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57화 (57/154)

〈 57화 〉 외전 ­ 하윤이의 일상

* * *

내 앞에서 벌벌 떠는 이 녀석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의 교단의 교주다.

물론 심약해 보이는 모습이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 우리 마을에 교단이 세 개 정도인가?

사람들을 몰래 납치해서 의식을 치른다던가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친구를 건드려서 한번 제대로 분노한 적이 있었다.

'분명 검은 양 교단이랑… 무슨 지혜 교단인가?'

본보기로 규모가 큰 두 교단을 조지고 이 녀석이 주교인 교단도 반쯤 파괴해 버리니 알아서 설설 기고 있다.

"…그동안 한 의식들은 이게 끝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동물만 제물로 썼지 사람은 절대 납치한 적이 없어요!"

"그럼 며칠 전부터 나오는 뉴스는 뭔데."

"그, 그건…."

"가스 누출 사건하면 국룰 아니냐?"

"어, 그게 저는 신조어를 잘 몰라서…."

"스스로 잘 알아 들어야지! 주문 맛 좀 볼래?"

"죄송합니다!"

주문이라도 사용한다 말하니 이곳이교회였던 것이 된 날이 기억난 모양이다.

내가 미친년도 아니고 대낮에 건물을 파괴할리도 없는데 이 새끼는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마법사들이 꼭 그러잖아. 레퍼토리가 부족해서 그런지 맨날 가스 누출 사고니 뭐 그러지만."

"예에…."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시간이다.

예전에는 의식이 완성되기 전에 구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찾기도 전에 살해당할지도 모르니까.

"물론 저도 하윤님이 이 마을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렇고 피곤하실 텐데 새벽에 순찰을 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내가 순찰다니는 건 잘도 지켜보면서 마을에서 사고 치는 흑마법사 하나는 제대로 못 찾는다?"

"예?"

"날 칭찬하면 기뻐하면서 어영부영 넘어갈 거 같았냐?"

"아닙니다!"

"처신 잘하라고."

순찰할 때 몇 번 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너무 약해서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여기 교단의 흑마법사였나.

그나저나 주문으로 기척도 줄이고 은신한 나를 발견할 정도이면 사고 치는 흑마법사는 왜 못 찾지.

'혹시 여기 안쪽에 숨겨 준 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 기감에 걸려들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니 협박을 하던 몰래 숨어들던가 해서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야."

"네?"

"여기 안쪽 좀 살펴보자."

"그, 의식을 치르고 나서 청소를 하지 않아가지고 좀 더러운데…."

"그럼 니 피로 더 더럽혀줄까? 아니면 건물도 같이 소각해서 청소해 줘?"

"아닙니다. 바로 가시죠."

교주 녀석의 말이 좀 수상하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의식장은 실제로 너무 더러웠다.

제단 위에 올려진 염소와 양의 시체는 구더기가 꾸물거리며 파먹고 있었고, 사방팔방으로 튄 핏자국은 이미 검게 굳어서 닦아도 흔적이 남을 것만 같았다.

"너네는 의식을 치르고 청소 안 하냐?"

"이것도 어찌 보면 의식의 한 과정이어서…."

"그냥 청소하는 게 귀찮은 건 아니고?"

코를 찌르는 악취에 눈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살펴보지만 누군가 숨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식은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

녀석의 말로는 지식을 얻기 위해 공양을 하는 거라는 둥 말하지만 굳이?

'내가 그냥 금수저를 타고 나서 그런 건가.'

어릴 때 할머니네 집에서 찾은 낡은 고서.

한글이 아닌 이상하게 생긴 언어를 알아보고 호기심에 따라 해봤었지.

그렇게 신 님을 만나고 주문도 배우고 이상한 일도 많이 휘말렸었고.

어릴 때 울먹이면서 강림 주문을 쓴 건 평생 잊지 못할 흑역사이기도 하다.

잊을 만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이불을 한 달에 한 번 씩은 수선하고 있고.

아무튼, 나와 출발점 자체가 다르니까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야지.

나는 제단 근처를 돌아다니며 피범벅이 된 바닥에 발자국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싶어 찾아보다가 어떤 책을 발견했다.

영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슨 연극을 위한 대본같다.

'제목이… 노란 옷의 왕?'

특이한 이름이네.

그렇게 내가 책을 들여다보는 와중에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교주가 아는 체를 해 왔다.

"아! 그 책은 저희 교단이 독일에서 어떻게 가져온 책입니다. 옛날에 연극을 한 사람들이 정신 착란으로 모두 사망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데 아직까지도 불태워지지 않은 책이 있더라고요."

"정신 착란? 그럼 아무래도 이쪽 관련된 건가 보네."

"저희도 아직 어떤 존재와 관련된 건지 알아내지 못해서 지금 연구 중입니다. 괜히 따라 했다가 알고 봤더니 강림 주문이면 몰살 아닙니까."

"이런 거 연구할 시간에 마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흑마법사나 관리하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지."

"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뭐? …에휴, 그럼 지금부터 신경 쓰도록 하고."

