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쥐
* * *
이브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다가 감시용으로 둔 별의 흡혈귀.
그걸 깜빡 잊고 에반과 브라운이 개고생 하는 걸 구경하려고 시간을 돌려놨다가 이제서야 회수하러 찾아왔다.
그동안 내가 허락도 안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텐데 삐쩍 말랐을까.
옥상으로 이동한 나는 병원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별의 흡혈귀를 불러냈다.
그러자 사람이 없는 방에서 촉수로 창문을 열고는 이쪽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움직임이 둔해진 거 같은데….'
배고파서 그런 걸까 생각하던 나는 눈앞에 나타난 별의 흡혈귀의 모습에 이유를 알아차렸다.
평범한 성인 남성의 팔뚝 정도 굵기의 촉수는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굵어졌고. 촉수가 튀어나온 몸통은 자그마한 크기에서 2배 정도 더 성장했다.
사람들을 습격해 흡혈한 건지 수혈팩이라도 몰래 훔쳐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전부 알게 되겠지.
가져온 병에다가 녀석의 기억을 추출해서 담고 나서 돌려보내고는 저택으로 이동했다.
검다기 보다는 어둡다는 게 더 어울리는 거 같은 액체가 찰랑이는 병을 탁자 위에다가 올려 두고 화신을 해제했다.
이제 런던에서 관광하고 있을 존과 브라운을 조금 관찰하고 리셋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을 때는 이상한 게 기어 다니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공간까지도 벌레가 돌아다니는 건가 생각도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무언가 달랐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미라처럼 생긴 사람이 손이 으깨진 채로 기어가는 게 아닌가.
하윤이도 교복을 입은 어떤 여학생을 안은 채로 울고 있고.
'선 넘네….'
상황을 보면 저 벌레 같은 녀석은 아무래도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하윤이에게 참교육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하윤이를 눈물 흘리게 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저 연약한 육신이 터지지 않도록 주문으로 붙잡아서는 이쪽으로 가져왔다.
"으아악!"
녀석은 나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딴 실력으로 하윤이 친구를 죽였다고? 믿기지가 않는데.'
내가 미라 같은 놈을 하윤이 옆에 내려놓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울기만 하길래 먼저 말을 걸었다.
"흠, 어째서 침입자가 있나 했더니 하윤이 너였구나."
그런데 하윤이가 여긴 어떻게 온 건지 생각하다가 바닥에 놓여 있는 익숙한 단검이 보였다.
'저건 분명 내가 주문을 새겨 둔 단검인데. 저것도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었나.'
처음 만든 거다 보니 약간 허술했나보다—추측하고 있을 때 불쾌한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도대체, 도대체 누구냐!"
벌레보다 못한 것이 시끄럽게 구는 게 짜증 나서 금방이라도 터뜨려 버리고 싶었지만 하윤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직 모르니 유예를 주기로 했다.
"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삼류도 못 되겠네."
그리 말하며 하윤이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옆에 있던 벌레 같은 놈도 똑같이 따라 했다.
그제서야 이 우주 같은 배경이 장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몸을 벌벌 덜기 시작했다.
"신 님."
"아아, 그래."
나와 눈이 마주친 하윤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잠깐! 나는 그저—"
녀석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처음 생각했던 방식으로 집행했다.
—푸확!
신문지를 돌돌 말아서 때린, 혹은 구두 밑창으로 짓밟은 벌레처럼 내장이 튀어나온 채로 터져 죽은 시체의 위로 떠 오르는 영혼을 붙잡았다.
'이 녀석에겐 조금만 더 고통을 줄 겸 해서 실험이나 하나 진행해볼까.'
일단 하윤이와 저번에 본 거 같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학생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옆에 떨어진 단검을 지구로 돌려보낸다.
이제 리셋만 하면 실험은 시작이군.
[엔딩 슬퍼하는 소녀]
이번 지구, 지구006이던가.
이브를 거두어들일 때 생각했다.
지구의 시간대에서 벗어난 공간에 머무른 채로 지구가 리셋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구에서 그 존재가 사라질까, 아니면 다른 대역이 생겨날까, 혹은 영혼마저 똑같은 복사본이 생겨날까.
이브에게는 내 문장이 새겨져서 정확한 실험값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다른 실험체를 어디서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좋은 게 굴러들어왔다.
울부짖는 영혼이 시끄러워 작은 병에다가 넣고 코르크로 막으니 이제야 좀 괜찮아졌다.
그럼 이제 나머지 할 일을 마무리 할까.
***
저택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을 수는 없으니 화신체로 방에 들어온 나는 기억이 담긴 병을 들었다.
이것만 보고 나서 역병 의사로 비밀 단체를 위한 기반을 만들러 돌아다녀야지.
금방이라도 병에서 나와 떠다닐 것만 같은 액체를 바라보다가 공부하고 있을 이브에게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내가 준 마도서와 낑낑대며 씨름하는 이브가 보였다.
