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그림 속 세상
* * *
갑옷을 경계해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는 둘을 따라 같이 내려간다.
계단을 전부 내려오니 브라운의 시선이 앞으로 향한다.
나와 에반도 똑같이 그쪽을 바라보니 로비 중앙에 꽂혀 있는 검이 있었다.
"저건 뭘까요?"
"검이지."
"저도 눈은 제대로 달려 있거든요?"
서로 티격태격대면서 조심스레 검으로 다가가더니 에반이 먼저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힘을 주지만 검은 바위에 꽂힌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브라운이 생각보다 힘이 약하다면서 자신만만하게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에반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위로해주며 이런 검을 어디서 본 거 같지 않냐는 말을 꺼낸다.
서로 곰곰이 생각하던 그들은 위에서 들려오는 철갑의 발소리에 갑옷이 들고 다니는 검과 여기 박혀 있는 검이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 같다.
여기에 그 검이 왜 여기에 박혀 있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읽었던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인지 이 검이 그 책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인지 다른 방을 찾아 떠났다.
에반은 나와 저택을 약간 탐방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하실이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거 같았다.
'내가 보여줬던 곳 중에서 가장 수상해 보이는 곳이니까.'
혹시나 1층에도 갑옷이 있을까 싶은지 발소리를 최대한 적게 내면서 갑옷이 가로막고 있는 그곳으로 갔다.
금방 도착한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서로 갑옷을 하나씩 맡아서 옆으로 밀어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도 밀리지 않던 갑옷이 성인 남성 혼자서 힘껏 민다고 해도 움직여질리가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목에 핏줄이 올라올 때까지 밀던 둘은 결국 주저앉으며 숨을 내쉬었다.
"허억, 후우. 바닥에 고정이라도 한 건가."
"여기가 존이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면서요."
"내가 본 곳은 여기까지고 가장 수상하니까 온 거다. …응?"
"왜 그래요?"
"아니 잠깐…."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에반은 갑옷의 어깨 부분을 짚고 일어나서 자신이 느꼈던 이상한 점을 살펴봤다.
2층의 복도에 서 있던 갑옷들과 다른 한 가지.
"이 갑옷들, 검을 가지고 있지 않잖아?"
"그게 어째서요?"
"그리고 로비에는 검 한 자루가 바위에 박혀 있었지."
"그럼 설마?!"
"쉬잇!"
에반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아까 그 갑옷들이 왜 쫓아왔는지 잊었어? 시끄럽게 했다가 위에 있는 것들이 이리로 내려오면 어쩌려고."
"미안해요. 그럼 그 검은 어떻게 뽑아야 할까요?"
"어딘가에 단서가 있겠지."
에반은 브라운을 일으켜 세워주고 단서를 찾아 1층을 돌아다녔다.
구멍이 뚫려 있는 문의 안쪽을 쳐다보다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쳐서 잠깐이지만 패닉에 빠지기도하고,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서 시간만 허비하며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방의 문을 열자 커다란 원탁과 그것을 둘러싼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자들이 눈에 보였다.
그림자들은 전쟁이니 뭐니 대화를 하면서 무슨 회의를 하고 있었고 에반 일행은 혹여나 들키지는 않았을까 숨어서 몰래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기둥 뒤에 숨어 이야기를 듣던 브라운은 그림자들을 슬쩍 훔쳐보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하다.
로비 중앙에 있던 바위에 박힌 검,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그림자들, 다른 그림자와 다르게 왕관을 쓰고 붉은 망토를 걸친 왕처럼 보이는 그림자까지.
브라운은 서재에 있던 아서 왕 전설을 얘기하며 여기서 무언가를 해야 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에반에게 말했다.
에반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더니 기둥 뒤에서 나와 원탁으로 가려고 했다.
브라운은 미친 거냐며 만류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에반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같이 원탁으로 향했고 그들이 당도하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왕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말을 걸었다.
"북쪽의 야만인들을 정벌해야 하는데 물자가 없어서 문제로군…. 흠? 심부름꾼이 찾아왔구나."
