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그림 속 세상
* * *
타닥거리는 횃불에서 불똥이 튀긴다.
회색 벽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에반과 브라운 사이를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고 있었다.
이 계단을 전부 내려가면 모든 원흉이 존재하리라 직감이라도 느낀 걸까.
전부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은 아직도 열리지 않았다.
아치 형태로 지어진 짧은 복도엔 양옆에는 문이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 있었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이 있는 오른쪽 문으로 다가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많이 썩어 있어서 어린아이가 발로 차기만 해도 모양 그대로 구멍이 뚫릴 거 같았다.
에반이 문에 손을 대자 불쾌감을 느꼈는지 얼굴을 찌푸린다.
그걸 참아내고 귀를 갖다대고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알아봤다.
이제 슬슬 존을 깨워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 기어다니는 것이 사용한 주문을 파괴했다.
열릴 거 같지 않았던 눈꺼풀이 점점 떠지며 흐리멍덩한 눈에 점점 총기가 생긴다.
묶여 있던 자세가 불편했는지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절그럭거리는 소리만 공허하게 퍼질 뿐 쇠사슬이 그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당황함이 표정으로 보이던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수갑을 풀어내려 난리라도 치는 줄 알았지만 어느새 침착해져서는 상황을 살펴봤다.
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에반은 쇠사슬 소리를 듣고는 브라운이 말했던 괴물이 있는 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만일 그 괴물이 보인다면 바로 도망치려는 건지 열리는 문틈으로 보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문이 점점 열리면서 보이는 철창과 사람의 형상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있던 브라운은 몇 시간만에 재회하는 존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중간에 철창으로 가로막혔다.
손에 녹이 묻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안부를 물으며 무슨 몇 년은 헤어졌던 부부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에반은 이러다가 몇 시간은 더 지나겠다면서 둘의 대화를 끊었다.
존은 누가 대화를 방해한 건지 확인하고는 눈을 치켜떴다가 감탄사를 내뱉고는 이전에 나와 마주했던 것을 기억해 낸 모양이다.
일단 과거의 악연을 지금은 잊고 행동하려는 건지 에반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기억은 있는지, 납치한 괴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지만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존이 알고 있는 정보는 없었다.
기껏 해야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정도일까.
자신을 묶고 있는 수갑과 철창을 살펴보던 존은 일단 열쇠를 찾아와야 한다면서 서두르라고 말했다.
에반은 잠시 기다려달라면서 마도서를 읽어보지만 잠금을 해제하는 편리한 주문이 적혀있을 리가.
내가 직접 만든 책이니 어떤 주문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철창과 수갑을 완전히 파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철창은 몰라도 수갑을 부수면 손도 같이 부서지지 않을까.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옆방에서 기어다니는 것이 찾아올 가능성도 높고.
일기장을 읽었으면 흑마법사였던 것도 알 테니까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겠지.
결국 마도서를 뒤져 보던 에반은 포기하고 열쇠를 찾으러 브라운과 함께 나왔다.
문을 나온 둘은 반대편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무상자로 가득한 방에 열쇠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숨을 수 있는 커다란 상자와 케비넷 정도만 열리고 다른 상자는 열리지도 않으니 금세 포기한 그들은 감옥 옆방으로 향했다.
이전 방과 같이 귀를 대보고는 소리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들어간 에반과 브라운은 낡은 노트에다가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자 에반은 재빠르게 문을 닫고는 창고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그들이 상자와 캐비넷에 숨자 연구실의 문이 주문으로 박살 나고 기어다니는 것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지하에 있는 방을 모두 확인하고는 지상을 향해 올라가는걸 지켜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에반 일행이 창고 방에서 나왔다.
브라운이 방금 그곳에서 열쇠 같은 게 반짝였다면서 완전히 박살 나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문을 뒤로하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서 두 개의 열쇠를 발견한 그는 금방이라도 괴물이 돌아올까 감옥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철창을 열고 존의 손을 묶고있는 수갑까지 풀어내자 자유의 몸이 된 그가 굳은 관절들을 풀어 주며 탈출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셋이 복도로 나오자 계단 쪽에서 무언가 기는 소리와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하는 눈치였지만 에반과 브라운은 표정을 굳히고는 창고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창고의 숨을 곳은 두 곳 밖에 없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아직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자 얼굴을 더욱 찌푸리거나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들은 시체 더미로 파고들어가 숨었다.
새하얀 피부를 밟으면 올라오는 핏물과 내장, 눈알 등에 역겨워하며 힘겹게 안으로 들어가는걸 구경하고 있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기어다니는 것이 무언가 명령하고 있기에 창고 방을 들여다 보니 지하실을 지키고 있던 갑옷 둘이 상자들과 캐비넷을 부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마터면 끔살당할 뻔했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시체들이 버려져 있는 방으로 돌아왔고, 숨어 있는 일행들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몇 분 후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멈추고 이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체 사이에 숨어 있는 일행은 더욱 파고들었고 그사이에 들어온 갑옷이 시체들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푹!
반복해가며 안에 사람이 없는지 검으로 확인하는 그때, 에반이 갑작스레 튀어나와서 가까이 있는 갑옷에게 주문을 사용했다.
—쿠르릉!
