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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55화 (55/154)

〈 55화 〉 런던에서 일어난 일

* * *

머리가 지끈거린다.

펼친 마도서 사이로 촉수 같은 것이 기어 나와 팔을 잡는 느낌이 들지만 고개를 내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싸우는 건 하책이니 일단 빨리 가서 숨어요!"

"그래. 가능하다면 싸움은 피하는 게 좋지."

"알았어. 부디 숨을 곳이 있길 바래야지."

'없다면 전부 죽여 버리고 말이야!'

우리들의 목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치지만 모두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괴물이 있던 방의 건너편으로 향한다.

나도 계속 죽여 버리라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자—

"우욱!"

"윽, 이게 무슨…!"

—눈이 도려내진 시체, 척추와 창자가 드러난 채로 하반신이 없는 시체, 등이 전부 갈라진 채로 폐가 마치 날개처럼 나와 있는 시체 등.

온갖 기괴하게 죽은 시체들로 가득한 방이었다.

그곳에서 맡을 수 있는 혈향에 점점 들려오는 목소리는 커지지만 무시하고는 숨을 방법을 강구했다.

"저 시체 안으로 들어가서 숨어야 하는 건가."

"진심이세요?"

"마틴, 방법이 없어."

'불에 타 죽은 시체와 번개에 맞아 죽은 시체를 추가하는 것도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해야 시끄럽게 구는 목소리를 안 들리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옆에 있는 둘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상관없으니까.

—철컥철컥.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철갑의 발소리에 브라운은 힘껏 용기를 낸 것인지 시체를 밟고 한 걸음씩 들어가면서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우윽. 뭔가 물컹한 게 밟혀서 터진 거 같은데. 흐악!"

"참고 계속 들어가. 나도 곧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브라운과 존이라는 사내처럼 시체 안으로 파고들자 옆방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마터면 그 상자가 정말로 관이 될 뻔했다.

옆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피가 흘러 들어올까 봐 입을 열지 못하는 건지 아무 말도 없다.

그저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시끄럽게 죽이라는 소리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방에서 부수는 소리가 멈췄다.

그러고는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엄청난 소리와 함께 무언가 파괴되었다.

아마도 문이겠지.

그렇게 방에 들어온 갑옷들은 방금처럼 우리가 숨어 있는지 찾으려고 시체들을 베고 찔러댔다.

살가죽과 근육을 베는 소리, 단단한 뼈를 부수는 소리.

푹푹 찔러대며 확인하는 것에 조금 더 아래로 파고들지만 갑자기 허벅지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윽!'

마치 달궈진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것만 같은 고통에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자 피와 자그마한 살점들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혀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에 점점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잠시 시야가 암전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주문을 영창한 내가 벌떡 일어나서 갑옷 하나에게 번개 화살을 날린 직후였다.

이젠 모르겠다 싶어 다른 주문을 영창하며 내게 달려드는 갑옷의 공격을 막으려 마도서를 들어 올렸지만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갑옷이 휘청거렸다.

—깡!

어느새 빠져나온 존이 기다란 뼈로 투구를 후려친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평소보다 배는 더 빠르게 주문을 외운 나는 이상함을 느낄 시간도 없이 갑옷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주문 : 요그소토스의 주먹

손을 그대로 꽉 쥐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내 동작을 따라 하는 듯이 갑옷이 우그러진다.

이제는 철봉처럼 보일 정도로 압축된 갑옷을 그대로 놓자 당연하게도 다시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안심한 나는 마지막으로 상대할 괴물 녀석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할 주문을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분명 마법사였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던 와중 갑자기 무언가 느껴졌다.

마치 감각이 비대해진 것처럼 옆에서 날카로운 것이 찔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심해!"

"뭐, 윽!"

나도 모르게 올라간 손은 찔러져오는 검을 향해 마도서를 들어 올렸고, 막아 낸 검을 옆으로 흘리며 분명히 내가 쓰러뜨린 갑옷을 발로 밀어내자 흉갑 부분에 점점 사라져가는 그을음이 보였다.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없음에도 보이는 흉흉한 붉은 안광에 한 걸음 물러섰지만 나는 마도서를 펼치며 싸울 준비를 마쳤다.

"갑옷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는 저 괴물만 상대해!"

방금 나를 도왔던 존은 외투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아직까지도 숨어 있는 브라운을 불러냈다.

"브라운, 빨리 나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네요."

존과 똑같이 적당한 길이의 뼈를 들고 일어선 브라운은 무섭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성이 브라운이고 이름은… 아마 마틴일 텐데. 어째서 이번엔 성으로 불렀지?'

저 눈빛을 괴물이나 갑옷이 아닌 존에게 보내는 걸 보면 아마도 화가 났을 때 저러는 걸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지금은 저 녀석을 끝장내버릴 주문을 떠올릴 것.

옆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는 무시하고 대마법을 위한 기나긴 주문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말하면 말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며 내부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살인을 하라며 종용하는 목소리가 아닌 나를 따라 하는 것처럼 빠르게 주문을 외우는 게 훨씬 더 숙련된 마법사처럼 보인다.

