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86화 (86/154)

〈 86화 〉 복수

* * *

명계의 약.

복용자의 정신을 과거로 보내버리는 약이다.

운이 좋지 않다면 그레이트 올드 원이 활동하던 아득히 먼 과거로 이동할 수도 있고, 지금은 가능하지만 처음에 그걸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는 관찰할 방법조차 마땅치 않아서 결국 사용하는 걸 포기했었다.

물론 지금도 사용할 생각은 없다.

제임스가 괴로워하는 딥 원들의 비밀 의식장에 있던 시간대로 무조건 떨어진다면 모를까 잘못하면 시간의 구석에서 돌아다니는 사냥개에게 쫓길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미치광이나 갈가리 찢겨나간 시체가 아니므로 약은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주문을 응용해야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천천히 제임스에게 다가가자 우울함에 가득 찬 표정이 보였다.

쇼고스에게 맨몸으로 달려드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현명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에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기억을 상기시켰나보다.

지금 잠든다면 그때의 악몽을 꿀 거라고 생각한 건지 벌써 새벽인데도 그는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제임스가 뭘 하는지 지켜보다가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그걸 느낀 그가 돌아서서는 두리번거리다가 아래쪽에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새벽인데 아직까지 자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눈 아래로 피곤함이 잔뜩 보이는데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후회하고 있나?"

"…예?"

"그날 죽은 사람들이 눈에 어른 거리고, 만약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그저 제가 그걸 아직도 붙잡고 있을 뿐인 거죠."

"그걸 바꿀 방법이 있다면?"

"세상에 그런 마법이라도 존재합니까?"

"그거야 지금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제임스와 눈을 마주쳐서 간단하게 환각을 보여줬다.

나와 그의 기억을 토대로 어두운 동굴을 만들어낸다.

미끌거리는 바위와 습한 공기, 미약하게나마 어둠을 밝히는 바닥에 박힌 발광석과 멀뚱히 서 있는 제임스의 주변으로 죽었던 인물들을 그려 낸다.

'그러고 보니 이동할 때 들키지 않기 위해 모포를 썼었지.'

깜빡했던 모포까지 씌우자 예전에 봤던 것과 똑같았다.

환각이 구축되는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제임스는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걱정된다는 눈빛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아멜리아인지 에밀리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이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환각에 취한 그의 튀어 오르는 감정은 재밌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며 희망을 품었을 때 환각을 깨뜨린 나는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어떤가? 그 주술사는 어떻게 상대할지, 바다 아래의 동굴에서는 어떻게 탈출할지 생각했나?"

"…제대로 된 계획은 없지만 가능성은 보였습니다."

"호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저택에 있는 동안 이브와 에반이 대련하는 걸 제가 몇 번이나 심판을 봤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딥 원이 무조건 눈에 보이는 주문을 쓸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총기로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마법으로 인해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건 기억나지 않나?"

"윽!"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는지 정곡을 찔린 제임스는 다시 대책을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로 빠져들었다.

어차피 여행 와중에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복도 한가운데에서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주문으로 재우고는 방에다가 옮겼다.

그리고 어느덧 여행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

여행이 끝나자 서아와 서현은 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이전부터 그녀의 실력을 어렴풋이 알았던 간부는 꽤나 높은 자리를 내주었다.

당연히 그녀를 뒷담하던 마법사들은 자기들의 상사로 들어온 서아를 보자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내가 새겨둔 문장을 알아본 일부 마법사들이 그들을 제지해 간신히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원래 같았으면 마치 대학처럼 원하는 분야에 통달한 마법사의 밑에 들어가 마력 셔틀을 하거나 마법진을 그리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지식을 쌓아가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그동안 꿈속에서 내게 교육받은 서아를 가르칠만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높은 지식을 쌓은 이들은 내가 새긴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어서 가르칠 베짱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연구하느라 가르칠 시간조차 부족하다고 더 이상의 신입 마법사들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개인 연구실과 사무실, 그리고 방까지 받은 서아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상에 발까지 올리면서 허탈한 듯이 웃었다.

나는 냄새난다면서 발을 툭툭 쳤고, 그럼 발 냄새나 계속 맡으라며 휘두르는 다리를 피해 옆에 앉아 있던 서현이의 허벅지에 앉으니 서아가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냥?"

"그냥 뭔가 재미없어서."

"뭐가 재미없는 거지?"

