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역병
* * *
"나에게는 목적이 있어. 물론 엄청나게 중요한 건 아니야. 그저 내 재미를 위한 것이지."
"그 목적을 위해선 제가 필요한 거고요?"
"눈치가 빨라서 좋군."
한순간 들었던 전 세계적인 규모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
그거 때문에 역병도 퍼뜨리고 여러 귀족도 찾아다녔지.
결국 전부 만나기 전에 죽어 버렸지만.
지금도 의학이 발전하면서 의사들이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그런 것도 모른 채 신벌이라 떠들면서 고행단에 합류하기도 했다.
감염된 사람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튄 피 덕분에 감염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고, 고행단은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니까 더욱 피해가 심각했다.
그런 광기의 행렬을 간신히 피해간 이 도시가 운이 좋은 거겠지.
역병이 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의사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만일 환자가 생겨나면 적극적으로 격리한다.
물론 격리한 사람은 병으로 죽거나 굶어 죽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중세 시대에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까지 귀한 거는 아니니까.
아무튼 오는 사람은 막고 나가려는 사람도 막으면서 저축한 식량을 풀어가면서 버티는 와중에 영지의 주인인 귀족의 장남이 역병에 걸렸다.
역병을 간신히 막아 낸 귀족은 어이가 없다 못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겠지.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의 작위가 뭐지?"
"예? 그걸 알고 상속자인 제게 찾아온 게 아닙니까?"
"마침 눈에 띄는 도시가 있길래 찾아왔지."
"허어. 저희 아버지는 백작입니다. 사람들은 성주님이라고 부르지만요."
"백작이라."
내가 유럽의 작위는 잘 모르지만 영지의 크기를 보면 높은 쪽에 속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널 치유해주고 너희 가문의 부흥을 위해 약간의 힘을 쓰겠다."
"들을수록 대가가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 그리고 그 대가 중 하나는, 너희 가문의 장남은 언제나 병약할 것이라는 거다."
"예?"
죽을 거 같지만 죽지는 않는 상태.
그래야만 나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마법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행정이라던지 여러 가지를 배우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할 텐데.
나는 입을 벌리면서 경악해 하는 청년의 가슴팍에다가 손을 올려 두고 치유의 힘을 썼다.
병마는 몰아내지만 줄어든 근육과 면역력은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고 나서 잠시 녀석의 눈을 가리고 본체의 일부분을 지구로 강림시킨다.
천장에서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기다란 촉수가 하나 내려와서 심장이 있을 부분을 향해 파고든다.
그리고 문장과는 다른 낙인을 영혼에다가 심는다.
"안심하거라. 조심히만 지낸다면 갑작스레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장남이 아닌 차남을 후계자로 지목하지는 말고. 모든 자식이 태어날 때부터 허약해질 운명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 그런…!"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어야겠지. 이 경우에는 건강을 잃었으니 다른 재능을 부여해야겠군. 우선순위라는 게 있지만 장남이 너무나 무능력하면 나중에 작위를 물려 받지 못할수도 있으니까."
"그런다고 해서 수지타산이—"
"이 정도면 꽤나 선심 쓴 거 같은데. 지금 너가 죽어 가고 있던 몸이라는 걸 잊은 게냐."
"아."
"내가 아니었으면 자식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내게 감사해야 옳지 않겠나."
"끄응…. 가,감사합니다."
반강제적으로 설득을 마친 나는 목적을 위한 다른 목표를 찾으러 떠나기로 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오랬동안 누워 있었으니 지팡이를 쓰는 것도 잊지 말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비밀 결사를 채울 인원을 포섭하러 가야겠군.
역병으로 인해 마녀 사냥이 주춤하긴 했으나 몇 년이 지나 잠잠해진다면 역병으로 인한 울분을 풀어낼 대상이 필요할 테니 더욱 성행할 테지.
성당에서도 지금은 잠잠하지만 이단 심문관은 언제나 칼을 갈고 있을 터.
가능하다면 마법사나 마녀 본인을, 못 잡으면 그들을 몰래 후원하던 귀족을 처형하고 돈을 배분할 것이다.
가끔씩은 무고하면서 부유한 사람을 잡아 고문하거나 해서 처형할 것이고.
지금도 마법사들은 그들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긴 하겠지만, 아직까지도 떠돌아다니면서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들도 그 수가 많다.
결국 마녀 사냥으로 인해 현대에 가까워져서는 대부분이 마법사들의 사회로 숨어들었지만.
그런 마법사들에게 배척받는 흑마법사는 답도 없겠다마는.
아무튼 내 목적은 그런 마법사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안전한 곳에서 뛰쳐나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만약 그 귀족이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라면 다음날 그들이 머무는 방에 이단 심문관이 문을 박차고 들어갈 테니까.
