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나는 당당하게 원탁으로 걸어가려는 에반의 팔을 붙잡았다.
"미쳤어요?"
그리고 최대한 저 그림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이는 목소리로 미쳤냐고 물으니, 오히려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법을 쓰는 사람은 정신구조가 이상한 걸까.
"저것들이 저희를 발견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다가가면 어떡해요?"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게? 일단 대화로 해결해 보기로 하고, 그게 안 된다면 싸워야지."
"아니, 뭐, 맞는 말이기는 한데…."
"공격받는다고 해도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에휴, 약속이에요."
일리 있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느낀 나는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게 원탁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드문드문 들렸던 이야기가 제대로 들려왔다.
"북쪽의 야만인을 정벌해야 하는데 물자가 없어서 문제로군…."
북쪽의 야만인?
아마도 앵글로 색슨족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전설에서도 브리튼인을 상징하는 하얀 용과 싸우던 붉은 용으로 표현되었으니까.
책을 빨리 읽느라 너무 대충 훑었는지 둘 사이에 전쟁이 있었나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역사학과도 아니고 무슨 상관인가.
저 그림자들이 게임처럼 퀴스트를 내어주든 싸움을 걸어오든 그것만 신경 쓰면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긴장 속에서 원탁으로 완전히 다가가자 반대편의 상석에 앉아 있던 왕처럼 보이던 그림자가 우리를 알아차렸다.
"흠? 심부름꾼이 찾아왔구나."
심부름꾼, 인가.
"저 그림자가 저희를 심부름꾼 취급하는데요?"
적대적이지 않은 모습에 긴장이 풀린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의 진심이 튀어나왔다.
에반은 방금 전 기둥 뒤의 나처럼 미친놈을 바라보는 듯이 저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속삭였다.
"일단 조용히 듣기나 하지."
다행히도 저 그림자는 이쪽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못 들은 모양이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을 위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예."
그대로 말을 이어가던 그림자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명령을 내리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거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성경에 적혀 있는 유명한 기적을 떠올리는 말을 듣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반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서 왕 전설에 성배도 나오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내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왕의 그림자를 바라보지만 할 말은 이게 전부인 건지 다시 원탁의 그림자들과 회의에 들어갔다.
이대로 뒤돌아서 문밖으로 나오고 나서 혹시나 안쪽의 그림자들에게 들릴까 귓속말로 에반에게 속삭였다.
내가 헛소리한 것도 제대로 듣지 못한 걸 보면 여기서 크게 이야기해도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물고기와 빵이면 역시 주방이겠죠?"
"당연히 거기 밖에 없겠지."
"그럼 또 오랫동안 찾아야겠네요."
"아니, 약간 익숙한 구조라서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아."
이렇게 말한 에반은 따라오라는 듯이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구조를 아는 것도 아니라서 묵묵히 따라가니 식탁보로 덮인 넓은 식탁과 그 위에 올려진 은촛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면서 무언가를 하는 메이드 같은 인형도 몇몇 볼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다.
식당을 둘러보던 나는 새하얀 식탁보까지 들춰가면서 샅샅이 단서나 가져가야 할 물품들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서 인형이 끌고 가는 서빙 카트까지 확인했지만 빵 같은 건 역시 있을 리가 없겠지.
나와 함께 수색하던 에반은 내가 끝마친 것을 확인하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앞장서서 가던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다 보니 문득 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촛대는 왜 들고 왔어요? 무기로 쓰기엔 적합해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도둑놈도 아닌데 이유 없이 가져 왔겠어? 나중에 어떻게 쓰는지 지켜나 보라고."
이렇게 대화하며 나아가던 우리는 가면 갈수록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나무 같은 거에다가 계속 내리치는 건지 탕탕거리는 문 없이 뚫려 있는 주방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주방을 힐끔 쳐다봤고, 그 안에는 여러 번 봤던 목각 인형이 요리사 옷을 입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에반도 마찬가지로 주방 안을 염탐하다가 들고 있던 촛대를 멀리 던졌다.
—쨍그랑!
포물선으로 날아가던 촛대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고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언가를 하고 있던 인형들도 나처럼 소리가 난 장소로 고개가 돌아갔다가 다시 되돌아가며 하던 일을 반복했다.
"2층의 갑옷이랑 똑같네. 소리만 내지 않으면 별일 없을 거야."
"중앙의 몸을 숨길 만한 것도 있고요."
우리는 혹시 인형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지 않을까 잠시 기다리면서 확인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먼저 들어간 에반을 따라 마치 암살 게임 속의 플레이어처럼 허리를 숙여 몸을 숨기고 나아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앞으로 가니 반쯤 열린 미닫이문이 여기가 식품 창고라고 알려주는 거 같았다.
슬슬 저리는 허벅지를 달래면서 빠르게 열린 문을 통과해 문을 닫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린 게 없어질 때까지 간단히 다리를 주먹으로 치다가 어느 정도 나아졌다 싶어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온 에반이 찾고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가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며 뒤적거리다 보니 물고기를 찾을 수 있었다.
"에반, 여기 물고기 찾았어요."
"오, 잠깐만. …정확히 두 마리네."
"비린내가 나서 쉽게 찾긴 했는데. 상한 건 아닐까 몰라요."
