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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43화 (43/154)

〈 43화 〉 그림 속 세상

* * *

그러고 보니 방금 서재를 나왔는데 책은 전부 읽은 걸까.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새겨진 주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나 확인하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중에 정원에 나가거나 원탁에 도달했을 때 알 수 있겠지.

로비 중앙으로 가 검이 단단히 꽂혀 있나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계단을 올라갔다.

서재와 침실을 제외하면 2층에서 그들이 갈 만한 곳은 약품 조제실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약품 조제실로 향하는 길에 방금 봤던 거 같이 만신창이로 쓰러진 갑옷이 보였다.

내가 방금 사무실로 나갈 때 일으켜 준 그 녀석인데 역시나 주문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진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나중에 점점 더 늘어나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덤빈다면 에반도 주문을 사용할 생각도 못 하고 도망가겠지.

지팡이로 갑옷을 툭 쳐보고는 다시 내 갈 길을 갔다.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한 나는 장갑과 정장 사이의 손목 부근에서 날벌레를 하나 꺼내서 검지손가락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열쇠구멍으로 넣어서 정찰을 시켜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안을 살펴보니 갈색 병을 든 브라운과 마치 금속이 찰랑거리는 듯한 투명한 병을 든 에반이 보였다.

수은하고 갈색 병은 아마도 산성 용액이겠지.

'갈색 병을 든 브라운? 브라운과 브라운… 재미없군.'

이런 개그를 듣는다면 누구나 광기에 빠지지 않을까.

녀석들을 관찰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들의 손에는 병이 아니라 책이 들려 있었다.

저 책에는 용 조차도 재우는 수면제, 한 방울이면 수천 명은 죽이는 독극물, 마시면 우주를 멀쩡히 다닐 수 있는 벌꿀술 등 여러 가지의 제조법이 적혀 있다.

쟤네들이 만들어야 하는 건 첫 번째 약물이지만 아직 정원으로 간 적도 없는데 알아차릴 리가 없겠지.

직감으로 때려 맞출 수는 있겠지만 여기가 아무리 그림 속 세상이라고 게임처럼 편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다.

방을 나갔다 다시 들어가도 화학 물질이 다시 채워져 있다 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시나리오에는 없지만 가구를 특정 위치로 옮기는 기믹같은 경우도 똑같이 해 봤자 변하는 건 없다.

'애초에 그건 게임이라서 벽에 붙으면 옮기지 못하지만 여긴 현실적이니까 들어서 옮길 수가 있겠네.'

책과 화학 물질이 담긴 병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 생각을 하던 에반은 책을 덮고는 문으로 다가왔다.

나는 잠시 뒤로 물러서며 저들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열리라는 문은 안 열리고 안에서 소리만 들렸다.

'이건 브라운 목소리 같은데….'

화해도 하고 이제는 같이 다니는데 무슨 단서라도 찾았으면 말 좀 해 달라는 느낌으로 소리치는 게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에반은 그 단서를 찾기 위해 나가려고 했다면서 대답하는데 이렇게 시끄럽게 대화하면 그게 등장해야겠지.

그러면서 옆을 보자 철컥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갑옷이 보인다.

'슬슬 30분이 지나지 않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며 갑옷을 쳐다보니 내 뒤에 서 있던 갑옷이 저기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움직이는 거라 그런지 관절 부분이 약간 삐걱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이동하니 점점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윽고 그 갑옷이 나를 지나쳐 약물 조제실의 문을 열자 섬광이 일었고, 갑옷은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일반적인 갑옷이라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서 투구와 갑옷, 건틀릿 등으로 흩어져서 바닥에 떨어졌겠지만 내가 걸어 둔 주문 덕에 안에 사람이라도 든 것처럼 계속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방에 쓰러질 거라면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지 말고 방패라도 들려줄 걸 그랬나 생각하며 다른 갑옷이 에반과 브라운 일행을 공격하는 걸 구경했고, 마도서로 공격을 막으면서 주문을 외우는 에반과 그걸 응원하는 브라운이 있었다.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어서 저런 칼도 막을 정도로 튼튼하긴 하지만 정말 저렇게 사용할 줄이야.

에반은 피할 수 있는 공격은 피하고 그렇지 못한 공격은 마도서로 막아 내면서 점점 주문을 빠르게 외우다가 뒤로 크게 물러나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서 번개 같은 게 나가진 않았지만 갑옷은 허공에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에 붙잡힌 거지만.

에반이 힘을 주며 손을 쥐자 갑옷이 조금씩 우그러졌고, 팔을 옆으로 휘두르니 똑같이 날아가서 벽에 부딪혔다.

이걸로 세 번째 무력화인가.

그나저나 요그소토스의 주먹 주문을 저렇게나 잘 사용하다니.

그동안 책만 읽은 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저 정도 위력의 주문을 사용했다면….

"으윽!"

에반이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고통에 찬 소리를 냈다.