연극의 1장을 넘기고 2장을 읽다 보니 무언가 정신을 쿡쿡 건들려는 느낌이 들었다.

못 알아보는 거 이대로 읽어 봤자 쓸 데도 없을 테니 덮어서 원래 있던 자리에다가 내려 두었다.

그래도 나가기 전에 한 번만 더 확인해 볼까.

봉인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마력에다가 의지를 실어 발을 크게 구른다.

—쿠웅!

그러자 퍼져나가는 마력의 파동이 이 방을 포함한 다른 지하로 퍼진다.

여기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지진이라도 난 걸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들어오면서 본 사람은 모두 교단의 사람이었으니 상관없겠지.

돌아오는 파동을 감지하면서 수상한 건 없나 확인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쯧. 여기서 볼일은 전부 한 거 같네."

"그럼 가시렵니까?"

"왜? 안타깝냐?"

"아뇨, 뭐. 첫 만남이 그러지만 않았어도 좋은 관계가 됐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럼 다음엔…."

나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알아 들을 거 같지도 않아서 그냥 포기했다.

"아니다. 아무튼 마을 좀 잘 지키고. 여기 교단도 마을의 일부분이잖아?"

주교의 어깨를 치면서 의식장을 나오니 신선한 공기가 맛있다.

"만약 흑마법사 찾으면 연락하고."

그러고 주교실을 나오니 기도라도 하러 온 것인지 사람이 더 늘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없지만 소문이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퍼지는 법이니 그냥 창문으로 나가야겠다.

뒤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주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건물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퇴근하기엔 시간이 남았지만 그 전에는 들어가야겠지.

마트에 들러 내일 하유가 먹을 간식을 구매한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복도 너머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닫힘 버튼을 연타해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오늘은 어딜 순찰할까 생각하다 보니 금세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었다.

—삑삑삑 띠리링!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TV를 보는 건지 소리가 들려온다.

"하유! 오늘 학교는 어땠어."

"응? 오늘은 체육 시간에 피구했어!"

"그렇구나. 여기 간식 사 왔으니까 내일 학교 끝나면 먹어. 밥 먹기 전에 먹으면 엄마한테 혼나는 거 알지?"

"당연히 알지."

그렇게 말한 하유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는 TV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게 그렇게 재밌나 생각하며 과자가 든 봉투를 식탁 위에다가 두고 방에 들어가 가방을 책상 근처에다가 던졌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오늘 올라온 실종 사건 기사를 살펴본다.

'아파트 근처 공원이라. 오늘은 그쪽 근처를 순찰할까.'

기사에 따르면 실종자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실종 장소를 밝혀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며칠 전 일어난 실종 사건이라는 거겠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다가 추리한 것들을 적었다.

영화 같은데 보면 지도를 인쇄해서 실종 장소에다가 핀을 꽂아 두고 실로 이어두던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탐정도 아니고 따라 한다고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저 내게 중요한 것을 지키고 사고를 예방하는 것뿐이다.

'신 님은 애초에 건들 수 있을 리가 없고, 가족은 집에 결계를 쳐두었으니 누가 들어온다면 방호 주문과 함께 내게 연락이 오지만 문제는 친구들이지.'

과거에 내게 도움받은 기억이 있으니 이번 사건도 이쪽 세계와 관련된 것을 알고 스스로 조심하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평소에는 느끼지도 못했던 직감이 이제 와서 난리 치는 느낌이다.

이걸 그냥 무시해야 할까?

"으음."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니 엄마가 퇴근했는지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식탁 위에 과자를 아직 정리 안 했는데.

나는 하고 있던 고민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방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어. 과자는 사 왔으면 정리해야지."

"지금 그러려고요."

하유의 손이 닿을 높이의 서랍에다가 과자를 쑤셔 넣고 봉투는 대충 묶어서 보관하니 금방 엄마가 안방에서 나왔다.

슬슬 저녁 시간이니 단서만 정리해 두고 요리나 도울까.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정리한 단서가 적힌 노트를 뜯어서 화이트보드에다가 자석으로 붙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

저녁을 먹고 단서를 살피며 딴 짓도 하다 보니 벌써 12시가 가까워졌다.

하유는 이미 잠들었고 부모님도 슬슬 잠들 시간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나는 아직 안 자고 있을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하윤 : 뭐 해?]

영상이나 보면서 문자 옆에 있는 1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벌써 잠든 건지 아니면 아직도 밖에 있는 건지 답장이 없는 것에 약간이지만 불안을 느끼며 책상 아래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운동화 한 켤레와 녹이 벗겨진 청동 단검이 들어 있었다.

창문을 열고 걸쳐 앉아서 신발을 신고 단검은 품에다가 숨겨 놓은 뒤 주변을 둘러본다.

납치 사건으로 인해 아무도 없는 거리에 안심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가속도와 함께 거세지는 바람을 느끼다가 주문으로 발판을 만들어서 속도를 줄여나가서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그럼 이제 순찰 시간이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