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78화 (78/154)

〈 78화 〉 사후처리

* * *

회장에게 족쇄가 제대로 정착됐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 일단은 비서의 입을 통해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서아 혼자만 있었더라면 불안해서 바로 내려갔겠지만 하윤이의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알아서 해결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력에 잠시 당황해하며 주문을 멈춘 수현의 머리를 꼬리로 후려치자 그는 금방 정신을 바로잡고 다시 이어 나갔다.

"아래에서 난 총소리는 뭐지?"

"의식을 위한 실험 결과는 모두 나왔으니 잘 따르는 녀석을 제외하고 모두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비서가 그리 말하자 수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회장을 노려봤다.

만약 내가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눈빛이었다.

그는 이어서 방금 느꼈던 마력의 파동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중간에 내가 막았다.

"그럼 이어서 느껴진 마력의—"

"그건 내가 설명하지."

"라니아 님?"

"그 전에 저 녀석에게 건 주문은 풀고. 저러다가 폐인이 되겠어."

비서는 마법으로 정신력이 깎여나가다 못해 이제는 온갖 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이 서 있었다.

아직까지는 쓸 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살려야 하니 혀를 차면서도 손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털썩 쓰러지며 계속해서 피를 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해질 거다.

그래도 백치가 되면 다른 대체재를 찾아야하기 때문에 붕대를 감아 출혈을 막는 것처럼 새어 나가는 정신력을 틀어막았다.

겸사겸사 저 녀석이 따르는 회장처럼 족쇄도 같이 걸어 준 후 내려가기로 했다.

마력의 파동으로 기절한 신입 마법사들은 체내의 마력이 폭주해서 그 충격 때문에 기절한 것이기 때문에 저 녀석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어날 거다.

내가 박수현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하자 발걸음을 옮긴 그는 의식장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면서 다른 마법사들에게 의식장에 있는 애들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하자 다들 재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어깨 위에 있는 나를 보고 의아해하던걸 보면 아무래도 실력은 있는 거 같은데….'

이곳으로 오는 과정에선 본 적도 없었으니 아마 각자 연구실에서 자기 실험을 하던 놈들일게 분명하다.

저들의 육체야 멀쩡해도 실험에 쓰던 게 무사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그 원흉을 찾으러 나왔겠지.

저기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껴안고 있는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 게 참 불쌍해 보였다.

나중에 서아가 결사단에 들어온다면 여러 눈초리를 감내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내가 겪을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은 나는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멈추는 걸 느끼며 멀리서부터 흘러오는 피 냄새를 맡았다.

"아무래도 대부분 죽은 거 같군."

"그 연구원들도 임시로나마 결사단으로 받아들이고 책까지 빌려 줬는데 회장의 무례는 도를 넘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무기를 들고 설치는 자는 죽여 마땅하다마는…. 어차피 그에게는 이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터니 죽을 때까지 부려 먹거라."

몇 분 정도 걸어가자 피바다가 된 실험실이 보였고, 뒤쪽의 문 근처에서 눈이 먼 두 명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발소리를 듣자 비서님이냐고 물었지만 말없이 그들의 심장을 멈춘 수현은 그대로 복도를 걸었다.

가면 갈수록 비틀리고 깨진 공간이 점점 수복되는 것이 느껴졌고 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이윽고 빨간 페인트로 칠한 것처럼 온통 새빨간 복도와 깨진 공간 너머로 보이는 나의 육신, 그리고 어떠한 부상도 없이 그저 기절해 있는 정장들이 보였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는 서아와 이전에 봤던 그녀의 동기, 그리고 어떻게 온 건지 그녀들을 진찰하고 있는 하윤이가 있었다.

문장이 새겨진 서아나 결사단의 간부까지 올라간 수현이라면 내 육신을 봐도 멀쩡하겠지만 서아의 동기는 다르다.

다행인 점이라면 본신의 일부만 봤다는 점일까.

완전히 미쳐 버리지는 않고 약간의 후유증만 남을 것이다.

나는 폭주한 마력이 잠잠해지는 서아와 그걸 돕고 있는 자그마한 손을 보았다.

어쩌다가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쓰러져 있는 정장들은 하윤이의 작품이겠지.

수현은 기절한 떡대들을 발로 밀어 치우면서 점점 나아가다가 갑자기 멈췄다.

고개를 돌린 하윤이가 찬찬히 살펴보며 마력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깨 위에 있는 나를 보자마자 그 기세는 가라앉았고, 안심한 수현이 다시금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결사단 한국 지부의 간부를 맡고 있는 박수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신 님이 있으니까 안심해도 되겠지. 이하윤이야."