'역시나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군.'

스멀스멀 정신을 잠식해가며 어떤 충동을 일으키는 속삭임이 들리겠지.

그것이 파괴 충동이라면 옆에 있는 브라운이 무사하지 못할 거고.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여기서 시간을 허비한다면 저기 쓰러져 있는 갑옷이 일어나서 덤벼들고 다시 주문을 사용하는 악순환이 지속될 것이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있으면서 에반은 광기를 잠재워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지팡이로 탁탁—하고 바닥을 쳐 대며 일행을 쳐다보니 브라운이 에반에게 다가가 한쪽 팔을 잡아주고는 어깨동무를 해서 부축해 주고 있었다.

저대로 여기서 나가 서재던 침실이던 빨리 도망갈 생각인가 보다.

나는 문밖으로 나가서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두 사람의 인영을 보다가 난장판이 된 방을 수습했다.

갑옷이 우그러진 흔적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펴질 테니 신경 끄고, 움푹 패여서 벽지 안쪽의 나무까지 드러난 벽을 쳐다봤다.

나중에는 자가 수복 기능이나 아예 파손이 안 되도록 만들어야겠다 생각하며 붓으로 벽지를 새로 칠했다.

바닥에 튄 나무 조각들도 없애고 부러진 나무 벽도 다시 원상태로 복구한 후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듯이 붓을 움직인다.

그리고 붉은색에서 은색으로 바꾸고 문양을 그리려다가 방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꿔 버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시간도 많이 걸릴 테니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에반과 브라운이 열어두고 간 문을 지나 복도로 나와서 그들이 간 방향을 쳐다봤다.

'저쪽이면 서재로 간 모양이군.'

서재를 향해 복도를 걸으며 이러면 언제 1층에 갈까 가늠해 보다가 익숙한 문 앞에 도착했다.

점프 스케어처럼 무작정 문을 열어제낄 작정이 아니니 방금 약품 조제실 문 앞에서 했던 것처럼 벌레 한 마리를 열쇠 구명으로 들여 보내서 관찰을 했다.

의자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에반과 그런 그를 걱정하며 우왕좌왕 정신 사납게 주변을 걸어 다니는 브라운이었다.

마구 돌아다니다가 책장으로 한 번 시선을 돌리더니 드디어 내가 배치해 둔 책을 발견한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눈에 띄도록 만들었는데 못 보면 사람이 아니지.'

브라운은 책을 뽑아 제목과 겉표지를 보더니 다른 책장도 살펴봤다.

그러고는 그가 뽑은 책과 같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책등의 제목을 확인하며 책을 꺼낸다.

내가 금고라던지 비밀번호나 암호가 필요한 기믹은 넣지 않았지만 아직 1층도 안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머릿속은 복잡할 따름일 터다.

그렇게 에반이 정신을 추스를 때까지 책에 무언가 있는지 읽어 보던 브라운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브라운.

어느새 방의 풍경이 바뀐 걸 눈치채고 감사를 표하는 에반.

분위기는 훈훈하게 흘러가는 거 같지만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거의 30분이 다 되어 간다.

아까 쓰러뜨렸던 갑옷들도 이미 전부 수복되어서 정찰 중일 테고.

이 녀석들도 방금 경험으로 소리를 내면 갑옷들이 쫓아온다는 것을 알았을 터.

귀도 없을 갑옷이 어떻게 소리를 듣고 쫓아오느냐는 지들끼리 알아서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다음 행보를 지켜 보자.

정신 차린 에반에게 책을 보여주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도중 또다시 철컥하고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에반과 브라운도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숨까지 죽여가며 귀를 기울여 발소리에 집중한다.

나를 스쳐 지나가 복도를 그대로 걸어가며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에 안심하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 게 보였다.

이럴 때 장난으로 조종해서 갑옷이 서재로 뛰어오는 소리를 낸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으니까 하는 건 상황을 보면서 노려보자.'

철컥거리는 발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멀어지니 서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반의 목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다니는 갑옷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는 추리를 하는 게 내가 옆에 있었다면 '정답이다!' 라고 외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브라운은 어떻게든 부정해 보며 희망 회로를 돌려보려 했지만 회로가 불타기는커녕 싸늘하게 얼어붙을 상황이니 수긍하게 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브라운에게 에반은 이럴 시간이 아니라며 빨리 1층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참내!'

1층엔 아직 돌아다니는 갑옷이 없긴 하지만 다른 인형들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메이드와 집사 인형은 비선공에 다른 인형들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갑옷보다 성가실 지도 모른다.

그동안 에반이 사용해 온 주문은 광역으로 공격하는 게 아닌 단일 공격이니까.

요그소토스의 주먹이라면 지속 시간을 늘려 어찌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정신력도 어마어마하게 소모할 테니까.

아군인 브라운까지 공격하게 될 터.

에반.

너는 과연 어떻게,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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