"저 그림자가 저희를 심부름꾼 취급하는데요?"
"일단 조용히 듣기나 하지."
자기도 모르게 불만이 튀어나온 건지 에반이 뭐라고 하자 입을 다물고 그림자의 말을 계속 들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을 위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예."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거라."
그 말을 들은 둘은 어떤 기적이 떠오른 건지 서로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돌아서 문을 나갔다.
혹여나 문 너머로 들리지 않을까 멀찍이 떨어져서 소근소근 대화하는 게 내가 너무나 듣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슬쩍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니 식당이나 주방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문만 열면 다른 검이 있지만 관찰력이 부족해서인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어느새 주방을 찾아 이동하는 에반과 브라운을 따라 로비를 걸으면서 위층의 발소리에 집중했다.
철컥거리는 소리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순찰하고 있는 갑옷이 벌써 4개로 늘어나 있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가볍게 무시하고 따라가다 보니 식당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에반이 보였다.
브라운은 엉뚱하게 식탁 밑을 찾아보며 무언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서빙 카트를 끌고 다니거나 청소를 하는 인형도 있었지만 어차피 공격하지 않으니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나중에 활약할 구석이 있을 테니 지금은 참고 넘어가고.
식당을 수색해 보지만 건진 것 하나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에반 일행을 따라갔다.
주방은 문 같은 게 없는 구조라서 벽에 붙어서 잠시 귀를 기울여가며 살펴보는 에반은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쟤네들처럼 숨지 않고 당당하게 통로에 서서 주방을 구경했는데 예전에 만들 때는 만족스러웠지만 지금 보니까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저기 식칼로 도마를 내리치는 인형에게 시체를 가져다준다 거나 고어함을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에반과 브라운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보고 있었다.
벽 하나를 두고 몰래 살펴보던 에반이 식당에서 챙겨 온 거 같은 은촛대를 던져서 반응을 확인한다.
던져진 은촛대가 바닥과 부딪치면서 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에 인형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지만 금세 관심을 버리고 자기 업무로 돌아갔다.
에반은 갑옷들과 마찬가지로 소리만 내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말하며 브라운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입을 하듯이 허리를 숙여 주방 가운데에 있는 작업대 뒤로 숨어서 인형들에 시선에—얼굴 자체가 없긴 하지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였다.
조심조심 움직이던 브라운은 허벅지가 슬슬 저리는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를 악물고는 참아냈다.
'확실히 저 자세로 오래 있으면 허벅지도 그렇게 종아리도 아프겠네.'
무슨 암살자처럼 소리 하나 없이 식품 창고까지 도착한 그들은 문을 슬쩍 열어 빠르게 들어갔다.
그런데 에반은 어떻게 주방 옆에 식품 창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내 저택에서 지내면서 주방에 여러 번 들락날락 한 건지도 모르겠다.
창고를 뒤져가며 빵과 물고기를 찾던 그들은 비린내가 나는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어떻게 물고기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빵을 찾아 보려고 해도 밀가루나 버터만 보일 뿐 완제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중에 빵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있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니 브라운의 입이 열렸다.
"혹시 빵 만드는 법 알아요?"
"아니, 너는 아냐."
"영상으로 몇 번 보긴 했는데, 그걸 따라 하는 건 다른 차원이죠."
—착!
에반이 이마를 치면서 한탄을 하는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인다.
나도 여기에 제빵 드라마를 보러 온 것은 아니니까 조금만 편의를 봐 주도록 해야겠다.
쌓여 있는 상자 사이에 빵이 담겨져 있는 봉투를 숨겨두고 잠시 기다렸다.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듯이 상자들을 뒤지던 에반은 숨겨져 있는 봉투를 찾았고 귀찮게 주방에 있는 인형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창고에 가까이 있는 인형이 인기척을 느낀 걸까.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그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문이 반쯤 열려서 인형의 머리가 들어오자 브라운이 옆에 있던 나무 상자를 들어서 내리쳤다.
