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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53화 (53/154)

〈 53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이제 땀도 거의 다 식어가니 일어나야겠다.

저기서 나무를 살펴보는 에반은 지치지도 않은 건지 멀쩡해 보인다.

저 옆에 목과 몸통이 분리된 인형을 보면 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일어나는 걸 발견했는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좀 멀쩡해졌냐."

"그럼요. 당신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데 비결이라도 있어요?"

"평소에 운동이라도 해."

그래도 주변 친구들 보다 운동을 많이 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힘도 세고 싸움도 뛰어나고 마법까지 쓴다니.

이 세상이 만약 게임이었다면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람이다.

…더 이상 생각하면 자괴감이 밀려올 거 같으니 넘기도록 하자.

아무튼 일어난 나는 에반과 같이 조각상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받침대에 붙어 있는 금속판에는 다행히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적혀 있었다.

"이아손? 이 이름은—"

"누군가…."

"우왓!"

"이런 거에 놀라면 어떡해."

금속판을 읽느라 집중하던 나는 갑작스레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옷이 돌아다니고 이상한 목각 인형은 공격해 오기까지 하지만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놀라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하긴, 마법을 쓰는 것부터 일반인은 아니겠구나.'

이런 사람에게 일반적인 반응을 바란 게 잘못이라 생각하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조각상이 말할 줄은 어떻게 알아요."

"방금 전의 그림자는 그럼 뭔데."

"누군가 그걸 가져와 준다면…."

그림자와 조각상이 같냐고 말하려던 나는 이어서 들려오는 조각상의 말에 가로막혔다.

지금 이렇게 싸울 시간에 빨리 정상인인 존을 구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조각상의 말을 추리했다.

서재에 있던 그리스 신화서.

그리고 그 책에 적혀 있었던 아르고 호 원정대 이야기.

신화 속 영웅들을 이끄는 주인공이 바로 이아손이었다.

"아—"

'그렇다면 가져와 달라는 건 황금양털인가?'

그런데 자기가 직접 안 가고 왜?

"그래서 이 조각상이 찾는 게 뭐인 거 같냐?"

"아무래도 황금양털이겠죠. 2층의 서재에서 읽었던 책에 적혀 있었는데."

아무렴 조각상이 말하고 있는데 원전의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생각을 마치는 사이, 옆에서 내 말을 들은 에반은 조각상에게 질문했다.

"이봐! 그 황금양털인지 뭔지 찾아오면 그 검을 줄 수 있나?"

"무엇이든."

그렇게 조각상이 답하자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방금 전 원탁 방을 나온 것과 비슷한 상황에 일단 여기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럼 빨리 찾으러 가자."

"책에서는 잠들지 않는 용이 그 양털을 지키고 있다는 데요."

"용?"

용이라.

구멍을 통해 마주쳤던 그 눈동자가 다시금 떠올랐다.

"네. 아마도 구멍이 뚫려 있는 그 문인거 같아요."

"네가 들여 봤다가 발작한 그 문?"

"거참! 무슨 괴물이랑 눈이 마주쳤다니까요?!"

에반과 양털이 있을 만한 장소를 이야기하며 로비로 나온 나는 먼저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혹시나 물어보는 건데, 용이랑 싸울 생각인거는 아니죠?"

"무조건 싸워야만 한다면 그러겠지만, 굳이?"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책에 적혀 있는 거에 따르면 이아손에게 반한 메데이아라는 마녀가 마법약을 만들어서 용을 재웠다고 해요."

"그리고 2층엔 화학실험실 같은 방이 있었지."

"그렇죠. 그러니까 저희는 빨리 2층으로 올라가야 해요."

"부디 갑옷이 우릴 발견하지 않기를 바래야겠군."

다음 목적지가 정해진 우리 일행은 곧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철컥철컥철컥.

'발소리가 이렇게 많았나? 이러면 많이 위험한데."

얼핏 발소리만 들어도 정원에 있던 인형보다도 많은 거 같다.

나처럼 표정이 굳은 에반은 조심조심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더니 난간 사이로 2층 복도를 살펴봤다.

그러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본 나는 혹시나 싶어 이야기했다.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이지만, 정면돌파는 절대로 하지 마요."

내 말을 듣는 건지 그저 복도를 살피면서 무슨 주문을 속삭이고 있었다.

몇 분 정도 지나자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뛰쳐나간 에반은 복도에 혼자 돌아다니던 갑옷에게 손을 뻗었다.

뒤따라 올라온 나는 설마 시끄럽게 번개를 쏘려는 건가 싶어 귀를 막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광선검 들고 싸우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가 손을 쥐자 갑옷이 공중에 뜨더니 우그러졌다.

그런 상태에서도 바둥대던 갑옷의 움직임이 멈추자 천천히 내려 두고는 또 다른 마법에 정신 팔린 나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 차린 나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제조법이 적혀 있는 책을 찾아서 펼쳤다.

옆에서 에반이 장작을 모으는 사이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다가 수면제가 적힌 부분을 발견한 나는 찬장으로 다가갔다.

'월계수 잎에 무지개 딱정벌레의 날개, 무슨 이상한 식물의 뿌리에다가 달빛을 받은 수은?'

