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라플라스의 고양이
* * *
이제는 좀 익숙해진 고양이의 몸으로 꿈속에 들어오자 멍하니 서 있는 서아가 보였다.
하지만 백지에 검은 점을 하나 찍은 것처럼 내가 나타나자 초점이 돌아오면서 나를 쳐다봤다.
"어…. 뭐지?"
"왜 그래? 정신 좀 차려 봐."
꿈속에서 정신 차리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이러다가는 일어나도 기억나는 게 없을 거다.
나는 이 새하얀 공간을 조작해 자그마한 방을 만들었다.
평범한 나무 바닥에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다시 나무로 천장을 만든다.
바닥에다가 커다란 카펫을 깔고 내가 올라설만한 조그만 탁자를 만들어도 서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 앉아 있는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눈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승자도 패자도 나올리가 없는 승부였다.
이럴 때야말로 '그 방법'을 사용할 때라고 생각하며 서서히 앞발을 들어 올리자 서아의 눈에서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이미 늦었다.
냥냥펀치!
꿈속이니까 죽을 걱정 없이 마음껏 앞발을 내지르자 뺨을 맞은 서아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부어오른 볼따구를 부여 잡고 일어난 그녀가 나에게 소리쳤다.
"야!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때리는 게 어딨어!"
"그건 정신을 못 차린 네 잘못이 아닐까?"
"살면서 자각몽이라곤 꿔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알아서 잘했어야지."
이제는 앞발로 가리지도 않고 대놓고 비웃지만 맞은 곳이 아픈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야…. 오늘 낮보다 더 아픈 거 같네. 어? 그런데 왜 꿈에서 안 깨지?"
"왜 안 깨겠어?"
"너 때문이구나."
"내 덕분이라고 해야지."
꿈의 주체는 서아지만 그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방도 만들 수 있고 다른 일도 가능하다.
"아무튼 빨리 공부해야 하지 않겠어? 복수는 아직 멀었다고."
"나도 알아. 근데 꿈속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거나 그러지는 못하네. 인터넷에 보면 날아다닌다던가 그런 말도 있었는데."
"어, 그건 내가 주도권을 가져서 그래."
"그걸 네가 왜 가져가?!"
"그래야지 너가 제대로 공부했는지 알 거 아니야? 주문을 사용하는지 하는 척만 하는 건지 알아야지."
"에이 설마 내가 그러겠어?"
탁자에 앉은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서아는 시선을 피하면서 정말이라고 말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
"아무렴 그러시겠죠."
"빨리 공부나 시작하자. 이러다가 꿈에서 깨겠어."
"꿈인데 시간을 늘리면 안 되나?"
"난 상관없지만 너 같은 필멸자가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무시하는 거야?"
"어."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서아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저으면서 방을 둘러봤다.
"에휴. 근데 이 방에서 뭘 할 수 있어? 너가 앉아 있는 탁자 뿐이구만."
"그거야 뭐."
잠시 옆을 바라보곤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자 갑자기 허공에서 책상과 의자가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는 밋밋한 거 같아서 양옆에 탁자를 놓고 각각 화분과 전등을 두니 이제서야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공부할 맛이 있으려나?"
"어, 오늘은 첫날이니까 간단하게 하는 건 어떨까?"
서아의 표정을 읽을 필요도 없이 그저 꿈속에 흘러다니는 무의식을 읽어보니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내일부터 야근인데 오늘은 그냥 쉬면 안 되나?'
이걸 보고도 공부를 강요해봤자 효율적이지 못할 테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냥 내일부터 시작하지."
"어? 정말? 말 바꾸기 없다!"
죽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서아는 기뻐하며 일어나더니 가만히 앉아 있던 나를 꼬옥 껴안았다.
나에게 볼을 비비기 전에 본능적으로 나간 앞발이 간신히 막아 냈지만 계속해서 힘을 주길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일부러 경첩에서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자 서아의 눈이 그쪽으로 돌아갔고, 그 틈을 타서 품에서 튀어나왔다.
"앗! 날 몇 번이나 때렸는데 그거 하나 못해 줘?"
"어. 냥냥펀치 맞고 싶으면 해 봐."
"쳇."
툴툴대며 삐졌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린 서아는 어느덧 문밖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복도로 나와 쭉 걸어가서 있는 왼쪽의 곰 인형이 가득한 방을 확인하고 반대쪽 문으로 나오자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양쪽에 있는 붉은 장미로 가득한 화분과 가운데 탁자에 앉아 있는 나였다.
"안냥?"
"괜찮은 집인 거 같은데 곰 인형은 뭐야. 그리고 안냥은 또 뭐고."
"그냥 한번 해 봤어. 그리고 이제 넌 마녀잖아. 그러니까 여긴 마녀의 집이지."
"…왠지 함정이 가득할 거 같은 집이네."
"마법의 성취를 확인할 겸 해서 똑같이 해볼까?"