연필의 끝부분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뭐가 어려운지 한 페이지를 붙들고는 계속 읽고 있었다.
주문의 발현은 간단해도 개념에 파고들다 보면 어려울 테니까.
집중하느라 노크 소리도 못 들은 이브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 책상에다가 병을 내려 두니 이제서야 내가 들어온 걸 알아차렸다.
"아, 오셨어요?"
"그래."
"병에 든 건 뭐예요?"
"며칠 전에 내가 소환했던 별의 흡혈귀는 기억나니?"
"그 투명한 거요? 당연히 기억나죠!"
"그것의 기억이란다."
내가 그리 말하자 병에 든 액체 같은 물질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 봤다.
"제가 영화에서 봤던 거는 은색이었는데."
"음? 그런 영화가 있느냐?"
"네. 거기에 마법 학교도 나오고 그래요. 혹시 실화 바탕인가?"
마법 학교라니.
확실히 있을 법한 장소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와는 주제에서 벗어났다.
"아무튼 이거나 빨리 살펴보자꾸나."
그렇게 말하고 코르크를 뽑자 안에 들어 있던 액체 같은 무언가는 중력을 거스르고 한 방울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공중에 흩뿌리듯이 팔을 휘둘러서 영화 스크린처럼 만들고는 들어 있는 기억을 재생시켰다.
혹시 시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판별하는 것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다.
처음은 옥상에 있는 나와 이브가 장면에 비춰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온 의사의 목을 졸라 흡혈하는 장면도 나왔다.
불필요한 장면은 굳이 볼 필요도 없으니 빠르게 넘기다가 갑자기 이브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아!"
"부모님이라도 나왔니?"
"네. 저기 양복을 입은 금발 남성이요."
빠르게 지나갔던 장면을 되감아서 이브가 말한 사람을 찾아냈다.
'병원에서 피만 빨아 먹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실히 일하기도 했네.'
이브의 주치의였던 의사.
이름이 패트릭이던가.
아무튼 그 의사와 남성의 대화를 들어 봤다.
자기 딸이 사라졌다는데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냉철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정신 쪽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옆에 있던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걱정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대상은 자신의 혈육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였다.
기억을 통해서 보는 게 아닌 직접 보는 거라면 머릿속이라도 들여다 볼텐데.
아무튼 간단하게 대화가 끝나고 이브는 실종 처리 되었다.
이후로는 임무를 끝마친 별의 흡혈귀가 피 냄새는 어떻게 맡은 건지 밀봉된 수혈팩을 찾아서 몰래 뜯어서 먹는 일밖에 담기지 않았다.
나는 혹시 이브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 조심히 고개를 돌려보지만 딱히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모습이다.
재생되던 기억이 끝나자 고개를 돌린 이브와 눈이 마주쳤고, 설마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냐면서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설마 제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부모님이랑 놀았던 거는 어릴 적이라 그런지 흐릿한 기억밖에 없거든요. 대부분이 병원에 누워 있는 기억 뿐이라서 그런가?"
"그럼 다행이구나."
정을 쌓아온 시간이 별로 없어서 충격도 그만큼 적은 것인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슬슬 중세 시대로 떠나볼까.
"쉬는 시간은 여기까지다. 이제 다시 공부하렴."
"네에? 조금만 더 쉬면 안 돼요?"
"얼마나 더 쉬고 싶은데?"
"음…. 30분?"
"그럼 그렇게 하려무나."
나는 다시 한번 쉬고 나서 공부하라고 당부하고는 문을 나섰다.
그리고 화신체를 해제해 본체로 돌아와 지구를 살펴봤다.
벌써부터 존재감을 뿜어내는 피라미드를 지나 유럽 부근을 살펴본다.
드넓은 밀밭과 풍차,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농부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곡식을 노리며 돌아다니는 쥐까지.
전염병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다.
내가 역병 의사로 풍차 꼭대기에 나타나니 옷깃을 살랑살랑 스쳐 가는 바람이 느껴졌다.
너무 독한 병은 전염성이 떨어지니 적당히 할까.
풍차에서 내려가 밀밭 옆에 난 길을 걸으며 창고로 보이는 곳을 찾아갔다.
몰래몰래 밀알을 하나 까먹다가 사냥개에게 걸려서 물려죽는 쥐.
'여기 어딘가에 쥐구멍이 있겠네.'
세게 물면서 확실히 쥐를 죽이는 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목숨 아까운 것도 모르고 곡식을 훔쳐먹는 쥐들이 보였다.
그런 쥐를 나는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역병을 품은 벌레를 하나 꺼내 물도록 시켰다.
—찍!
고통을 느낀 쥐는 화들짝 놀라서는 먹던 곡식도 두고 쥐구멍으로 도망갔다.
그럼 이제 역병이 펴지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