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계단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스산한 분위기는 점점 강해졌고, 나는 그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에반도 나와 같이 압도당한 건지 그저 심드렁한 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금방 계단을 내려온 우리를 마주한 것은 길다고 할 수 없는 복도에 양옆으로 있는 문이었다.
일단 어디 가까이 있는 문이라도 열까 싶어서 동의를 구하고자 에반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눈이 마주쳤다.
서로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계단에 가까운 오른쪽 문으로 다가갔다.
곰팡이라도 슬어서 그런지 갈색이라기 보단 검은색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썩어 있는 문.
그건 제 역할조차 못 할 정도였다.
내가 꺼림칙한 느낌에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지 않고 머뭇거리자 에반이 나섰다.
문고리를 잡자 마자 순식간에 썩어들어가는 그의 표정.
아무래도 생긴 것처럼 습하다 못해 아주 축축할 것이다.
그걸 참아낸 에반이 안의 소리를 들어 보려고 문에다가 귀까지 갖다 대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였다면 정말로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닿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듣는 시늉만 하다가 대충 들어갔겠지.
그렇게 내가 숨죽이며 쳐다보는 동안 괴물이 있는 방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그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혹시나 싶어 도망갈 자세를 취하며 조금씩 열리는 문틈 사이로 지켜보던 그는 자세를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게 드러난 내부의 모습은 중세 시대에서나 볼 법한 감옥의 모습이었다.
쇠사슬로 벽과 연결된 수갑과 철창, 그 철창 너머에는 익숙한 모습의 사람이 구금된 채로 있었다.
"존…!"
"마틴."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앉아 있던 존도 나를 발견한 건지 내 이름을 불렀다.
"몸은 괜찮아요? 그 괴물이 당신을 끌고 갈 때 무슨 마법 같은 걸 부리던데."
"으음…. 묶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전부 괜찮은 거 같아."
"다행이다."
"자, 거기까지. 설마 이대로 계속 대화할 거야?"
"흠?…허."
몇 시간 만에 만난 우리의 대화를 중간에 끊어 버린 사람은 에반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내가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니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철창에서 약간 떨어지자 손에 묻은 녹이 보였다.
'구와악.'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이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나저나 존의 반응이 이상하다.
에반이 끼어들고 나서 표정이 오묘해지더니 계속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아. 나는 만난 지 좀 지났지만 존에게는 그날 이후로 초면이구나.'
그걸 깜빡하다니.
지금 당장 에반에 대해 소개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는 와중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쳐 존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기억나는 거라도 있나? 괴물이 어떻게 생겼다던지 주문은 어떤 걸 사용하는지 말이야."
"주문? 그건 기절해 있어서 모르겠지만 생김새 하나만큼은 잘 기억하지."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덩치는 평범한 성인 남자 정도에 몸을 이루는 것은 파리와 구더기 같은 벌레들이야. 그래서 육체가 약한 건지 몰라도 걸어 다니지 못하는 모양이야."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걸 보면 그런 몸체를 유지하는 뼈대가 있는 거 같아. 그 괴물에게 이름을 붙이자면… '기어 다니는 벌레 새끼'는 어떨까?"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해. 빨리 탈출할 생각이나 하자고."
—절그럭.
존은 약간 몸을 움직이더니 수갑을 살펴봤다.
"그럼 일단 수갑하고 철창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찾아오는 건 어떨까?"
"잠깐만 기다려 봐."
그리 말한 에반은 갑자기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그리고 빠르게 넘기면서 무언가를 찾아보지만 결국 못 찾은 듯하다.
"쩝. 아무래도 마도서에는 잠금 해제 같은 편리한 주문은 없는 모양이네."
"그 말은…."
"직접 찾으러 가야지."
이렇게 나는 존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열쇠를 찾으러 방을 떠났다.
"여기는 감옥이었으니 반대편 방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야. 그래도 일단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해 봐야겠지."
에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전처럼 대부분 썩어가는 문에다가 귀를 갖다 댔다.
두 번째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눈살만 찌푸리던 나는 그가 보내는 괜찮다는 손짓에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벽에는 캐비넷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에반이 캐비넷을 확인하는 동안 나무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보려고 했지만 못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어서 내 힘으로는 열 수 없었다.
