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손에 들린 왕관의 묵직함을 느끼며 검을 향해 다가가도 그다지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뽑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뻗어보지만 임자가 있었다.
나보다 먼저 손잡이를 잡은 에반의 팔이 움찔거리지만 검이 미동조차 없는 게 아직도 무언가 부족한가 보다.
지하실을 제외하면 전부 다 돌아다닌 거 같은데 놓친 단서라도 있는 걸까?
"…에휴."
에반은 실망한 모양인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왕관에 박혀 있는 보석을 살펴보면서 무언가 비치지 않을까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포기하고 망토나 살펴보게 에반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무릎을 꿇고는 검이 박힌 바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바위를 문지르면서 단서라도 발견했는지 뭔가 말했다.
"왕위를 가진 자?"
"뭔가 찾았어요?"
"이것 좀 봐."
나도 고개를 숙여 그가 찾은 걸 읽어보니 왕위를 가진 자가 이 검을 뽑을 수 있을 거라 적혀 있었다.
아서 왕 전설에선 검을 뽑은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선 반대인가.
'하지만 왕위를 가진 자가 누가 있지?'
잘 모르겠지만 내 조상 중에 왕족이 있을 거 같지 않고.
애초에 그랬으면 처음부터 뽑을 수 있었겠지.
지금은 잠긴 원탁 방의 그림자도 이제는 사라졌는데.
그렇다면 왕위는 혈통 같은 문제가 아닌 건가.
'왕위… 왕위라.'
무엇이 필요한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손에서 갑자기 무게감이 느껴졌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보던 눈을 굴려 손에 들고 있는 왕관을 보니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왕관이란 곧 왕을 상징하는 것. 망토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찬가지겠지.'
나는 들고 있던 왕관을 머리에 쓰고 에반에게 망토 좀 잠시 달라고 말했다.
"에반? 잠시 망토 좀 주시겠어요?"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왕관은 왜 썼어? 무슨 연극이라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대꾸할 틈도 없이 망토를 두르고 검 손잡이를 잡자 미동조차 없던 검이 살짝이지만 움직였다.
그대로 힘을 줘서 당기자 부드럽게 뽑히면서 은은한 빛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던 나는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면서 황금빛 입자가 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광경에 정신이 팔린 것도 잠시.
우리들은 지하실로 향해 다시 갑옷들을 마주했다.
내가 들고 있던 장검을 오른쪽의 갑옷에게 천천히 가져다주자 갑옷이 손을 뻗어왔고, 옆에 있던 에반이 들고 있던 책으로 손목 부분을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타격 없이 검을 받은 갑옷은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며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괴상한 언어를 말하던 에반은 머쓱한 건지 앞을 향해 뻗고 있던 손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하지만 역시라고 해야 할까.
나는 검이 없는 왼쪽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검을 하나 더 찾아야 하는 모양이네요."
"일단 로비로 돌아가자."
그렇게 로비로 돌아온 나는 잠시 앉아서 쉬자는 그의 말에 검이 어디 있을지 추측할 겸 그렇게 하기로 했다.
벽에 등을 기대며 그다지 피곤해 보이지도 않는데 앓는 소리를 내는 그를 보면서 본론을 꺼냈다.
"제가 가 봤던 방은 침실에 서재, 화학실험실 같은 방에 원탁 방, 그리고 주방 정도네요."
"나는 서재를 못 갔는데, 별거 없었지?"
"그냥 일기장 하나만 달랑 있었어요."
"그렇군. 그리고 문에 구멍이 뚫려 있는 잠긴 방을 깜빡한 거 같은데."
잊고 있었던 방의 존재를 그를 통해 다시금 듣자 나를 관통하던 포식자의 눈빛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서 참을 만 했다.
"그럼 잠긴 방을 제외하면 전부 가 본 거네요?"
"그렇지. 잠긴 방만 제외하면…."
에반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 정원을 안 갔었어."
"정원에 뭔가 있긴 한가요?"
"그래, 그것들이 있었지…."
"저기요?"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데자뷰를 느끼며 그를 따라갔다.
잡아내면 위층의 갑옷은 신경 쓰지 않고 한마디 내뱉으리라 다짐하며 어느 정도 달리다 보니 어떤 창문 아래에 숨은 채로 무언가를 살펴보는 에반이 보였다.
그의 옆에 다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가 강제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창문 너머로 무언가를 살피는 그의 분위기가 심각해 보여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에반처럼 창문 너머를 살펴봤다.
그러자 넓은 부지의 정원의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동상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잔디와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무언가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복도나 주방에서 볼 수 있었던 목각 인형이었다.
여기까지 저게 있다니, 다시 싸워야 하는 건지 고민을 한 나는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신전의 기둥처럼 생긴 사각형의 받침대에는 무언가 적힌 금속판이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당연히 동상이 서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 세운 동상인가 싶어 좀 더 집중해서 바라보니 마법사라고 하기엔 이상한 동상이었다.