"받아주길 빌어야겠네."
목표 중 하나인 물고기도 찾았으니 다음은 빵이다.
하지만 아무리 창고를 돌아다니며 찾아봐도 밀가루나 버터 같은 재료만 찾을 수 있을 뿐.
완제품인 빵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빵 만드는 법 알아요?"
"아니, 너는 아냐."
"영상으로 몇 번 보긴 했는데, 그걸 따라 하는 건 다른 차원이죠."
우리는 밀가루와 버터, 우유를 앞에 모아 두고는 이걸 정말로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쪽으로 오면서 오븐이 있는 걸 보긴 했지만.
빵을 굽기 위해 인형들을 쓰러뜨리고 몇십 분을 허비한다면 탈출할 때 액자로 향하는 길을 막을 갑옷들의 수가 눈에 선하다.
"일단 한 번만 더 찾아보고, 안 되면 저기 인형들을 다 없애버려야지."
"괜찮겠어요?"
"적대적이지 않을 거란 생각도 해 보고 싶긴 하지만 들고 있는 것만 봐도 복도의 것들과 다르게 위협적이지. 분명 여길 만든— 음, 아무튼, 그런 예감이 들어."
"아무튼 빨리해요."
우리는 다시 한번 꼼꼼하게 찾아봤던 상자들이나 다른 것들도 뒤져 보다가 저기서 에반이 빵이 든 봉투를 찾았다는 말을 했다.
어떤 나무 상자를 뒤적거리던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닫혀 있던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기뻐할 틈도 없었다.
어느 정도 문이 열리고 인형의 머리가 들어오자 나는 뒤적거리고 있던 상자를 통째로 들어서 내리쳤다.
생각보다 무거운 상자에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인형의 머리도 박살 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필요한 것들을 들고 먼저 나간 에반의 뒤를 따랐다.
부서진 나무 조각을 짓밟으며 문밖으로 나오자 식칼을 들고 넘어져 있던 인형이 일어나려는 걸 발견했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발이 먼저 나갔다.
그리고 출구로 달려가려다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순간적으로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눈앞으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 벽에 박혔다.
고개를 돌리니 벽에 박힌 충격으로 약간 흔들리고 있는 꼬챙이가 보였다.
하마터면 그대로 머리가 꿰뚫려 꼬치가 될 뻔한 것에 식겁하지만 이럴 시간이 아니다.
나는 손을 뻗어 꼬챙이를 뽑아내고는 다가오는 인형을 하나 찌르고 견제하면서 주방을 나갔다.
저 멀리 있는 에반을 쫓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다 보니 어느새 로비로 돌아온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다리를 혹사해서 그럴까.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으며 목에선 피맛 같은 게 났다.
주변을 둘러보며 방금 그 주방의 인형들이 쫓아오지는 않았는지, 2층의 갑옷이 내려오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우리 모두 동시에 드러누웠다.
딱딱한 바닥이 무슨 푹신한 침대처럼 편안하다고 느껴지다니.
한동안 누워서 숨을 고르던 나는 요동치던 심장이 점점 원래 속도를 찾아가는걸 느끼며 가만히 있다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만 살짝 돌려서 확인하니 에반이 가져 왔던 종이 봉투 속의 빵을 확인하고 있었다.
봉투 옆에는 물고기 두 마리도 원상태로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괜찮아진 거 같으니 슬슬 일어날까.'
다리에 근육통이 좀 생긴 듯하지만 아직까진 참을 만하니 무시하고 일어났다.
에반도 내가 일어난 걸 확인하고는 바로 일어나서 원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그마하지만 계단 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철컥철컥철컥.
우리가 내려왔을 때는 서재 앞의 있던 갑옷까지 해서 세 개였을 텐데.
발소리만 들어 보면 그것보다 훨씬 많은 거 같다.
옆에 있던 에반도 그걸 들었는지 나처럼 표정이 굳어서는 빨리 방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원탁 앞까지 당당히 걸어가 가져온 것들을 내려 두자 그림자가 무언가 말했다.
"수고했다. 어떻게 원정 기간까지 맞췄군. 브리튼의 왕, 아서가 너희들을 치하하노라."
원탁 위에 있던 빵과 물고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보지만 그림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자기가 아서라고 한 그림자는 망토와 왕관을 의자에 두고는 사라졌다.
회의하느라 시끌벅적했던 원탁이 조용해지고, 우리는 저것들을 주우러 빙 돌아서 상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왕관을 주워 보지만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려가보며 살펴봐도 글귀라던가 문장같은 게 적혀 있지도 않은 그저 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일 뿐이었다.
망토도 고급스런 재질에 금실로 장식을 수놓았을 뿐 왕관과 똑같았다.
"이것들을 어떡할까요."
"일단 들고 나가 봐야지. 여긴 할 것도 없어 보이니까 검이 박혀 있던 곳으로 가자."
"그래요."
내가 왕관을, 에반이 망토를 들고 방을 나와 문을 닫자 어떤 소리가 들렸다.
—탈칵!
깜짝 놀란 우리는 문으로 되돌아가 확인해봤지만 그저 문이 잠긴 것뿐이었다.
'여기서 가져갈 건 전부 가져왔다는 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우리는 다시 검을 향해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