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79화 (79/154)

〈 79화 〉 기어오는 혼돈

* * *

결사단의 몇몇 지부가 마비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다지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검은 파라오의 형제단과 별의 지혜 교단.

둘 모두 기어오는 혼돈, 니알라토텝을 섬기는 조직이니 아마 모든 배후에는 그가 존재하겠지.

하지만 굳이 결사단까지 건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의 위상을 떠올린다면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나는 오래간만에 본체를 일으켜서 방을 둘러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허와 책상, 나의 유일한 놀이 기구라고 볼 수 있는 지구본과 미니어처 같은 저택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응?"

뭔가 방의 풍경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처음 일어났던 침대, 지구를 살펴보거나 포인트로 무언가를 살 때 쓰던 컴퓨터는 물론이고 첫날에 설치했던 정수기마저 사라져 있었다.

"이게 대체…."

게다가 비좁았던 방은 이제 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없으니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내 안에 있던 인간의 잔재가 당황스러움을 느끼지만 그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다.

잠을 자지 않으니 침대는 필요 없고, 먹거나 마실 필요도 없으니 그와 관련된 것들도 사라졌다.

이제는 무엇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 보고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나를 보조하던 컴퓨터 비스무리한 것도 없어지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잔재는 질문했다.

'어째서?'

나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멀고도 가까이서 들려오는 악기 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금관악기의 낮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두 명의 연주자는 불협화음을 냈다.

하지만 그런 혼돈 속의 질서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짝!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들려온 박수 소리가 연주자를 멈추고 내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저 너머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악기를 문 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한 촉수 덩어리 같은 것 둘과 형태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한 존재였다.

그것은 파라오의 모습을 하기도 했고, 안개나 폭풍의 모습을 하기도 했으며, 얼굴 대신 촉수가 달린 거인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의 목소리를 들어 보면 평범하게 쾌활한 인간 같은 느낌이어서 부조화가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전지하지 못한 전능이여. 이곳은 그대를 위해 우리가 안배한 장소이니 그저 즐기기만 해도 괜찮다. 모든 진실은 그것에 잠들어 있으니."

"그것은 이 지구본을 말하는 건가? 진실은 대체 무엇이고."

"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 우둔하다는 뜻이 아니니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그 말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는 내게 의문만 남겨 줬다.

'모든 진실이 이거에 숨겨져 있다라….'

그렇다면 계속해서 유희를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전지하지 못한 전능이 나를 뜻하는 것이라면 난 왜 진작에 이곳을 빠져나갔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염원해도 마력을 끌어올려 봐도 나가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터.

니알라토텝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거나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그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전자가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직감은 후자가 옳다고 말하고 있었다.

"음…."

일단 유희를 이어나가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을 알아차릴 날이 오겠지.

나는 이제 의자와 책상조차 사라져 지구본과 저택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 헛웃음을 치며 다시 눈을 감았다.

***

이제는 익숙해진 고양이의 몸으로 눈을 뜨자 박수현은 내게 어떻게 할지 질문해 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라니아 님."

"흠? 아, 미국 지부와 이집트 지부 말인가. 이젠 아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예?"

"잠시 동안은 동태를 살펴봐야겠지만 금방 정상으로 돌아올 게다. 그럼 나는 이만 올라가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어찌 보면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 나는 내 역할을 이어갈 뿐이다.

귀찮게 엘리베이터를 부르는 대신 서아의 방으로 바로 이동한 나는 서아에게 질문 세례를 하는 하윤이를 볼 수 있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어쩌다가 나를 만나게 됐는지 물어보다가 내가 책상 위로 나타나자 시선을 돌리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품으로 쏘옥 껴안고는 이리저리 쓰다듬는 게 익숙해 보였다.

내가 가만히 있는 걸 신기하게 보던 서아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냐며 뺨을 꼬집었다.

"아야! 진짜 현실이네…."

"네가 꿈을 꾸고 있었더라면 이곳이 아닐 텐데 무슨 헛소리냐."

"애초에 결사단의 창시자인 분을 내가 소환한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건 일리가 있네."

"어흑!"

"신 님,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서아는 상처 입었다는 듯이 과한 리액션을 취했다.

그 이면으로는 오늘 일어난 일을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는 그녀의 노력도 엿보였다.

