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여행
* * *
섬으로 몰래 들어온 침입자를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인지 점점 나빠져가는 날씨는 위협적으로 변했다.
커다란 파도는 마치 섬을 잡아먹으려는 괴물처럼 높이 솟아올랐고, 울부짖던 먹구름이 내뱉은 낙뢰는 근처에 있던 나무에 직격했다.
—쿠르릉!
짧은 섬광과 함께 우지끈거리며 쓰러지는 나무를 피하는 일행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근처에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은 보이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나무가 우거져서 비가 덜 내리는 곳이라도 찾으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이라도 챙겨올 걸 한탄하던 서아는 갑자기 일행을 멈춰세우더니 저기 나무 사이에서 불꽃이 보였다고 말했다.
"잠깐만 멈춰 봐!"
"갑자기 왜 그래?"
"저기서 불꽃 같은 게 보였어."
"이런 숲속에서 비도 오는데 그게 무슨 소리…."
서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서아가 가리킨 쪽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나무 너머로 무기를 들고 올라오는 혼종들의 안광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저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어떤 녀석은 대가리가 완전히 물고기나 마찬가지인데 몸에는 비늘이 별로 없었고, 어떤 녀석은 물갈퀴가 짝짝이로 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자신들이 인간이었던 걸 증명하는 건지 잔뜩 녹이 슨 농기구 같은 걸 들고 이리로 오고 있었다.
빗소리에 가끔 들려오는 천둥소리까지 겹쳐져 녀석들의 발소리를 듣지 못해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아직은 괜찮다.
들킨 이상 이미 승산은 이쪽으로 기울었으니까.
자신들과 눈이 마주친 걸 알아차렸는지 이제는 캬아악—하며 괴성을 지르고는 달려드는 딥 원에게 날카로운 번개 한 줄기가 꽂혔다.
하지만 녀석들은 바다 아래에서 광범위한 주문을 유지하고 있을 주술사에게 귀띔이라도 들었는지 태연하게 계속 돌진하고 있었다.
녹이 슬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뾰족한 쇠스랑은 금방이라도 연약한 피부를 꿰뚫을 것만 같았지만 중간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이미 이브가 보호막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당황해하는 혼종의 얼굴로 또 번개가 쇄도하자 자신들이 제 발로 사지에 걸어왔다는 걸 깨달은 저들은 무기도 버리고 곧장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의 퇴로도 이미 보호막이 막고 있었고, 독 안의 든 쥐가 된 걸 깨닫기도 전에 낙뢰가 내리쳤다.
"이런 날씨에서만 쓸 수 있는 마법이 있었는데 이렇게 준비까지 할 줄이야."
"그런 말 할 시간에 빨리 쓰기나 해요!"
서아의 재촉을 들은 에반은 알겠다며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은 맛보기였다는 듯이 낙뢰는 연속해서 혼종들을 강타했고,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절망하는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제어하면서 잠시 기다리다 보니 썩은 생선을 구운 역겨운 냄새가 풍겨 왔고, 확인 사살까지 마친 후 나는 코가 마비될 지경이여서 시체들을 완전히 소각해 버렸다.
"어쩌다 보니 여행이 아니라 신화 생물 사냥으로 변해 버렸네."
"가끔은 이렇게 실전도 나쁘지 않네요."
"으윽, 냄새. 그냥 빨리하고 관광이나 하러 가요. 아직 오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먹구름 때문에 어둡지만 아직 점심도 아니구나.
요즘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느낌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합쳐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일 분이 천 년처럼 아득하기도하고, 몇 시간이 지나도 찰나조차 지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가끔씩은 헛것이 보이기도 했는데 니알라토텝을 만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진실을 찾기 위해 온 섬은 딥 원 주술사의 격렬한 환영으로 인해 무자비한 학살극이 펼쳐졌고, 이제 마무리 단계인 절정까지 도달했다.
녀석의 슬슬 마력이 거의 떨어져 가는 건지 내리던 비의 세기도 약해져가고 있고 넘실거리던 파도도 잠잠해졌다.
하지만 저 아래에 숨어 있을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다.
에반이 번개 화살을 난사한다고 해도 닿을리는 없을 테고,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앙심을 품은 녀석이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나야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지만 저기 보이는 제임스의 표정이 그렇기에 약간 손을 쓰기로 했다.
딥 원에 대한 증오를 높일수록 나야 재밌어질 테니까.
이제는 마력도 얼마 남지 않아 저항하기도 힘들 녀석의 기척을 쫓아 보이지 않는 손을 뻗으니 불길함을 느꼈는지 녀석은 갑자기 속력을 높였다.
