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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76화 (76/154)

〈 76화 〉 토사구팽

* * *

오늘 드디어 길고 길었던 실험이 끝났다.

나는 아마도 결사단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내 동기나 후배들은 도대체 어떤 부서로 갈지 모르겠다.

그래도 매일 누군가 죽어나가는 곳은 아니겠지.

이런 기쁜 날에는 술이 빠지면 안 되는 법이다.

시료를 차갑게 보관하는 기구에다가 숨겨둔 샴페인을 꺼내 애들을 불러모으자 왠 술이냐며 모두 내게 물었다.

"선배! 그동안 시료 꺼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왠 술이에요?"

"내 선배가 실험 끝나면 마시자고 숨겨둔 술이야. 결국 숨겨둔 사람은 퇴사했지만 우리들이라도 마셔야지."

"아…."

이런 실험실에 샴페인 잔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크고 작은 비커에다가 조금씩 따라서 나눠 주니 어느새 병은 바닥을 보였다.

"실험이 끝난 걸 기념하여—"

""건배!""

입 안을 자극하는 탄산과 직후 느껴지는 향이 오랫동안 남는 게 술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비싼 거 같았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더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남은 샴페인은 없었고, 꿩 대신 닭이라며 실험용 에탄올에다가 증류수를 타서 마시려는 녀석도 있었다.

미쳤냐면서 막으려 드는 후배들을 구경하며 주머니에서 꺼낸 과자를 먹으며 동기에게 건넸다.

"오, 땡큐."

"친구끼리 뭘."

짭짤한 감자의 순수한 맛을 즐기면서 비커에 얼마 남지 않은 샴페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다 보니 후배 녀석이 기어코 창고에서 에탄올을 꺼내 왔다.

그러고는 대충 막 섞어서 마셨다가 식도가 불타는 거 같다며 켁켁대는 걸 보며 실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정말 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죽을 때까지 성공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이제 다들 다른 곳으로 발령나겠지."

"너는 어디로 가고 싶냐? 신소재 쪽?"

"글쎄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저기서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는 후배들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손바닥을 펴 자그마하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공기 중의 수분이 모여 물방울을 만들어냈고, 그걸 들고 있던 비커에다가 넣자 그녀가 입을 쩍 벌렸다.

"어, 야 이건—"

"쉿."

비커에 담긴 물을 싱크대에다가 버리자 동기가 내 어깨를 붙잡고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일단 진정하고 조용히 말해."

"후우…, 마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거야?"

"저번에 그 책 있었잖아."

"설마 정말로 소환한 거야? 미쳤어?"

"아직까지 안 죽었으니까 괜찮지. 게다가 귀엽게 생겼는 걸? 말하는 걸 들으면 정나미가 떨어져 나가겠지만."

"우욱. 그런 걸 보고 귀여워하다니. 너도 참 미적 센스가 맛이 갔구나."

"징그럽게 생긴 외계 괴물이 아니고 검은 고양이를 소환했거든."

나는 평소에 말장난하며 날 괴롭히던 그 녀석을 떠올렸다.

고양이랍시고 말끝에 냥을 붙인다던가 재미없는 개그를 친다던가 해서 짜증 나긴 했지만 내 복수를 도와주는 고마운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녀석한테 마법을 배워서 저번에 나 뒷담한 새끼들 상사로 들어가려고."

"좀 계획이 많이 허술하지 않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뒷담 하나 했다고 죽이는 게 더 미친년 아니야?"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복수하려는 거지."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녀석이지만 그때 한 말은 여전히 기억난다.

그 새끼는 알고 있을까.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라는 걸.

그때가 온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하며 잡담을 하다 보니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피험자들일까.

하지만 그들은 슬리퍼를 신을 테니 이렇게 발소리가 크게 나지 않을 터였다.

"야 빨리 술병이나 숨기자."

오늘 오전에 늙은이의 복제 인간을 만들었으니 결과를 전달하러 온 비서일 게 분명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고, 휴가를 줄 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연구팀은 해산되고 다른 부서로 발령나겠지.

하지만 이 불길한 느낌은 도대체 뭘까.

나는 재빨리 병을 책상 아래에다가 숨겨 놓고는 후배들에게 손짓했다.

그제서야 걔네들도 발소리를 들은 건지 마시던 걸 내려놓고는 에탄올과 증류수 통을 적당히 숨겼다.

잠시 기다리자 실험실에 들어온 건 비서 한 명과 평소에 보던 경호팀이었다.

비서는 몰라도 왜 경호팀이 왔는지 궁금해하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지금쯤이면 의식이 시작되겠군요. 여러분들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혹시 휴가는 있을까요?"

"한 가지 일만 더 해주시면 일주일의 휴가 이후 원하시는 부서로 발령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뭡니까?"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피험자들을 모두 폐기 처분하시라더군요."

