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비밀 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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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청년이 백작위를 받을 때까지 여러 가지를 조율해가며 지구와 그림 속 세상을 오가고 가끔씩은 저택에도 들렀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이브의 변화에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역병은 끝났고 청년은 백작이 되었다.
기나긴 시간은 조직을 운영해 본 적도 없는 마법사를 유능하며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바꾸었고, 처음 만났던 중년의 마법사는 이제 나를 대신해서 결사단을 이끌어 갈 것이다.
차라리 개조 인간을 대신 넣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에반과 제임스 정도의 자유 의지를 넣지 않는다면 내가 주입한 명령어만 실행하는 인형이나 다름없으니 그냥 적당한 마법사를 골랐다.
가끔씩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방문할 생각이긴 하지만 재정 관리라던지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은 사양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대략적인 목적도 정해줬으니 내가 일일이 이끌어 나아가지 않아도 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나는 결사단이 머무르며 연구할 곳이 생기자마자 그림 속에서 연구만 하던 마법사와 흑마법사를 모두 내쫓았다.
창문은 있어도 태양이나 달이 없으니 시간의 흐름도 허기진 것으로 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들은 마치 과제가 하루밖에 남지 않은 대학생처럼 연구만 해댔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는 햇빛도 좀 쐬고 다른 마법사들과 교류도 하라는 마음에 그림 밖으로 던져 버렸지만, 햇빛을 보자마자 자기들이 무슨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팔로 눈을 가리며 괴로워했다.
그나마 내가 맞긴 직책 때문에 연구를 포기하고 밖을 돌아다니던 중년의 마법사만이 멀쩡히 서서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었다.
나는 그림에 있던 숙소로 쓰이던 건물을 없애버리고 넓은 회의장을 그리면서 따로 주문을 덧붙였다.
지구의 시간이 빠르게 흐를 때 누군가가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 흐름이 정상으로 바뀌도록.
안 그러면 들어왔다가 나갔을 때 수십 년은 지날지도 모를 테니까.
아무튼 이제서야 눈을 찌르는 햇빛에 익숙해졌는지 눈을 가리던 팔을 내리고는 눈을 최대한 찡그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는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부디 다음 세대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빠르게 가속시켰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도서관에다가 책을 보관하러 와서 생각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면 어쩌나 싶었지만, 1년에 한 번씩 보관될 책을 엄중히 심사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사단은 주변에 지부를 세우면서 북유럽과 동양 쪽으로 열심히 세를 늘려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북유럽엔 마법사의 사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지부를 건설하는데 꽤나 난항을 겪고 있었다.
동양 쪽도 마찬가지로 인종 자체가 다르기도하고 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점점 변하면서 발전한 과학으로 인류는 강력한 무기인 총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걸 가지고 전쟁을 하던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무력은 약하지만 자원은 풍부한 나라.
그런 나라들을 강제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시대 아래에서 결사단은 이득을 챙기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로 향하는 배에 자연스럽게 숨어든 결사단원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처음엔 정신 지배를 통해 고위층을 조종하며 암약했다.
그런 방식으로 지부를 늘려나가다 보니 어떤 소식이 들려왔다.
대영제국이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인해 수출되는 은을 회수하기 위해 몰래 아편을 뿌렸다는 것.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서 결국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대영제국의 승리였다.
이후로도 다시 한번 일어난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는 여러 나라에게 뜯어먹혔고 그런 혼란을 틈타 결사단은 사람 여럿을 포섭해 청나라에도 지부를 세웠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에도 비밀 지부를 세우고는 아직까지도 진출하지 못한 북유럽에 기회가 생길 때까지 계속 존버했다.
몇십 년은 존버했을까.
사라예보에서 어떤 청년이 황위 후계자를 암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거대한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청년들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갔고, 많은 이들이 총알 세례를 받으며 죽어 나갔다.
다행히도 가끔씩 만나는 백작의 후손은 내가 내린 낙인으로 인해 병약해서 전장으로 끌려가는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마법사의 사회는 빈틈 하나 없이 견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견고함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맹국의 마법사가 테러를 벌인 것.
물론 마법사의 사회까지 들어와서 벌이기엔 잡힐 위험이 있기에 민간인들을 상대로 했지만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전쟁 찬성파의 젊은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버리고 총을 들고는 전쟁터로 향했고, 반대파는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전쟁터에 개입할 수 없다며 그들을 비판했다.
