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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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몇 시간이 지나 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반기는 건 저택 삼인방이었다.
이브는 저 멀리서 날 알아봤는지 내가 준 마도서를 한쪽 팔로 꼬옥 껴안고 다른 쪽으로는 높이 흔들며 이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뒤에 있던 에반과 제임스는 오랜만의 외출이 이리도 평화로워서 그런지 많이 어색해 보였다.
혹시 폭탄테러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지만 공항을 돌아다니며 순찰하는 경비대와 폭발물 감지견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서아는 물론이고 이 녀석들도 내가 무슨 재앙을 몰고 다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일 테니 소개시켜주기 위해 앉아 있는 머리를 툭툭 쳐서 저쪽을 보라고 말했다.
"응? 저기?"
"그래. 저기 남자 둘하고 손 흔들고 있는 여자애 하나 보이냐."
"저 사람들이 이번에 같이 여행가기로 한 사람들?"
"그래."
서아는 멀뚱히 서 있는 셋을 훑어보다가 이브와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알아차린 모양인지 곧바로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서아 너는 영어는 할 줄 아냐."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정확히는 대화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데."
"…어느 정도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지 뭐."
말이 제대로 안 통하면 여행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게 분명하니 나는 조용히 마력을 짜올려 주문을 만들었다.
복잡하게 선이 얽히고 설킨 마법진을 시계 같은 거로 가릴 수 있는 손목 부분에다가 며칠 동안 유지되도록 그리자 서아와 서현이는 깜짝 놀란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깜짝이야! 갑자기 말소리가 전부 한국어로 들려서 뭔가 싶었네."
"그러게. 마법이라도 쓸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서아 너는 내가 마력을 움직인 것도 알아채지 못한 거냐."
"아니, 거. 알긴 알았는데 외국어를 쓰던 사람들이 모두 갑자기 한국어를 쓰면 당황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서아는 자기소개도 잊고 나와 투닥거리다 보니 그걸 지켜보던 이브와 에반은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제 후배이신 언니는 화가 많으신가 봐요."
"나도 그래 보이네. 이러다간 몇 시간은 공항에 있겠어."
언제 밖으로 나가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위해 과묵히 있던 제임스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크흠! 싸우실 거면 일단 차에 탄 다음에 하시죠. 그 짐들은 일단 호텔에다가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구나. 서아 너도 평정심을 기르도록 해. 마법사라는 녀석이 말 한마디 지지 않으려고 드는 건 좋지만, 그로 인해 만들던 주문이 엉키면 너만 손해다."
"후—, 그럼 그동안 놀린 건 내 평정심을 기르는 걸 돕기 위해서야?"
"아니, 그건 그냥 놀리던 건데."
"이게!"
"서아야, 그만 싸워.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윽!"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주변의 시선을 끈 서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였다.
일반인이라면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지 허공에다가 그러는 건지 생각할 테고, 내가 보이는 사람이라도 고양이와 말싸움을 하는 그녀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겠지.
순식간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서아는 얼굴을 토마토처럼 붉히며 빨리 나가자고 말했다.
재빠르게 공항 밖으로 나와 주차한 곳으로 향하는 제임스를 따라가니 6인승 차량이 있었다.
그 안에는 주근깨가 특징적인 한 여성이 운전석에서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매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서아의 어깨에 앉아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엇,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그래."
"저기 일단 트렁크 좀 열어 주실래요?"
"잠시만요!"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 문이 살짝 올라갔고, 서아와 서현은 그걸 열고서는 캐리어를 넣었다.
그러고는 모두 미리 정한 것처럼 뒷좌석에 다섯 명이 앉았고, 나는 앞좌석에서 결사단에서 나온 사람과 대화하기로 했다.
뒤에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슬쩍 눈을 굴려 운전하기 시작한 그녀를 쳐다보니 경직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에 장난기가 생겨 이번엔 완전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니 식은땀이 조금씩 흐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마저 보였다.
'마력만 따지고 보면 신입은 아닌 모양인데. 아마도 중간 관리자라고 봐야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결사단을 세웠지만 자세한 역할군은 모른다.
기껏해야 지부를 대표하는 간부와 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마법사들 정도일까.
하지만 미국 지부나 이집트 지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사상자는 없다고 말했던 걸 생각해 보면 따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투를 벌이는 마법사들도 있을 거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깨끗한 걸 보며 아무래도 험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결사단은 지금 별의 지혜 교단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있으니 만일에 대비해서라도 그쪽 마법사들을 보내진 않았겠지.'