"그리고 그쪽은 저번에 그 연구원 분이시군요."

"으, 으응…."

서아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게 아무래도 간부가 여기까지 내려와서 그런 모양이다.

건물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묻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표정에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서아 네게는 책임 같은 걸 물을 생각조차 없으니."

"정말? 벽에 금도 가고 그런데 상관없어…?"

"책임을 물어야 하는 자는 이걸 명령한 회장에게 있겠지. 안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수현은 어깨 위에 내가 앉아 있어서 허리를 숙일 수 없기에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그걸 본 서아는 놀라워하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혹시 데자뷰라도 느끼진 않았을까.

원래 같았으면 실력이 올라서 자기 스스로 알아차리길 원했지만, 그냥 말해야겠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느냐."

"어, 잠깐만, 설마?"

"네게는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만 이해하겠구나."

나는 잠시 저택에서 이브와 놀고 있던 첫 번째 화신을 움직여 이쪽으로 오도록 만들었다.

이제는 거의 수복되어 균열이라도 난 것처럼 조그만 공간의 틈에서 손이 튀어나와 강제로 벌렸다.

그리고 나온 것은 처음으로 서아를 만났던 도서관에서의 모습을 한 첫 번째 화신이었다.

허공에서 뿅—하고 나타나는 건 너무 임팩트가 없는 거 같아서 이런 식으로 방문했는데, 서아는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깜짝 놀랐을 것처럼 보였다.

"엑, 으에엥?!"

마치 만화처럼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눈을 뜬 서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는지 눈을 감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서아의 마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도록 조치를 취하던 하윤이가 일을 다 마쳤는지 손을 떼고는 입을 열었다.

"에휴, 주말이라 친구랑 놀러 나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

"으음… 그 회장이란 녀석이라도 끌고 와서 절이라도 하도록 시킬까?"

"그냥 때려 죽이면 안 돼요?"

"어허,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죽여도 괜찮은 녀석은 신화 속 괴물이나 신분도 없는 흑마법사라고."

"알아요. 신 님."

하윤이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박수현이 살짝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불경하군요. 위대하신 분께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뭐? 지금 소중한 주말 시간을 뺏긴 여고생의 분노를 맛보고 싶어?!"

"큭!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저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개그는 거기까지 하고, 이것 참 수습하기 귀찮게 됐구나."

"송구합니다."

여기가 피범벅이 된 걸 보면 열 명은 넘게 갈려 나간 모양인데 어떻게 사망 처리를 해야 할지도 문제다.

'아니지. 애초에 나한테는 이제 그걸 해결할 꼭두각시가 생겼잖아?'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그 녀석의 업보이니 마음껏 넘길 수 있겠다.

사후처리는 전부 회장에게 넘기기로 결심한 나는 일단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서아를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서라 서아!"

"네! 그러니까…."

"평소처럼 대해도 괜찮다. 나는 제자에게 있어서 관대하니까."

"어, 음, 한동안은 어려울 거 같은데… 요."

하긴 자기가 소환한 게 사실은 결사단의 창시자면 어지간한 담력이 아닌 이상 떨리긴 하겠다.

그동안 날 대했던 걸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옆에서 태연하게 있는 하윤이를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뒤에 있던 그녀의 동기를 치료했다.

이제는 약간 말라서 자국이 남은 피눈물을 닦아주고 빠져나간 정신력도 채워줬다.

"자, 너는 일단 하윤이와 방으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거라."

"네…."

나는 잠시 그녀들이 올라가는 걸 지켜본 후 벽과 천장까지 튄 핏물을 모아 전부 불태웠다.

그리고 기절해 있는 정장들의 기억을 약간 지워 버리고 저기 구석에다가 처박아 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까지 귀찮게 하는 늙은이로구나. 그래도 결사단의 거름이 될 것이니 약간의 고행이라고 생각하지."

"이걸로 저희들의 뜻을 막을 만한 것들은 한국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너무 흑막 같구나."

"좀 그런가요?"

"애초에 내가 바라는 것은 지식을 모으는 것뿐인데."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선입견을 가질 뿐입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박수현을 쳐다봤다.

실눈을 뜬 간부까지 오른 실력 있는 마법사.

솔직히 선입견이 생길만도 하다.

하지만 섬세한 녀석이니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받겠지.

"게다가 지금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이집트 지부도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흠? 왜 그러지?"

"이집트 지부는 검은 파라오의 형제단이, 미국 지부는 별의 지혜 교단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면 사상자는 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 참 수상하군."

게다가 익숙한 이름의 교단이다.

마치 내가 내려올 것을 미리 알고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까지.

그 배후에는 누가 있을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