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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48화 (48/154)

〈 48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내가 얼어붙은 채로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괴물은 존의 얼굴을 손 같이 보이는 것으로 뒤덮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사실 나는 비행기에서 자고 있고, 너무나 기대한 나머지 이런 악몽을 꾸게 된 것이라고 볼을 꼬집어 보지만 꿈에서 깨기는 커녕 볼만 아플 뿐이었다.

결국 이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인 나는 다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액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라도 못 들어가고 손에 물감만 묻어 있는 사태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 하며 손가락을 그림으로 넣자 마치 건너편에 공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졌다.

물론 이 액자는 내가 사무실로 들어온 후 받은 것이고 벽에 기대어져 있어서 그런 트릭따위는 사용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손가락부터 팔, 몸과 다리까지 전부 들어가자 주변을 살폈다.

액자를 통해 보였던 것처럼 붉은 벽지와 커튼, 바닥에 깔린 카펫이 보였다.

그리고 장식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갑옷들이 호위라도 하 듯이 서 있었다.

눈앞의 갑옷에 다가가 툭툭 쳐 보며 투구를 벗겨보려 했지만 고정이라도 된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괴물을 상대하려면 이런 갑옷이라도 입어야 할 텐데.'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으러 다시 액자로 손을 뻗었다.

—툭.

하지만 그림은 이제서야 제 역할로 돌아왔다는 듯이 그저 건너편의 풍경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당황한 나는 유리창처럼 그림을 두들겨보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계속하면 찢어질까 싶어서 포기하려는 그때 옆에서 무언가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물기가 있고 찐득한 것을 벽에다가 갖다 대는 듯한 소리.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히에엑!"

분명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파란색으로 글씨가 써져 있던 것이었다!

[탈출하고 싶다면 그를 구출해]

지금 상황을 생각한다면 구출해야 할 그는 당연히 존을 말하는 거겠지.

글씨를 보니 패닉에 빠져 있던 뇌가 정신을 차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존을 구하는 것.

양손으로 볼을 세게 때리고 나서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복도를 나아갔다.

인기척은 하나도 없이 그저 갑옷들만 덩그러니 서 있는 복도가 약간 소름 끼치기도 하지만 계속 나아가던 나는 문을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밀자 끼이익—하며 경첩에서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안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지만 사람이 사용한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서랍에 들어 있던 낡은 일기장 하나만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였다.

일기장을 천천히 하나하나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기의 주인이 성실하지 못한 거 같았다.

아니면 그냥 일기장을 가끔씩 썼던 건지 적혀 있는 날짜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오늘은 어딜 갔다던지 뭐가 좋았다던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는 대충 보며 넘기다가 눈에 띄는 내용이 보였다.

"위대한 존재와 접촉? 다시 부활할 것? 대체 무슨 소리야."

일기의 주인은 아무래도 마법사인 모양이다.

연구가 어떠니 성과가 곧 나올 거라니 이런 글을 몇 번이나 지나쳐갔다.

점점 시간의 간격도 늘어나고 글씨가 커지다가 마지막 기록에 도달했다.

[숨쉬기가 힘들다. 눈도 흐릿해서 글자도 잘 안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곧 이 집과 함께 다시 태어날 것이니까.]

집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들어온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걸까?

[비록 주문을 말하지 못하는 몸이 되더라도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랫것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상관없다.]

그나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말하지 못하는'보다 '사용하지 못하는'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일단 만난다면 경계는 하고 있을 것….

일기는 이게 끝이다.

여기 쓰여있는 지하실은 지금 가기보단 여기를 좀 더 찾아보고 무기도 얻어서 가야겠다.

그저 존이 무사하기를 빌어야겠지.

나는 녹슨 경첩이 지르는 비명을 무시하며 다시 복도를 나아갔다.

혹시라도 누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걸어가던 도중 저 멀리서 무언가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지만 복도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고, 나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권투 영상에서 본 것처럼 가드를 올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인영을 지켜보자 의아함이 들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나를 발견했을 텐데 적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의 형체가 완전히 보일 정도로 다가오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관절인형이 메이드복 같은 걸 입고는 손에 청소도구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먼지가 쌓인 걸 발견했는지 커튼으로 다가가서 먼지를 터는 걸 보다가 슬그머니 지나가 계속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어느새 계단까지 걸어왔다.

근처에 문도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책 한 권과 찬장엔 플라스크와 유리병들이 가득했고, 다른 화학약품 같은 것도 보였다.

나중에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염산을 챙길 것을 기억해 두고 반대편으로 이어진 복도로 향했다.

붙여넣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다가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이 방은 관리를 잘한 건지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안의 풍경이 보였다.

벽에 붙어 있는 책장들과 의외로 먼지가 쌓여 있는 책상, 그리고 그곳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사람?