"오늘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마."

"괜찮아요. 충격적인 일이 많아서 그런지 무슨 말을 들어도 멀쩡할 거 같거든요."

"그럼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까. 일단 나는 널 선택했다."

"선택이요?"

"둘째와 마찬가지인 거지. 이브와 나의 관계를 보면 서로 선택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이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듣도록 하고."

"그럼 설마 도서관에서 책이 떨어진 것도?"

"내가 한 일이지. 이후로는 네 엉터리 마법진을 통해 화신으로 나타났고."

"윽,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렸는데."

"정성이 없지 않느냐 정성이. 동물의 피는 무리여도 마법 재료라도 사용해야지.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물론 마법진은 가짜였고 내가 눈속임을 통해 소환된 것처럼 꾸몄지만, 만약 진짜로 다른 외계 종족을 소환하는 마법진이었다면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을 거다.

의식이란 비롯 그런 법이니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하윤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지만.

"이후로는 지식을 전수하고 문장마저 새겨 줬지.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냥 뭐 좋은 거 아니야?"

"그건 내 사도들에게만 내려주던 것이다. 지금 와서는 아무에게나 퍼주는 느낌이지만."

"뭔가 심장 쪽이 무거워진 느낌이야…."

서아는 사도라는 말을 듣자 책임감이라도 느꼈는지 문장이 새겨진 쪽을 움켜줘며 괴로운 척을 했다.

이제 와서는 허울뿐인 직책일 뿐이니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냐."

"뭐가요."

"결사단에 들어와서 복수하겠다는 목표. 그걸 위해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게 아니냐."

"그렇긴 한데… 뭔가 심란해서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차차 생각하면 될 일이고. 너는 내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 사실 프리 패스나 다름없단다. 네 친구도 같이 들어갈 수 있겠지."

"그게 돼요?"

"간단하게 주문 몇 가지만 배우고 조수로 들이면 될 일이지."

오늘부로 회장의 비밀 연구소는 사실상 사라졌으니 서아와 그녀의 친구는 한순간에 직장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이다.

연구소의 존재는 그동안 했던 것들로 인해 비밀로 부처졌으니 다른 회사에 가더라도 경력이랍시고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회사를 찾기 이전에 그녀가 사라질 수도 있겠지.

내가 족쇄를 걸어 둔 이들은 회장과 그의 비서 둘 뿐이니까.

그의 밑에 있는 이들이 수작을 부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어떤 광증이나 공포증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 속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결사단에 들어온다면 정신병을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터.

나는 건물에 빼곡히 새겨져 있는 주문들을 훑어보며 서아에게 말했다.

"결사단은 생각보다 안전할 거다. 네가 알아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주문들이 새겨져 있어서 외부인들은 간단하게 격퇴할 수 있을 테니."

"…그럼 오늘 일은?"

"외부인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연구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교활한 녀석이다.

어째서 회장의 명령을 받는 경호원들이 결사단의 건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계약에 있었겠지.

오늘 의식이 끝남으로서 연구원과 경호원들은 모두 외부인이 되어 이 건물로는 다시 들어올 수 없게 되고,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한 자신의 어두운 면을 아는 연구원들을 일일이 숙청하기엔 비효율적이다.

서아의 말로는 회장이 무슨 기회라도 줬다는 식으로 비서가 말했다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

아무튼 결사단의 건물을 피로 더럽힌 그는 결국 목줄이 채워져서는 내가 조종하는 실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오늘의 학살극은 연구 사고로 바뀌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 자체가 감춰지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 거다.

서아에겐 불행이겠지만 기껏 얻은 꼭두각시가 바로 망가지는 꼴은 보기가 싫다.

망가지더라도 단물은 전부 빼 먹은 후 부수던 태워 버리던 해야지.

그리고 그것의 주인공은 아마 서아가 맡지 않을까.

결사단은 또 다른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하고.

모든 것은 그녀의 의지에 달렸지만.

'그걸 제안하는 건 아마 몇 년 후의 이야기겠지.'

일단 나는 니알라토텝이 말한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 봐야겠다.

결사단이 모은 지식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다른 어처구니없는 것에서 갑작스레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럼 일단 도서관으로 향해야겠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