"아니."
나는 쿡쿡 웃으면서 세이브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꿈속에선 죽어 봤자 정말로 죽는 건 아니니까. 드림랜드에선 영원히 추방이겠지만 여긴 아니고."
"드림랜드?"
"말 그대로 꿈속 세상이야. 하지만 넌 여길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나중에 시도해 보는 건 어때?"
"오래 걸릴 거 같네."
"당연하지."
나는 탁자에서 내려와 간단히 저택을 소개시켜줬다.
서아는 함정이 있을까 한 번씩 확인하며 오느라 시간이 늦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
잠에서 일어난 서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은 아침 7시야. 출근 시간이 몇 시인데 그래?"
"9시야. 휴우, 어차피 같은 건물이니까 여유롭게 해도 상관없지만."
그러면서 다시 침대에 누운 서아는 반쯤 감긴 눈으로 폰을 쳐다봤다.
—툭툭.
나는 아침은 몰라도 안 씻을 거냐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쳤지만 귀찮다는 답변만 들려올 뿐이었다.
내가 주문으로 이불을 빼앗으려 하자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꼬옥 붙잡으면서 어떻게든 사수하려 했지만 쓸데없는 저항이었다.
따듯한 이불은 손이 닿지 않는 천장까지 올려져서 척척 개어졌고, 가을이지만 아침엔 쌀쌀해서 그런지 몸을 웅크리던 서아는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침대에서 순식간에 책상으로 이동한 나는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보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있어 봤자 나를 노리는 손길을 피하며 시간을 보낼 것만 같았고, 오랜만에 하윤이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는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느라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고.
고양이의 몸으로 나타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길고양이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골목으로 들어가 하윤이가 사는 동네로 이동하니 저 멀리 아파트가 보였다.
서프라이즈를 위해 마력과 기척을 숨기며 이동해서 어떻게든 방까지 들어가자 어린 하윤이가 꿈나라에 가 있었다.
'잠깐만.'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차는 걸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에 있는 일기장 같은 게 보였다.
'하유…? 하윤이 동생인가? 난 무슨 시간대를 착각한 줄 알았네.'
나는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문을 여는 하윤이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 모두 잠시 동안 굳어 있었다.
"…안냥?"
"뭐 하세요."
당황한 건지 평소 내게 반말만 하던 하윤이가 존댓말을 하자 더더욱 어색해진 분위기는 풀어지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하윤이와 책상 위에 앉은 나를 움직이게 만든 건 잠꼬대를 하는 하유였다.
"우웅…."
그제서야 자기가 뭘 하러 온 건지 기억한 듯한 하윤이는 조금 있다가 자기 방에서 보자면서 자고 있던 자기 동생을 깨웠고 나는 벽을 통과해서 하윤이의 방으로 이동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교복과 가방을 보며 내가 왜 이걸 생각 못했지—라며 잠시 자책하고 있으니 아침을 다 먹고 온 하윤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신 님. 그 모습은 도대체 뭐예요?"
"존댓말 하니까 좀 어색하구나…. 이건 그, 내 유희를 위해 잠시 취한 모습이다."
"그럼 저번에 봤던 것처럼 인간 모습으로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의 경계심을 줄이기 위해서는 동물의 모습이 더욱 편하지."
"흐응—. 그럼 한 번만 껴안아봐도 돼요?"
"어?"
나의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성큼성큼 다가온 하윤이는 순식간에 나를 품속으로 껴안았다.
반사적으로 나가려는 앞발을 멈추며 가만히 있다 보니 몇 분이나 지나서야 간신히 내려올 수 있었고 하윤이는 다시 반말로 돌아왔다.
"저는 하유도 데려다주고 해야 해서 빨리 나가야 하는데."
"그럼 이만 가 봐야겠구나."
"다음에도 그 모습으로 와요."
"인간 모습은 싫으냐?"
"그냥 고양이가 좋을 뿐인데요?"
"알겠다."
주문으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따로 알아볼 일이 떠올랐지만 나중으로 미뤘다.
어차피 그 정도야 기록으로도 알기엔 충분하니까.
나는 하윤이가 친구와 함께 동생을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걸 보다가 다시 서아가 있을 연구소로 돌아갔다.
어느 정도 크기의 시험관 안에 태아로 보이는걸 보며 무언가 기록 하던 그녀의 머리 위에 안착하자 깜짝 놀라면서 손에 든 걸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놓치지 않은 서아가 뭐 하는 거냐며 묻지만 나의 시선은 시험관 안 속에서 태동하는 생명체에 끌렸다.
"흐음, 인조 인간이라도 제작하려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뭐 하는 거야."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며 근처에 있는 동료들이 머리 위에 나를 보지 않았을까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안심하라고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너를 제외하면 날 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남들은 너가 혼잣말하는 거로 보인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내가 실실 웃자 체념한 듯한 서아는 한숨이나 쉬며 기록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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