열리지 않는 상자를 계속 넘겨 가며 찾다 보니 단 하나, 열리는 상자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 한 명은 가뿐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기다란 나무 상자는 마치 관짝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열어 보자 안쪽에는 뚜껑 사이로 들어간 먼지만 약간 쌓여 있을 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성과를 이야기하려고 뒤돌아보자 어느새 수색을 끝마친 에반이 소리 없이 내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화들짝 놀라기엔 여기에서 심력이 상당히 단련된 나는 어깨만 살짝 움찔했을 뿐 소리 지르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깜짝 놀라게 왜 뒤에 가만히 서 있어요."
"잘하고 있나 지켜보고 있었지."
"상자는 많은데 열리는 건 여기 이 상자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이렇게 말하고 캐비넷으로 가는 그를 따라가자 활짝 열려 있는 캐비넷이 있었다.
하나에는 누구의 옷인지 여러 벌이 빽빽이 걸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숨으라고 만들어 둔 것처럼.
'…음?'
나는 한번 캐비넷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봤다.
공기라도 통하라고 만든 건지 가로로 길게 뚫려 있는 여러 구멍 사이로 에반이 보였다.
"그래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 구멍 사이로 저 보여요?"
"음, 집중해서 보면 당연히 잘 보이지."
역시 게임에서나 발견하지 못하는 거지 현실은 다른 건가 생각하다가 괴물의 특징을 떠올렸다.
분명 몸체가 벌레로 이루어져 있어서 걸어 다니지 못한다고 했었지.
"그 괴물은 기어 다니니까 여기 숨으면 못 찾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 괴물에게 쫓긴다면 여기가 숨기 좋은 장소같네. 마침 숨을 곳도 두 개나 있고."
캐비넷에서 나온 나는 다시 한번 나무 상자를 쳐다 봤다.
우연의 일치인지 딱 두 명이 숨을 만한 공간이 있다니.
"하지만 여기엔 목표인 열쇠가 없네."
"그럼 이번엔 감옥 옆방으로 가 볼까요?"
"그래."
나무 상자들을 뒤로하고 이번엔 옆방 앞으로 와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에반과 그걸 지켜보는 나.
이번에도 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간 그를 따라서 들어가자 거무칙칙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게 도대체 뭔지 자세히 살펴보니 파리와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괴물의 손에는 만년필이 들려 있었고, 만년필은 종이 위를 돌아다니며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낀 건지 그것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함몰된 건지 푹 파여서는 블랙홀처럼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거 같았다.
그런 괴물 옆 책상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고, 그걸 마지막으로 에반이 문을 닫으면서 우리는 감옥 반대편 방으로 도망쳤다.
캐비넷으로 들어가라는 목소리에 나는 바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에반이 상자에 숨으면서 뚜껑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콰앙—하며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꺼림칙한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두 번 들리고 마침내 이곳까지 괴물이 찾아왔지만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에 천천히 캐비넷 문을 열어 보자 바닥에는 괴물이 돌아다녔던 흔적인 뭉개진 벌레와 구더기가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위쪽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불행 중 다행이네요. 방금 괴물이 있던 방에 열쇠 같은 게 반짝였던 거 같은데 한번 가볼래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겠지. 빨리 가자."
혹시나 우리가 숨은 걸 알고 나오게 하려는 기만책은 아닐까 조심히 복도로 나왔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기 왼쪽에 문이었던 나뭇조각들을 밟으며 괴물이 있던 방으로 들어가니 열쇠 두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 괴물이 어떻게 열쇠를 책상 위에 둘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마법이라도 사용했거니 싶어 무시하고 바로 감옥으로 향했다.
철창 문을 열고 두꺼운 수갑에 있는 열쇠 구멍을 찾아 열쇠를 넣고 돌리자 수갑이 풀렸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뻐근했던 모양인지 일어나서 허리와 손목을 스트레칭하자 우드득하면서 뼈 소리가 들렸다.
존은 괜찮아진 건지 이제 탈출하자면서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계단 위쪽에서 스윽스윽하며 기어 다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철컥철컥.
설마 2층에 있는 모든 갑옷들을 총동원한 건가 기겁했지만 들려오는 발소리는 그것보다 적었다.
아마도 두 개 정도일까.
'그렇다면 아마 지하실 입구를 가로막던 그 갑옷인가?'
지금은 이럴 시간이 아니다.
옆에 있던 존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지만 나와 에반이 긴장하는 모습에 순탄하게 넘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어쩌죠? 일단 방금처럼 나무 상자가 있던 방으로 들어가서 숨을까요?"
"거긴 두 명밖에 숨을 곳이 없잖아. 도박이긴 하지만 들어가지 않은 그 방으로 향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만약 숨을 곳이 없다면요?"
"그렇다면—"
에반이 들고 있던 마도서를 펼쳤다.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