미국 지부의 간부는 직접 오고 싶었겠지만 밀려드는 서류들의 파도에 휩쓸려서 오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이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을 보냈을 터.
혹시 얘는 간부가 오지 않았다고 내가 화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걸까.
일단 대화를 통해 긴장한 걸 풀어 주자.
"예약한 호텔까지는 얼마나 걸릴 예정이지?"
"예! 그게, 몇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그런가. 그동안 심심할 텐데 잠깐 이야기라도 하지."
"예, 그게, 그러니까…."
"일단 근처에 수상한 단체라도 있나? 아니면 신화 생물이 거주하리라 생각되는 장소라던가."
"딥 원들이 교배 실험 장소로 쓰는 마을이 있습니다. 비늘이 있는 혼종들은 근처 동굴에 몸을 숨겨 생활하고, 아직 변화가 없는 젊은 사람은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흥미롭군. 또 다른 건?"
"다른 건…."
이후로도 나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수상한 곳은 없는지 질문했다.
***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여 머리를 핸들에 기댄 그녀는 잠시만 이렇게 쉬겠다고 말했다.
내 질문 세례가 너무 많았던 걸까.
그녀를 내버려 두고 창문을 열어 서아를 겨냥하고는 어깨에 올라탔지만 서아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웅장한 호텔 건물을 바라보며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5성급 호텔 아니야?"
"결사단이 구한 거라서 자세히는 모르겠군."
"5성급 호텔이 맞습니다…. 이 호텔을 보유하신 분께서 결사단과 깊은 인연이 있으셔서요."
결사단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시기가 서부 개척 시기 이전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로비로 들어가 체크인을 마친 우리는 거의 최상층까지 올라가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방으로 들어왔다.
"결사단은 실력 주의이지만 알게 모르게 혜택이 많아서 좋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마트에서 할인도 받을 수 있고…."
"한국 지부도 그런 게 있나? 아무튼 이런 호텔까지 올 수 있어서 좋네요."
"이 방을 구하느라 간부님이 많이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수고가 많군. 아무튼 너도 옆방에서 쉬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지."
"네."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방으로 향했다.
나는 슬슬 어둑어둑해지며 건물에 하나 둘 씩 불이 켜지는 걸 감상했다.
그러다가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주문으로 문을 열어 주자 이브가 들어와서 슬슬 저녁 시간이라고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오늘은 여기 호텔에서 먹기로 했어요.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응? 그냥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단다. 차에서 내가 대화하는 게 들렸느냐?"
"네. 무슨 딥 원이 산다는 마을이랑 35구역이랑… 나머지는 졸려서 못 들었어요. 헤헤."
"혹시 너는 끌리는 곳이라도 있느냐? 나는 가 봤자 괜히 헛걸음만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저희는 여행왔잖아요. 그럼 당연히 즐기면 그만 아닌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리고 저는 35구역을 가 보고 싶어요! 저번에 무슨 음모론 영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왔거든요."
35구역이라.
분명 내가 풀어둔 미고가 자리 잡았던 구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번에 어떤 관종이 들어갔다가 끔살당한 곳으로 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즐기기로 했으니까.
혹시 미고가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하고.
내일의 행선지를 구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먼저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던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이브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볼을 부풀리면서 서아에게 달려갔고, 서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여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화났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브의 모습은 귀여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에 음식을 담아왔다.
나는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행선지라도 추릴 겸 그동안 있었던 시나리오들을 떠올렸다.
제임스가 활약했던 해저 동굴은 너무 깊어서 가기 어렵기도하고 아마 지금쯤이면 무너져 있을 거다.
그래도 확실한 건 나중에 결사단원에게 물어봐야지.
인간으로 변장한 쇼고스는 찾아봤자 공격적으로 대할 것이 분명하고, 애초에 도시에 살고 있으니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다.
올드 원은 남극인지 북극에 얼어붙어서는 잠들어 있을 테고.
르뤼에는 건축 양식이라던지 여러 가지 매력적인 게 많지만 정신력이 위험하므로 패스.
에반이 활약했던 곳은 저택이나 그림 속이니 그곳도 구경할 만한 것이 없다.
어느 정도 동선을 그린 나는 모두들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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