질 수 없다는 마음에 더욱 주문에 박차를 가하자 좁아졌던 시야가 이제는 완전히 암전되었다.

그런데 나와 내면의 목소리 말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

인간의 구강 구조로는 전혀 따라 할 수 없을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 영혼을 강타하며 불태우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아내며 영창을 이어가자 내게 말을 건 존재가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아아—, 인간은 오랜만에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군. 하지만 그걸 참아내다니, 접촉 주문도 없이 나와 연결될 정도로 파장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인가?'

이제는 목소리가 하나 더 늘어난 건가 싶어 무시하자 그 존재는 말을 이어갔다.

'흠? 호오, 과연 그런 거였군. 그 분께서….'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던 그것은 갑자기 내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넌 그 분께서 내린 시련을 통과하는 중인가 보구나. 나도 흥미가 생겼으니 너에게 약간 축복을 내려주마. 위대하신 분께서 실망하실 수도 있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주지만, 이 정도면 저깟 벌레는 금방 태워 버릴 거다.'

'당신은 도대체— 윽!'

'내 이름은 ■■■. 타오르는 재앙, 살아있는 불꽃이다.'

어느새 주문을 끝마친 내가 정체에 대해 묻지만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먼지보다도 작은 파편이 심장에서 느껴진다.

타오르면서 파직거리는 파편이 한번 요동치자 뜨거운 용암 같은 기운이 온몸을 지나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전능감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뜨인 눈으로 보인 것은 내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의 화염구였다.

눈에서 흐르는 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저기 뒤에서 갑옷들을 조종하며 놀고 있는 녀석을 조준한다.

주문 : 살아있는 불꽃의 분노

방금 느꼈던 존재감을 생각한다면 분노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오만해 보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불덩이를 몸으로 막으려던 갑옷을 지나쳐 괴물에게 닿자 순식간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는 잿가루만 남겼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처참했다.

전능감으로 가득했던 몸에 탈력감이 밀려오면서 머리와 눈, 코, 귀, 식도 등 어디 하나 불타오르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두 녀석들은 시체 사이로 파고든 것으로 인해 묻은 피 때문에 내가 피를 토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점멸하는 시야 속으로 보인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

괴물을 쓰러뜨린 것에 기뻐할 틈도 없이 우리는 도망쳐야만 했다.

이 세상을 유지하는 존재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이 세상도 무너지는 것일까.

지금 나에게 그런 생각은 사치다.

"젠장. 어서 빨리 뛰어!"

두통을 호소하던 에반은 아무래도 기절한 것인지 나와 존이 부축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에 호기심이 발동해 뒤돌아봤지만 점점 더 빨라지는 붕괴 속도에 나는 더욱 속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부축한 에반을 이끌고 로비까지 나왔지만 방금 죽은 괴물이 최후의 발악으로 명령을 내린 걸까.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인형들이 갑작스레 공격하며 붙잡으려 했다.

존이 권총을 마구잡이로 발사해도 족족 머리에 맞추는 거에 신기해 할 틈도 없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인형을 털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힘든 구간인 계단을 간신히 올라 액자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자 이번엔 뒤쪽에서 갑옷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철컥철컥!

하지만 무시무시한 기세의 갑옷들은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균열에 삼켜져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부서졌다.

어떻게 액자까지 도착하니 양옆으로 다가오는 균열과 반쯤 파괴되어 지금도 실시간으로 붕괴되어가는 갑옷이 보였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향해 몸을 던지자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멈추고 우리는 사무실 안에 쓰러져 있었다.

옆에 에반이 있지 않았다면 꿈으로 여겼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경험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경악할 만한 일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 경험은 재밌었나?"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파가 갑자기 돌아가면서 앉아 있던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평범하게 잘생긴 동양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의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어헉, 후우. 뭐?"

"달려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이해한다. 너희들이 없는 동안 벽에 액자를 걸어두었는데 어떤가?"

"이딴 그림은 불태워야 잠자리가 편해질 거 같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나는 당당하게 대꾸하는 존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다.

"존, 혹시 이 사람이…."

"그래."

이 사람이 예전에 말했던 모든 것의 흑막인가?

저 눈동자를 제외하면 특출난 것은 없어 보이는 인상인데.

"반갑구나. 존 왓슨과 마틴 브라운."

"너는 이게 반가운 표정으로 보이나?!"

"넌 조용히 하도록."

그가 한번 손짓하자 존은 마치 입에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질문하자 들려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도대체 저희에게 바라는 게 뭐죠?"

"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존에게 못 들은 건가? 모두 내 재미를 위해서일세."

그렇게 말한 그는 우리 사이에 엎어져 있던 에반을 마법 같은 거로 끌고 와 소파에 앉혔다.

어이없는 대답에 내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은 나중에 주도록 하마. 그림은 태우지 말고."

"이봐! 이 개자식아!"

어느새 입이 열린 존이 욕지거리를 하지만 소파에 앉아 있던 그와 에반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나의 관광 첫째 날은 최악의 날이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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