"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피험자들을 전부 폐기 처분하라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리고 회장님께서 한 가지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연구원들이 거절할 거 같으면 그들도 같이 처리하라고요. 뭐, 눈빛만 봐도 잘 알겠군요."

"잠깐—"

—타앙!

맨 앞에 있던 누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권총을 빼든 경호원이 행동하는 게 더 빨랐다.

간단하게 당겨진 방아쇠였지만 그 결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꺄아아악—!"

머리에 총을 맞으며 수박처럼 터져 나간 뇌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연구원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탕! 탕탕!

연구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의 등은 표적지가 되었다.

새하얀 연구복이 빨갛게 물든 쓰러진 후배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정신을 차렸다.

"야! 일단 도망가자!"

맨 뒤에 있어서 경호원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우리는 뒷문을 열어 도망가려 했지만, 그곳에도 두 명의 떡대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역시 쥐 새끼들이 있었군."

그들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지만 내가 저항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나 보다.

나는 손을 뻗어 미리 영창해 둔 주문을 둘에게 사용했다.

"윽! 뭐야!"

갑작스레 장님이 된 그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우리가 있는 곳에다가 권총을 겨누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눈이 안 보인다면 평범한 사람도 상대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들을 힘껏 밀쳐 내고는 저쪽 복도로 뛰어가니 뒤에 있는 떡대가 소리쳤다.

"두 명이 도망쳤다! 무슨 약품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

내가 마법으로 실명시킨 걸 모르는 걸까.

애초에 경호팀은 모두 그 늙은이의 부하니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겠지.

이런 연구원이 쓸 만한 대항책도 연구실에 있는 화학 약품이 대부분일 거고.

평소에 연구실과 집만 오가느라 가 본 적도 없는 복도를 달려 나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지상이었다면 창문이라도 깨고 도망쳤겠지만 지하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방도 있었지만 쓰지 않는 방이라 잠겨 있었고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마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말이지.'

일단 가능한 대로 겹겹이 보호막을 만들어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만든 나는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등 뒤로 친구를 숨겼다.

"그 씹새끼가 우릴 토사구팽하네."

"몇 년 동안 우리가 헌신했는데 이렇게 취급하다니."

분노로 부들거리는 손으로 벽을 몇 번이나 쳐도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면 손만 아프다면서 동기가 내 손목을 붙잡기에 결국 나는 그만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경호원은 이죽거리면서 내게 총구를 겨눴다.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독 안에 든 쥐 새끼구나."

—탕!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결과가 나타났다.

당연하겠지.

고양이의 말로는 총알로 뚫기 어렵다고 했으니까.

계속해서 난사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걸 대비해서 여러 겹으로 깔아두기까지 했다.

당황한 녀석은 다시 한번 쐈지만 조그만 납 쪼가리가 보호막을 관통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보고하기 위해 무전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윽, 끄으윽!"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철퍼덕 쓰러졌고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만 예전에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에게 메스를 갖다 댔을 때처럼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야 저들은 죽어 마땅한 녀석들이니까.

저 녀석이 깔아 뭉갠 무전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암만 봐도 우리들을 죽였는지 확인하는 게 분명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무전이 계속되었지만 계속해서 응답이 없기에 직접 오기로 한 걸까.

저쪽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어? 뭐야?!"

그들은 쓰러져 있는 녀석을 발견했는지 발걸음을 늦추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내가 권총이라도 빼앗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권총으로 날 조준하며 천천히 오던 그들이 뭔가 웃겼다.

"풉, 하하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웃자 미쳐 버렸다고 생각한 건지 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탕! 탕!

창문이 깨지는 것처럼 보호막이 하나 깨졌지만 괜찮다.

이 정도면 몇 시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저들에게서 당황스러움이 전염되는 걸 보며 어떤 마법으로 죽여 버릴지 고민하던 내 눈에 아까의 비서가 들어왔다.

"쓰읍. 우리 소속의 연구원인 줄 알았는데 결사단이었나? 그 뒤에 있는 녀석은 처리해야 하니 넘겨 주시오."

"나머지는 다 죽였나?"

"응? 당연하지. 회장님께서는 만일의 하나라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걸 걱정하시거든. 그래도 그들의 장기는 좋은 곳에 쓰일 테니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지."

"…좋은 일?"

온갖 감정이 머릿속에서 요동친다.

그에 따라 요동치는 마력은 금방이라도 저들을 죽일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내 입은 나도 모르게 배운 적 없는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심장에 새겨진 문장이 공명하고 있었다.

서서히 복도에 금이 가며 저들의 표정은 공포로 물들었고, 내가 영창을 마치니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역시 너희들은 모조리 죽어야 해."

공간이 깨지면서 그 너머로 별빛이 보였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모두를 찢어 발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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