나는 찬장에서 꺼내던 수은 병을 바라봤다.

설마 지금 달빛 아래에다가 둬야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은빛의 수은 사이로 다른 색이 보였다.

잠시 그것에 홀린 나는 뺨을 세게 후려치고는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재료를 전부 챙겨 솥 앞으로 오자 에반이 미리 불을 피워 두었고, 거기에 나는 물이 반 정도 차도록 부었다.

그리고 옆의 탁자에 도마와 막자를 가져왔다.

정체 모를 식물의 뿌리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막자에 넣고 으깨서 즙을 내고 솥에다가 넣었다.

그러자 기포조차 올라오지 않던 수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어서 다음 재료를 넣으라고 재촉하는 거 같았다.

나는 재빨리 찌꺼기를 버리고 다른 재료들을 으깨서 순서대로 넣고 주걱으로 젓자 점점 액체의 색이 변했다.

마지막으로 수은을 전부 넣자 물감을 마구잡이로 섞은 거 같던 색은 마치 심연처럼 어두운색으로 변했다.

설마 실패한 건가 싶어서 책을 다시 읽어보지만 이렇게 변해야 성공이라는 것에 안심한 나는 커다란 플라스크를 가져와서 완성된 약물을 넣었다.

약물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 정도 양으로 용을 재울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가장 커다란 플라스크가 이것 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잠깐, 꼭 하나만 가져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

이것만으로 불안하다면 다른 병에다가도 담아가면 되는 일이다.

좋은 생각이라며 자화자찬하던 나는 병들을 가져와 탁자에다가 두고 솥을 바라봤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저 뒤에서 문에다가 귀를 대고 집중하는 에반에게 이변에 대해 말했다.

"어… 빨리 나가 봐야 할 거 같은데요?"

"잠깐만."

"이걸 보시면 그 말이 쏙 들어갈 텐데."

"도대체 왜 그러는…."

심연처럼 어두웠던 액체는 어느새 황금색으로 변해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용조차도 재우는 수면제라고 했으니 우리가 들이마신다면 영원히 잠들어 버리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어났을 때는 복도가 갑옷들로 포화된 상태겠지.

나는 점점 다가오는 연기에서 물러나면서 빨리 그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계속 뒷걸음질 치다 보니 등에 무언가가 부딪혀서 돌아보니 벌써 벽까지 몰렸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연기에 이제는 정말 나가야겠다고 느껴질 때 즈음 에반이 문을 열었다.

재빨리 문을 나서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닫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저 건너편의 갑옷이 우릴 발견했지만 마법 앞에서는 별거 없었다.

무사히 양털이 있을 방 앞으로 도달한 나는 코르크 마개를 뽑고 바로 구멍에다가 갖다 댔다.

황금빛 액체가 문 너머로 콸콸 넘어가다가 플라스크에 반쯤 남아 흘러가질 않아서 병을 기울여야 하나 싶었지만 금세 기화해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혹시라도 연기가 이쪽으로 넘어올까 싶어서 손바닥으로 구멍을 틀어 막고는 귀를 문에다가 대고 들어 보다가 쿵—하고 무언가 거대한 게 쓰러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문 너머로 코골이 소리까지 들려오자 안심한 나는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몇 분 정도 기다렸다가 구멍을 막던 손을 치웠다.

그래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이번엔 문을 열어 보지만 황금빛 연기는 어딜 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들어간 우리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산과 저 너머 언덕 위의 나무에 걸려 있는 황금양털을 볼 수 있었다.

'잠깐, 이건 산이 아닌데?'

덩치가 크고 색도 칙칙해서 산인 줄 알았지만 일정한 주기로 들썩이는 게 살아 있는 생물이었다.

고개를 좀 더 옆으로 돌리니 머리로 보이는 것에 촘촘히 눈이 몇십개는 박혀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는데도 느껴지는 두려움에 얼어 있었지만 에반은 이게 있으니까 방 안이 어두워 보이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에 이럴 시간이 아니라고 되새기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저 멀리 빛을 내는 황금양털에 도달하니 무언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수많은 양들이 나를 포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 이렇다니.

하지만 에반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양털을 가져왔다.

그러자 마자 오랫동안 살아온 거 같은 거목이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함정인가 싶어 바로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심하고 나는 문으로 가다가 한번 양털의 감촉을 느껴보고 싶어서 잠깐만 달라고 이야기했다.

흔쾌히 건네져온 양털을 껴안으니 부드러우면서 폭신한 게 평생 떨어지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별은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

어느새 정원에 도착한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조각상에게 양털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오오…! 이것이 있으면 왕위는 내 것이야!"

여기서도 왕위 이야기라니.

아무튼 이제는 검을 받을 시간이다.

"그럼 이제 그 검을 주지 않겠어?"

"아, 그렇군. 이 은혜를 검 한 자루로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들이 바란다면야."

말을 끝마친 조각상이 검을 떨어뜨려서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어쨌든 검은 얻었다.

마침내 검을 얻은 우리는 지하실을 가로막고 있는 왼쪽의 갑옷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건네주자 오른쪽과 마찬가지로 검을 받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스산한 분위기가 한층 더 강해졌지만 무시하고 우리는 지하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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