"어라?"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사람이다.

나는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깨우려고 어깨를 흔들었다.

졸린 건지 깨우지 말라고 팔을 휘적거리다가 결국 잠에서 깼다.

그렇게 드러난 부스스한 그의 얼굴을 보자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을까 머릿속을 뒤져 보다가 한 악몽이 떠오른다.

수수께끼의 저택에 떨어져서 미치광이에게 쫓긴 끔찍한 악몽.

깨어난 이후 존과 연락이 닿았으니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괴로운 기억 속의 인물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다리에 힘이 빠져나간다.

"흐에엑…."

자신을 깨운 것에 분노한 미치광이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내 목을 몸과 작별시키거나 신체를 절반으로 만들어버릴 줄 알았지만 그는 그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할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면서 간신히 일어났다.

"으음, 여긴 어디지. 난 분명 내, 윽!"

그가 머리를 짚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이번에야말로 오겠구나 싶어서 최대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저 제약이니 뭐니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저기…."

"응? 누구세요? 여긴 어디고."

"그건 저도 묻고 싶은데요."

설마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흐릿하지만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한데…."

"저택에서,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때는 미안하게 됐어."

"네? 저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이제 와서 싱겁게 사과하다니.

그때 찔렀던 감촉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서 식칼이나 날붙이는 전혀 만지지도 못 하는데.

"정말로 미안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내가 화를 내기도 애매하잖아! 괜히 나만 나쁜 사람인 거 같고!'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가 나의 행동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철컥.

뭔가 철 같은 게 움직이는 소리.

그래, 마치 바깥의 갑옷처럼….

'갑옷? 사실은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던가 그런 건가? 눈쪽으로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슬쩍 바라보니 그는 "그래서 여긴 어디지…." 같은 소리나 내뱉으며 아까의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 모습이었다.

"저기요. 방금 소리 들었어요?"

"응? 무슨 소리?"

"철컥거리는 소리요. 마치 갑옷이 걸어 다니는 소리 같았는데."

"잠깐, 갑옷?"

"뭔가 알아요?"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네. 나는 에반, 에반 스미스야."

"저는 그냥 브라운이라고 부르세요."

"그래, 브라운. 일단 먼저 확인해 볼 곳이 있어."

"어딘데요."

"그건, 윽! 이것도 안 되는 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아는 낌새여서 일단 믿기로 했다.

에반은 책상 위에 있던 두꺼운 책을 들고는 문으로 향하더니 당당하게 열어 젖혔다.

나는 당황해하며 그에게 다가가 문밖으로 나왔고, 우리들을 향해 달려오는 갑옷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의 손에 들려 있는 장검만 봐도 좋은 의도로 다가오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옆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에반의 모습에 저기 안에서 의자라도 가져와야 하나 고민할 즈음 그가 손을 앞으로 뻗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엄청난 섬광과 함께 샛노란 번개가 손에서 나와 갑옷을 향해 내려친 것이었다!

흉갑에 그을음이 생긴 채로 쓰러진 갑옷을 바라보니 아무래도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깜짝이야. 진짜로 갑옷이 살아서 돌아다니네."

"저는 그 마법에 더 깜짝 놀랐는데요."

"그래? 아무튼 빨리 확인하러 가 보자."

아무 설명 없이 이 말을 남기고 달려가는 그에게 어이없어 하는 눈빛을 날리다가 뒤늦게 쫓아갔다.

에반은 내가 온 복도를 지나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을 확인하더니 아직 내가 가 보지 않은 쪽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여타 다를 게 없는 문이 있었다.

그런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고, 열리지 않자 발로 차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등 강제로 열어 보려고 갖가지 노력을 했다.

심지어는 방금 봤던 주문까지 사용하려고 해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건, 윽! 아오!"

그는 입을 열다가 두통이라도 느낀 건지 자그마한 비명을 지르고는 화를 냈다.

그러고는 아무 대답 없이 중얼거리다가 마법을 사용했는데 문은 멀쩡했다.

이 정도면 사실 문이 아니라 튼튼한 벽에다가 그림이라도 그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문고리는 정상적으로 달려 있었다.

에반은 제대로 막아 뒀다면서 욕을 몇 마디 더 하더니 문을 여는 건 포기했는지 복도를 되돌아갔다.

갑옷에 대해 아는 눈치였고, 이곳에 저 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라.

"저기가 출구에요?"

—끄덕.

그리고 뭔가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오는 모양이다.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고 제약이, 어라? 이건 말할 수 있네."

"제약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제한되었다는 거지."

그나저나 저곳이 출구였다니.

복도에 있는 액자까지 생각하면 다른 출구라고 생각해야겠지.

존을 구하기 전까지는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실망스럽긴 하다.

우리들은 누구라도 우리가 실망했다고 알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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