실제로도 목숨의 위협을 느낀 마법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법을 발현시키면서 몇 번이고 마법의 존재가 드러날 뻔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북유럽으로 진출한 결사단은 기어코 전 세계에 지부를 세우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에서 개척자를 보낼 때 같이 갔었고.'
결국 동맹국이 패배하는 걸 구경하며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까지 구경했다.
인류 과학계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고 어느덧 현대까지 온 나는 잠시 도서관을 확인했다.
한 권도 없던 책장을 어느새 가득 채워서는 이제야 도서관이라고 말할 만한 공간이 되었다.
물론 저 높은 곳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책장이 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책들을 쓱 훑어보다가 나가려고 하니까 저기서 책을 여러 권을 가지고 이쪽으로 오는 일행이 있었다.
심사한 책이 들어오는 건가 싶었는데일행 안에서 안경을 쓰고 연구복 같은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나를 보고 의아해했다.
"어라? 여긴 간부나 허락받은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인데."
그렇게 말한 그녀는 맨 앞에 있던 사람에게 질문했다.
"저거 설마 침입자 아니에요?"
저 녀석은 최근에 회의장에서 봤던 녀석인 거 같은데.
내가 그리 생각하며 지그시 쳐다보자 앞에 있던 녀석이 여성의 머리를 꾹 누르면서 내게 인사했다.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뒤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고, 어수룩해 보이는 그녀만이 강제적으로 고개가 숙여진 채로 당황해할 뿐이었다.
맨 앞의 녀석은 간부인 게 확실하고, 뒤에 있는 녀석들도 결사단의 일원인가 본데.
그렇다면 저 여성은 최근의 들어온 인물인 걸까.
하지만 복장부터가 다르다.
마치 과학자나 연구원처럼.
"아아, 그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느 지부의 간부지?"
"한국 지부입니다. 지난번 회의장에서 임명받을 때 어렴풋이 존재를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마주하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흐음, 그렇군. 그 책은 이번에 심사를 받고 들이는 건가?"
"예. 뒤에 있는 단원들은 이곳에서 책을 빌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인원입니다."
"그렇군. 혹시 분실되거나 한 책은 없겠지."
"이런 일을 대비해 원본 말고도 복사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나는 수고하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나갔고, 그들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면서 나와는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단 한 명, 특이한 여성을 제외하고.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나에 대해서 모르는지.
한국 지부의 간부가 내게 인사하자 뒤에 있던 단원도 급하게 고개를 숙인 걸 생각한다면 모든 결사단원은 나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면 나에 대해서 알기는커녕 처음 들어 보는 거마냥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오늘 들어온 신입이거나 결사단에 도움을 주는 외부인일까.
나는 잠시 비가시화 주문으로 모습을 감추고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기척을 죽이고 도서관으로 들어가자 책장에다가 책을 꽂고 오는 건지 계단을 내려오는 간부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일반인이나 초짜들에게나 먹히는 주문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하라고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니 그는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녀에게 다가가 봤자 알아차릴 수 있는 정보도 한정적이니 저기서 대화하고 있는 다른 일행에게 가까이 갔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자 저기 있는 여성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쟤는 무슨 용기로 간부 님에게 물어 봤데?"
"그러게. 게다가 위대한 분이라고 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혹시 이거라도 해주고 온 거 아니야?"
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반대쪽 검지 손가락으로 그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일행이 모두 웃었다.
물론 가까이 있던 뒷담화의 대상은 주먹을 꽉 쥐면서도 묵묵히 참고만 있었고.
"뭐, 외부 연구원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마법적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고르고 골랐다는데 저 모양이니."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 어둡구만."
내가 보기엔 저들 때문에 미래가 어두운 거 같지만 어떤 시나리오로 써나갈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저 여성이 보고 있는 책장에서 필요한 책을 하나 건드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책을 꺼내더니 제목을 살펴봤다.
[소환 마법에 관하여.]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와 관계없는 책이라서 그런지 다시 책장에 넣으려고 했다.
'어림도 없지.'
책을 넣을 수 없도록 가로막으면서 저기서 구경하고 있는 간부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책을 고를 시간은 충분히 지난 거 같으니 이제 모두 나갑시다."
결국 책을 넣지 못한 그녀는 두 권의 책을 가지고 도서관을 나왔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이제 세 번째 화신을 만들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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