와장창—하고 상자가 깨지면서 인형의 머리도 함께 했고, 에반은 봉투와 물고기를 챙겨서는 발로 문을 걷어차서 나왔다.
그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식칼을 한끗 차이로 피하고는 양손을 쓸 수가 없어 발로 인형을 밀어내고는 주방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뒤따라 나오는 브라운도 일어나려는 인형을 다시 걷어차 눕혀 버리고는 에반을 따라가다가 작업대 건너편에서 던져진 꼬챙이를 맞을 뻔했다.
하마터면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던 것에 식겁해 하던 것도 잠시.
벽에 꽃혀 있는 꼬챙이를 빼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형들을 견제하며 나아갔다.
그렇게 어찌저찌 주방을 나가자 인형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물론 꼬챙이를 가지고 있던 요리사 인형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하지만 에반과 브라운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식당을 거쳐 로비까지 도망쳐왔다.
헉헉거리면서 숨을 고르던 그들은 뒤를 돌아보더니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더럽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가쁜 숨이 가라앉고 심호흡을 하며 침착해진 에반은 들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살펴 봤다.
다행히도 그것들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있었다.
그렇게 둘은 안심하며 원탁이 있는 방으로 가다가 계단 쪽을 한 번 돌아봤다.
모두 위층에서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더 늘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표정이 굳어진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인지 빠르지만 조용히 원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탁 앞으로 가 빵과 물고기를 올려 두자 왕관을 쓴 그림자는 치하한다는 듯이 무슨 말을 꺼냈고, 자신은 이제 원정을 가야겠다며 왕관과 망토를 두고는 사라졌다.
다른 의자에 앉아 있던 그림자들도 사라진 그 방에는 고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에반과 브라운은 원탁을 빙 둘러서 왕관과 망토를 주우러 갔고,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브라운은 일단 이것들을 들고 검이 박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고, 에반은 그 의견을 따랐다.
그들이 문을 나와 로비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원탁 방의 문을 잠갔다.
—탈칵!
갑작스런 소음에 놀란 그들은 돌아와서 문이 잠긴 것을 확인했고 신경 쓰지 말자며 넘어가기로 했다.
이윽고 검에 다가간 에반은 처음에 했던 것처럼 손잡이를 잡아서 뽑아보려 했지만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어떤 흔적을 발견한 그는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펴봤다.
바위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니 점점 돌가루 같은 게 떨어져 나가면서 글자가 나타났다.
[왕위를 가진 자, 이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왕위를 가진 자?"
"뭔가 찾았어요?"
"이것 좀 봐."
브라운도 고개를 숙여 글자를 살펴보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왕관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군.'
검 손잡이를 잡은 채로 아쉬워하던 에반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그는 왕관을 쓰고 망토를 걸쳤다.
에반은 지금 무슨 연극이라도 하냐며 딴지를 걸었지만 브라운이 검 손잡이를 잡자 미동도 하지 않던 검이 움직인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양손으로 검을 위로 쑤욱 뽑아내자 왕관과 망토가 빛나며 황금빛으로 흩어졌다.
"아…."
그 멋진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던 둘은 정신 차리고 지하실 쪽으로 향했다.
오른쪽에 있는 갑옷에게 검을 건네주자 위층의 갑옷처럼 손을 뻗어서 검을 받는 모습에 에반이 공격할 뻔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넘어가고.
그들은 왼쪽에 서 있는 손이 텅 빈 갑옷을 쳐다보고는 다른 검을 또 찾아야 한다며 다시 돌아갔다.
잠깐만 좀 쉬자며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그들은 어디를 가지 않았는지 확인을 했다.
서재, 침실, 약물 조제실, 원탁이 있던 방, 주방, 문에 구멍이 있던 잠긴 방 등등.
잠겨 있던 방만 빼면 다 갔다는 말을 하던 에반은 멈칫하며 어떤 고민을 했다.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 정원을 안 갔었어."
"정원에 뭔가 있긴 한가요?"
"그래, 그것들이 있었지…."
"저기요?"
에반은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고, 브라운도 설명을 좀 해 달라면서 그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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