이 사이로 숨는다면 기어다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겠지.

지하실은 이 정도만 살펴보고 나오도록 하자.

다시 한번 기어다니는 것에게 방에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쫓도록 당부를 하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몰래 구경이나 할까 싶어서 비가시화 주문을 사용해 로비로 나오니 중앙엔 아직 뽑히지 않은 검이 있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도 보이지 않으니 아직 2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생각하다가 위층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서재에서 에반과 만나 소리친 거 같은데.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겠어.'

나는 예정보다 더 빠르게 갑옷 하나를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철크덕—하고 철과 철이 겹치면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갑옷들을 점점 풀어 주면 되겠지.

갑옷이 복도를 걷는 소리에 서재에서 들리던 소리도 멈추었다.

브라운도 심상치 않았음을 느낀 거겠지.

에반은 자려고 하는데 내가 갑자기 들어온 것만 보고 기절했다가 일어나니 이상한 서재라서 정신이 없을 거고.

'흠.'

생각해 보면 갑옷들이 풀려나는 게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거 같기도 하다.

한 시간보다는 삼십 분 정도면 더욱 촉박하겠지.

그리고 감시를 하는데 이렇게 비가시화 주문을 사용하는 것도 들키기 쉬울 거고.

이런 상황을 상정한 것은 아니지만 두 번째 화신체인 역병의사를 오랜만에 꺼내야 할 거 같다.

녀석들이 내려올 때까지 예전에 생각했던 두 번째의 부족한 전투력을 메꿀 지팡이의 강화나 해야지.

나는 검은색의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에 새길 주문을 생각하면서 잠시 고민을 했다.

***

주문을 전부 새기니 위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대화도 나누고 단서도 찾은 다음에 나왔다가 갑옷을 만나서 무력화시킨 거 같은데.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살펴본다.

손잡이 부근에 동그랗게 새겨진 부패와 출혈, 보호 주문.

역병의사를 만나는 사람은 두 종류이고 그중 성가신 것은 어느 경지에 든 사제 정도다.

마법사는 지명 수배된 사람이 아니면 왠만해서 차별하지는 않고 흑마법사도 자기들 영역만 건들지 않으면 괜찮다.

하지만 사제들은 내가 무슨 베엘제붑인지 벨제부브인지 그런 악마랑 착각을 해서 만나면 귀찮게 한다.

물론 생김새가 벌레들을 뭉쳐둔 거긴 하지만 파리의 대왕같은 이미지는 아닌데.

그런 사제들은 일대일이라면 간단하게 잡지만 일대다수라면 피곤해진다.

저번에 일찍 도착하지 못했다면 강력한 주문에 휩쓸려서 패배했겠지.

그런 상황을 대비한 주문들이다.

가끔씩은 별종도 만날 수 있으니 지팡이를 쿼터스태프처럼 이용해 봉술을 쓰기 위해 강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흑단나무 자체도 일반적인 나무보다 단단한 아이언우드지만 주문으로 더욱 강화된 지팡이는 톱으로 썰으려고 해도 오히려 그 톱의 날이 상할 거다.

그럼 이제 여기서 구경하는 것은 역병의사가,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것은 첫 번째 화신체인 이쪽이 하는 것으로 하자.

'에반이 나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본다고 해도 제약이 있으니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손 위에 있던 작은 벌레들이 점점 증식하며 커져가는걸 구경했다.

벌레들이 사람 형상을 취하고 그 위를 정장과 구두, 망토, 그리고 까마귀같은 가면과 모자가 덮는다.

나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넘겨 주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음, 왜 이리 불쌍하게 넘어져 있냐….'

갑옷의 가슴팍에 검은 자국이 남은 채로 쓰러져 있는 갑옷이 있었다.

방금 들었던 천둥 소리의 흔적이겠지.

자가 수복 기능도 있어서 곧 있으면 일어나겠지만 타이밍이 어중간하다면 일어나다가 복도를 다니던 에반과 브라운에게 다시 얻어맞아서 넘어질 게 분명하다.

그 녀석들은 다른 방에 단서를 찾으러 간 건지 근처의 방에서 소리가 들리거나 그러진 않는다.

아니면 다른 통로를 확인하려고 갔을까.

어차피 나는 복도에 있는 그림을 통해 사무실로 갈 예정이니 상관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갑옷을 복구해주며 일으키고는 복도를 걸었다.

그러니 허탕친 듯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는 그들이 보였다.

정말로 확인하러 간 모양인데.

'뭐, 지금은 실망하기보단 다가오는 갑옷을 경계할 시간이 아닐까.'

내 뒤를 흘긋 쳐다보니 철컥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갑옷이 있었다.

정확히는 에반과 브라운을 노리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가운데에 있어 봤자 에반이 날리는 주문에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무시하고 그림으로 가자.

그렇게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붉은 복도를 걷다 보니 어느새 벽에 기대어 있는 액자가 있었다.

기어다니는 것이 존을 잡아당기기 편하도록 해 둔 조치니까 이제 다시 벽에 걸어도 상관없겠지.

탈출할 때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높이를 못 올라갈 정도로 키가 작은 인원도 없으니까.

나는 그림을 벽에다 걸어두고는 잠시 활성화시켜서 사무실로 넘어갔다.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액자도 주문으로 벽에 고정시켜두고는 다시 비활성화시켰다.

이제 탈출할 때까지는 역병의사로 관찰하면 되겠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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