요리조리 빈틈으로 잘 빠져나가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해보지만, 녀석은 이미 내가 만든 그물 안에 잡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을 점점 늘려가며 압박을 가하면 가할 수록 점점 잔실수가 많아지던 그것은 일부러 만든 빈틈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통과했다.
그러나 녀석을 반기는 건 그물망이었고, 어부가 그물을 당기듯이 위로 잡아당기자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타 딥 원과 생긴 건 다를 바가 없었지만 자글자글하게 주름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면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단신으로 부리긴 힘들겠지만.
아무튼 마력의 그물을 벗어나려 계속해서 버둥거리던 그것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에 벌벌 떨더니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추욱 늘어졌다.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녀석을 육지로 옮겼고, 그물에서 풀어 줘도 그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아나 내가 다가가면 미세하게 떠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와 어떤 접점이 있는 모양이다.
'그럼 이 녀석이 진실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겠군.'
이게 왠 떡인가 싶어서 이 녀석을 죽이지 말라고 얘기한 다음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텅 빈 동공이 점점 떨리는 것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지 않고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그것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재빠르게 나를 찌르려 들었다.
그걸 앞발로 간단히 막은 나는 오랜만에 쓰는 냥냥펀치로 녀석을 기절시켰고, 살릴 필요는 없어서 그대로 기억을 뽑아내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딥 원의 비늘처럼 어두운 청록색의 기억 덩어리를 한입에 삼켜 빠르게 살펴보자 나는 익숙한 문양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시대가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문장이 그려진 깃발 여러 개가 휘날리고 있었고, 그 중앙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뭍에서 무언가를 하던 딥 원들을 엄청난 진동이 강타했고, 뒤이어 날벼락과 불덩이가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는 듯이 떨어졌다.
그러나 무슨 호기심인지 기억 속의 딥 원은 슬쩍 뒤를 돌아 화려한 자를 살펴봤고 그의 심장에는 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강렬한 두려움.
어째서 이 딥 원이 나와 서아를 보고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제사장에게 호되게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내가 원하던 진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몰라서 녀석의 기나긴 삶을 다시 한번 읽어 봤지만, 수상한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슬슬 비린 맛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기억 덩어리를 뱉어서 태워 버렸다.
"돌아가자꾸나."
"마참내!"
"무슨 헛소리야."
"그럼 오늘은 어제 여겨봤던—"
실망감을 집어삼키며 마법진을 그려 낸 나는 곧바로 호텔로 이동했다.
***
어제의 경험을 토대로 추측한 나는 니알라토텝이 진실은 여기에 있다고 말했지만 정확한 시간대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긴 녀석은 성격이 괴상하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과거나 미래로 여행을 떠나기보단 오랬동안 살았을 신화 생물들의 기억 속에서 수상한 점을 찾기로 생각했다.
고로 오늘 찾을 목표는 쇼고스.
저번에 관찰했던 녀석은 이곳에 살지 않지만, 이런 대도시라면 하나쯤은 있을 거다.
오늘도 고양이의 모습으로 서아의 머리 위에 앉아 주변을 살펴보길 몇 시간째.
그다지 큰 수확은 없었다.
에반이 옷 가게에 들르더니 꽃무늬로 가득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는다던가 하는 재밌는 일은 있었지만 유혈이 낭자하고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여긴 관광객도 많으니 치안도 그럭저럭 나쁘진 않을 터.
미국이라면 일어날 법한 총기 사고도 우리가 다니는 동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일행이야 안전하다며 좋아하겠지만 내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아직 여행을 마치기엔 며칠이나 남았는데 오늘 정도야 허탕 정도는 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즈음 포기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떠한 우연인지 몰라도 저쪽 사람들의 인파 속에서 비만의 남성과 어떤 커플이 시비가 붙은 걸 볼 수 있었다.
여성 쪽에서 시끄럽게 떽떽 거리며 옆에 있던 남성에게 달라붙더니 귓속말을 들은 남성은 그 비만인 사람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쇼고스를 끌고 죽음을 향해 발을 뻗은 것이지만.
아무튼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어깨의 주인인 서아에게 말을 걸었다.
"한 커플이 알아서 괴물의 입 속으로 걸어갔는데?"
"그게 뭔 소리야?"
"저쪽 골목."
"응?"
"뭐 말하는 거예요?"
"…빨리 가야겠는걸."
그렇게 말한 서아가 커플이 들어간 골목을 향해 뛰어가자 당황한 일행들도 같이 그녀를 따라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