다부진 근육에 옷은 로브가 아닌 그리스의 전통 의상으로 보이고 손에는 지팡이나 책이 아닌 검을 들고 있었다.
'…검?'
새하얀 순백의 대리석과 어울리지 않는 강철의 검.
그것을 든 동상.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 조각상은 당당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검을 어떻게 가져오느냐가 문제인데.'
나무를 손질하느라 정신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대놓고 조각상 앞으로 다가간다면 들키고 말 거다.
어차피 다가간다고 해도 검을 높이 들고 있어서 손에 닿는 높이도 아니지만.
아마도 방금 검을 뽑았던 것처럼 어떤 조건이 있겠지.
그래도 일단 물어볼까.
"저기 조각상이 든 검 보이세요?"
"방금 발견했어. 저걸 어떻게 못 볼 수가 있지?"
"점프해서 닿을 높이도 아닌데 어떻게 얻어야 할까요?"
"지금 생각 중이니까 조용히 좀 해 봐."
괜히 말 꺼냈다가 구박만 받은 느낌인데.
일단 안전을 위해 저 인형들을 모조리 무력화시켜야 한다.
나는 대충 벨트에다가 고정시켜둔 꼬챙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해봤다.
어느 순서로 처리해야 할지, 에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동선을 짜면서 고민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이상한 말이 들렸다.
"흠… 너가 저기 인형 하나만 맡아줄 수 있겠냐?"
"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다시 한번 들려주실래요?"
"인형 하나만 맡아달라고."
이걸 그냥 들어가겠다고?
"미쳤어요? 생각할 시간도 충분했던 거 같은데 겨우 나온 게 정면승부라고요?"
"아니, 그게…."
그도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 뭐라고 반박하진 못한다.
"처음에 하나를 마법으로 처리한다고 하면 나머지는 어쩔 건데요? 위에서 갑옷이랑 싸울 때도 아슬아슬하게 싸우더니 이번엔 하나 더 추가해서 싸우겠다?"
"아니, 그, 갑옷이랑 인형은 다르지…."
"그럼 만약 저한테 두 개가 달라붙으면 어쩌려고요."
"어…."
"하아—."
머릿속에 돌격밖에 없는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까.
나는 고개를 올려 한 번 인형들의 행동 패턴을 살펴봤다.
들고 있는 공업용 가위로 잔가지를 싹뚝 자르면, 떨어진 나뭇가지는 땅에 녹아드는 듯이—
'응?'
다시 봐도 떨어진 나뭇가지는 사라지고 다시 나무에 자라나 있었다.
인형은 그걸 찾아서 계속 자르는 걸 반복하는 게 웬만하면 저것들이 나무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갑옷이나 주방의 인형처럼 소리를 내면 똑같이 반응하겠지.'
에반에게 내가 발견한 사실을 알려주고 조용히 처리하자고 말하면서 문을 슬쩍 열었다.
여기는 경첩이 멀쩡한 건지 끼이익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우리는 조용히 정원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왼쪽으로 가면서 에반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는 살금살금 인형의 뒤로 도달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꼬챙이를 들어서 녀석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혹시 머리가 아닌 심장이 있을 부분이 약점이라면 어쩔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할 사이에 저질러 보는 게 나을 거다.
높이 치켜든 꼬챙이를 휘두르자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인형의 머리에 반 정도 파고들었다.
그걸 빼려고 힘을 주다가 느껴지는 움직임에 손을 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자 인형은 무언가 걸린 것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그래도 쓰러졌다.
하지만 정원의 바닥은 잔디나 나무가 심겨진 곳을 제외하면 전부 벽돌 바닥이었기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모든 인형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달려들었고, 나는 인형의 목덜미에다가 발을 대고 꼬챙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면서 잠시 앞을 보자 내게 달려드는 인형과 불덩이에 맞아 쓰러지는 인형이 보였다.
나는 더욱이 힘을 주며 꼬챙이를 거의 뽑아내는 듯 싶었지만 인형이 달려드는 것이 더 빨랐다.
결국 뽑는 걸 포기하고 나를 잘라 내려는 가위를 피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마무리 짓기 위해 내 목으로 다가오는 가위를 어떻게든 붙잡고 저항하지만 부들대는 팔이 무색하게 점점 다가왔다.
가위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이제는 손잡이를 움직이면 목이 댕강 잘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달려온 에반이 인형을 걷어차서는 목을 부러뜨려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후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상의를 펄럭이며 누워 있었다.
"역시 정면돌파가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그건 아니죠.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절대 선택하지 않을 선택지인데."
"괜히 맞지도 않는 암살을 하려다가 죽을 뻔했는데?"
"애초에 저는 싸움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나는 에반의 헛소리에 반박하면서 방금 전투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누워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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