어떻게 집안을 조사해서 괜찮다고 판단하고 접근해도 마법 자체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들에게 백작이란 말을 가진 내가 접근한다면?
처음에는 경계하겠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좋다고 달려들겠지.
그런데 내가 상상하던 비밀 결사는 흑마법사들이 가득한 집단이었는데 뭔가 반대로 된 거 같다.
'뭐, 어떻게든 설득해야겠지.'
나는 근처에서 가장 마력을 많이 보유한 사람을 찾아 근처로 이동했다.
길조차 나지 않은 산은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로 인해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건 주문이군.'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사람이 오지 못하도록 막은 건가.
내가 주문을 무시하고 조금 더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근처 나무나 바닥에 함정처럼 주문이 깔려 있었다.
여기까지 들어온다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테니 당연한겠지.
시험 삼아 주문에 이어져 있는 실을 건드려 보니 갑작스레 나무가 일어나면서 눈을 뜬다.
그러면서 입을 벌리자 뾰족한 나뭇가지가 이빨처럼 마구잡이로 나 있었다.
하지만 일어난 나무 골렘 같은 것은 주변을 살펴보더니 갸우뚱거리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지팡이에 새긴 주문이 전부 대인용이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심히 산을 올라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낮인데도 안개가 끼면서 점점 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안개로 인해 몸이 얼어붙지 않는 걸 보면 내가 아는 주문은 아닐 테니 괴력난신으로 인해 생겨난 주문인 걸까.
이대로 걸어 봤자 길을 찾기는 어려울 테니 잠시 역병 의사의 모습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그렇게 안개의 영역권에서 벗어나니 어느새 말끔해진 숲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내려가지 않고 산 중턱을 향해 쭈욱 날아가자 무언가 장막 같은 걸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고, 곧이어 작은 집이 보였다.
이 정도로 방비를 해 두고 사는 곳이 자그마한 나무집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무시하고 다시 지상으로 안착했다.
그러자 작은 집의 문을 박차고 나온 인물은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로브와 꼬깔모자는 커녕 평범한 사람들이 입을 법한 천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하긴 마법사의 사회가 아니면 사람들이나 이단 심문관에게 '나 마법사요'하고 광고하는 옷은 입지 않겠지.
짧게 깎은 머리와 풍성한 수염이 인상적인 마법사는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나에게 질문을 날렸다.
"그대는 누구요?"
"나를 떠받드는 이들이 없어 스스로 이름을 붙였으니, 그저 역병 의사라고 부르거라."
"역병 의사?"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자국 내디디니 그가 숨겨두었던 지팡이를 꺼내 들면서 내게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생김새도, 기척도 의심스러운데 하물며 이름까지 그렇다니."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검은색 투성이의 옷에 까마귀 같은 가면을 쓴 사람이 주문을 뚫고 나타나서 통성명을 하면 누가 봐도 이상할 것이다.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단 심문관이 아니니."
"그럼 당연히 정신 나간 흑마법사겠군."
흑마법사에 대한 취급이 이렇게나 심해서야 나중에 어떻게 해야 병합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녀석에게 나의 편린을 보여줘서 흑마법사로 타락하도록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나는 너에게 제안을 하러 왔다. 내가 너를 보자마자 위험한 주문이라도 날렸나?"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너는 겉모습을 보고 판단했다는 거로군. 그대는 정말로 마법사가 맞나?"
"으음, 하긴 그건 그렇군. 하지만 네놈의 기척은 너무나도 꺼림칙해서 지금도 등골이 섬짓하다고."
"그럴 수도 있지."
어디서 마력이라도 새고 있나?
하윤이도 그렇고 내 마력이 섬짓하다고 한 사람은 없었는데.
"그래서 그 제안이라는 게 뭐요?"
"단체를 만들 생각이다."
"단체? 무슨 연구회 같은 거 말하는 건가?"
"그것보다 더 큰 규모의 것이지."
"허, 그렇게 규모가 크면 이단 심문관이 찾을 텐데 불가능한 소리로군."
"장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지금 가진 말은 백작 뿐이로군."
"쿨럭, 콜록콜록! 뭐, 뭐라고? 백작 말인가?"
"그래."
녀석은 내가 꺼낸 백작이라는 단어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백작에게— 아니, 잠깐. 말이라고?"
"그래. 체스의 말이라고 하면 알아듣겠나?"
"백작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세뇌? 아니면 가족을 가지고 협박했나?"
"내가 그런 짓을 할 것처럼 보이나? 나는 그저 거래만 했을 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법사는 겨누고 있던 지팡이조차 떨어트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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