갑옷에게 작렬한 섬광은 그것을 완전히 무력화시켰고, 에반이 다시 주문을 외우는 사이 다른 갑옷이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존이 시체 사이에서 빠져나오면서 들고 있던 대퇴골로 갑옷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가 시간을 버는 사이에 에반의 주문이 완성되었고, 나머지 갑옷마저 제압되었다.
'하지만 상대가 흑마법사인데 너무 방심한 건 아닐까?'
주문을 사용하면서 뻗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에반이 기어다니는 것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존이 소리쳤다.
"조심해!"
"뭐, 윽!"
그의 경고 덕분에 자신에게 달려들은 갑옷의 검을 간신히 막은 에반은 마도서로 검을 쳐 내고는 갑옷을 멀리 밀어냈다.
그리고 그가 시선을 돌리자 번개 화살을 맞은 부위의 그을음이 사라지면서 다시 일어서는 갑옷이 있었다.
본체인 기어다니는 것을 이기지 못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존은 브라운과 갑옷을 막을 테니 저 괴물을 상대해 달라고 소리쳤다.
"브라운, 빨리 나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네요."
피범벅이 되어서 시체 사이에서 나온 브라운은 근처에 있던 기다란 뼈를 들고는 에반을 지키듯이 서 있었다.
갑옷 뒤에 있는 기어다니는 것이 명령을 내리듯이 손짓하자 갑옷들이 에반을 향해 달려든다.
"여행까지 와서 이게 무슨 일이야!"
브라운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날려드는 검을 응시했다.
심장을 향해 찔러오는 검을 옆으로 쳐 내면서 방어하기 급급한 그를 가끔씩 존이 권총으로 보조하면서 주문이 완성되도록 시간을 끌었다.
곧이어 에반이 주문을 끝마치자 그의 손 위에는 거의 사람만한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이 맞춰야 할 상대를 제대로 쳐다보고는 커다란 불덩이를 마치 공이라도 던지는 듯이 던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덩이에 당황한 기어다니는 것은 황급히 갑옷들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을 지키도록 만들지만 이미 늦었다.
가로막으려 달려드는 갑옷을 지나쳐 그대로 작렬한 불덩이는 벌레 하나 남김없이 전부 불태우고, 그 자리에는 뼈만 남아 있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갑옷들도 동작을 멈추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행들도 그다지 성치 않았는데 에반은 정신력 고갈에 브라운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공격을 쳐 내느라 체력이 바닥났고, 존은 공격을 막으면서 브라운을 권총으로 보조하느라 더욱 심각했다.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는 게,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던 그들은 무언가라도 느낀 것인지 눈을 떴다.
나는 이제 보스도 잡았으니까 빨리 나갈 시늉이라도 하라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무너뜨렸고, 저기 쓰러져 있던 갑옷도 그런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그들은 정신력이 고갈되어 머리가 아픈 에반을 일으켜 세우고는 끌고 나갔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서며 힐끗 뒤를 돌아보는 게 여유가 있는 모양인 거 같아서 조금 더 빠르게 붕괴시켰다.
지하실에서 퍼져나온 균열이 로비를 타고 나아가자 더욱 박차를 가했고, 2층으로 올라가서 갑옷들은 신경 쓰지 않고 복도를 뛰었다.
그런 그들에게 메이드 인형이 덤벼들었고 존이 당황하지 않고 권총으로 머리를 파괴했지만 인형들은 그런 것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로 그림으로 향하는 발을 붙잡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최대한 방해하는 인형들을 물리치며 그림에 도달한 그들은 건너편 복도의 균열에 집어삼켜지는 갑옷을 슬쩍 보다가 액자로 몸을 던졌다.
미리 활성화시켜둔 액자 너머 사무실로 가는 그들의 옷에서 핏자국 같은 것들을 지운 후 붕괴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림의 주문을 비활성화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후 다시 역재생시키는 듯이 그림 속 세상을 복구했다.
이후 몸을 이루는 벌레들이 점점 흩어지는 걸 느끼면서 첫 번째 화신체로 의식을 돌렸다.
***
'음, 홍차가 향이 좋구만.'
나는 뒤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저들을 무시하며 홍차의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찻잔에 입을 대어 조금 마시고는 접시 위에 내려 뒀다.
"그래서 이번 경험은 재밌었나?"
"허억, 후우, 뭐?"
"달려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이해한다. 너희들이 없는 동안 벽에 액자를 걸어두었는데 어떤가?"
"이딴 그림은 불태워야 잠자리가 편해질 거 같아."
"존, 혹시 이 사람이…."
"그래."
나는 소파를 반대로 돌려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 명을 쳐다봤다.
브라운은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반갑구나. 존 왓슨과 마틴 브라운."
"너는 이게 반가운 표정으로 보이나?!"
"넌 조용히 하도록."
내가 손가락으로 존을 가리키자 입에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읍읍대면서 소리치는 게 시끄럽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도대체 저희에게 바라는 게 뭐죠?"
"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존에게 못 들은 건가? 모두 내 재미를 위해서일세."
나는 주문으로 에반을 내 옆에 앉혔다.
이제서야 긴장의 끈은 놓친 것인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어 보인다.
"상은 나중에 주도록 하마. 그림은 태우지 말고."
"이봐! 이—"
존에게 걸어 둔 주문을 해제하고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존을 메이드에게 맡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리셋은 나중에 하도록 하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