"이제 결사단에 들어왔으니 복수는 끝마쳤잖아? 근데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복수가 완벽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 말이구나."

하긴 뒷담하던 녀석들의 반응은 어이가 없었지.

벌벌 떨면서 알아서 기었으면 모를까.

한국 지부의 간부가 직접 인정까지 했는데도 반발하면서 지랄하던 꼴을 보면 정말 답이 없어 보였다.

"그럼 네가 갈구거나 하면 되는 게 아니더냐."

"무슨 명분으로?"

"애초에 넌 명분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너는 네 심장에 새겨진 문장도 그렇고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맨날 농담이나 하는 고양이? 너무 근엄이 없어서 결사단의 창시자라고 보기 힘들자너."

"다른 원로 마법사들이 봤으면 경을 치겠구나."

웬만한 상식이 있는 자라면 서아가 결사단의 위기가 올 정도의 사건만 치지 않는다면 최대한 건드리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직위가 낮은 이들은 서아의 뒤에 간부가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고, 높은 이들은 내가 있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러나 눈치도, 능력도 없는 그 녀석들은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로 뻔뻔하게 대꾸나 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그런 것들은 매가 약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오오, 뭔데?"

"바로 대련이다."

"합법적으로 줘팰 수 있다는 뜻?"

"힘 싸움 말고도 지식에 대하여 겨루거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네 마음대로 하거라."

한국의 결사단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전투 마법사들의 수가 적었다.

이는 아무래도 전쟁 때문에 나라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어서 그런 거겠지.

폭격이란 마법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른 단체들은 힘겹게 재건하는 동안 결사단은 다른 지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다른 단체들을 짓누를 수 있었다.

알력 다툼이 없으니 전투 마법사를 키울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흑마법사가 나와도 의문의 마법사가 때려잡으니 나설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구색을 맞추기 위해 결사단에서 지식이 아닌 돈을 추구하면서도 재능이 있는 자들을 뽑아 얼마 없는 자리에다가 집어넣은 거다.

그들을 위한 체육관이나 연무장 역시 건물에 있었고, 가끔씩 의견 차이가 있는 마법사들끼리 힘으로 겨루기도 했다.

간부는 지식으로 겨루라고 권고를 내리긴 했지만 가끔씩 내려와서 구경을 하는 걸 보면 녀석도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다.

아무튼 어느덧 전통으로 자리 잡은 대련을 이용해 합법적으로 녀석들을 조진다면 서아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오호라.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당장 해야겠다. 신청은 어디서 해?"

"간부에게 말하거라. 그럼 걔도 재밌어하면서 알아서 판을 깔겠지."

"그런 사람으론 안보였는데. 아무튼 빨리 가자!"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서아가 자기 어깨를 툭툭 치며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기에 올라타자 순식간에 달려갔다.

금방 최상층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류와 씨름하고 있는 수현을 만날 수 있었고, 대련에 대해 듣자마자 서류 따위는 내팽개치면서 불운의 상대에 대해 물어 봤다.

누가 봐도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로 전화를 건 그가 연무장에 대련 준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알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금방 전화를 마친 그가 빨리 내려가자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에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는 신입 마법사들과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담당 마법사가 있었다.

서아를 보자마자 무슨 자신감인지 얼굴에다가 비웃음을 장전한 녀석들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담당 마법사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들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고는 어깨에 앉아 있던 나에게 죄송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녀석들을 쳐다봤다.

자신들의 미래는 전혀 모른 채로 서아의 지목을 받은 그들은 연무대 위로 올라갔고, 각자 지팡이를 꺼내며 어디서 본 건지 괴상한 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가운데에 있던 마법사가 호루라기를 불자 녀석들은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축구공만한 불덩이와 얼음 조각, 그리고 가느다란 광선이 서아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지팡이가 향하는 곳을 본 서아가 간단히 피했고, 금방 만들어낸 주문으로 한 명을 실명시켰다.

당황해하며 마법을 난사하던 그는 결국 자기 팀원을 한 명 공격해 버렸고 사실상 서아를 상대할 사람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서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신중하게 영창해나가며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견제를 했지만 영창 속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 결국 그도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아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먼지 나도록 그들을 패기 시작했고 심판이 나서려고 하자 수현이 나서서 제지했다.

결국 분이 풀릴 때까지 얻어맞은 그들은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빌었고, 후련하다는 듯이 웃은 서아는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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