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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88화 (88/154)

〈 88화 〉 외전 ­ 기묘한 수학여행

* * *

모래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 나란히 서 있는 관광버스를 구경하던 나는 저기 멀리서 빨리 모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캐리어를 끌고 걸어갔다.

그동안은 동생을 돌보느라 수학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부모님께서 미안하셨는지 이번 거는 꼭 가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지금 교실이 아닌 운동장에 있었다.

처음인 만큼 기대치가 높았던 나는 놀이공원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유명한 곳으로 갈지 행복한 상상을 했었지만 그 기대는 금방 배신당했다.

첫째 날은 숙소까지 가는 길 중간에 어딘가에 들러서 무슨 체험을 한다고 했고, 둘째 날에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숙소에서 장기자랑을 한 다음에 담력훈련을 한다고 했다.

이제 거의 여름이 끝나가는데 무슨 담력훈련인가 싶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지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공포 체험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남녀가 한 조로 묶였을 때를 기대하는 거겠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이나 갑작스레 놀래키는 선생님 때문에 깜짝 놀란 여학생이 곁에 있던 남학생에게 달라붙는 러브코메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을.

요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불순한 이성교제니 뭐니 하면서 선생님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니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풋풋한 분위기를 바라는 선생님도 몇몇 있을 테니까.

'…그래도 안전 점검은 제대로 했겠지?'

그래도 손전등 같은 건 주겠지만 밤에 산을 돌아다니는 행위는 위험하다.

만약 경사가 진 곳에서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면 찰과상은 기본에 잘못했다간 머리가 깨질지도 모르니까.

"하아암— 졸려."

"어제 제대로 잠 안 잤어?"

수학여행 전날이지만 만일에 대비해 새벽에 순찰을 돌았던 나는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전에 봤던 까다로운 흑마법사가 나타났을 시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잤을 거다.

물론 그대로 말했다간 계속해서 걱정할 게 분명하니 나는 민아에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다.

"첫 수학여행이라 그런가 봐. 솔직히 가는 곳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건 그렇지…. 어? 첫 수학여행?"

"그동안은 동생 좀 돌보느라 안 갔는데 부모님이 한 번쯤은 가라고 말하기도 했고, 하유도 자기 다 컸다고 그러더라."

"신기하네. 하유는 귀엽고. 나도 그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반 별로 줄을 서서 애들이 다 모일 때까지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어느덧 9시가 다가오자 선생님의 말에 따라 관광버스에 올랐다.

적당히 뒷자리로 가 창가 쪽에 앉아 팔을 기대어 턱을 괴고는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흔들리더니 안전 벨트를 메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말을 제대로 따를리가 없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선생님이 확인할 때만 벨트를 멘 척을 하고 있다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바로 푼 나는 주머니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가 꽂았다.

그러고는 등받이를 살짝 뒤로 기울인 후 최대한 편한 자세로 기대어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건물이라던지 가로수 같은 것들이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걸 보다가 점점 눈이 감기길래 도착하면 깨워달라고 말한 후 나는 바로 잠들었다.

***

무의식의 바닷속을 유영하던 의식이 어딘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드림랜드로 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만, 꿈속에서도 날 가만히 두지 않는 새끼는 쳐 죽여도 할 말이 없을 테니 순순히 끌려가기로 했다.

그러자 주변 배경이 갑자기 숲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나는 두루마기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한복이라 말할 거 같은 걸 입고 갓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한복에는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원래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로 물들어 있었고, 한쪽 손으로는 마찬가지로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있었다.

상황을 유추해 보기 위해 잠시 시대상을 추측해 보려 했지만 비어 있는 공간을 나무들이 점점 채워가며 그로 인해 어둠이 드리워 분위기가 음산해질 즈음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미친 듯이 뛰어서 내려가며 헐떡이는 숨소리에서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이 정도의 감정으로는 내게서 어떤 공포도 끌어낼 수 없기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판단하려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새 마을 같은 곳으로 내려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마을에는 커다란 기와집이 두 개 정도 보였고, 이외에는 전부 초가집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조선 시대인 걸까.

혹시 고려 시대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옷이랑 집만 보고 시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역사 전문가는 아니니까.

할머니가 말하길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선 원혼이 살던 시대라던지 여러 가지를 잘 파악하는 게 무당으로서 좋은 자세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나는 원한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다 패버려서 성불(물리)시키고 싶다.

좋은 귀신은 죽은 귀신…이 아니라 성불한 귀신 뿐이니까.

"응?"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눈앞에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지금 내가 빙의한 듯한 인물을 걱정하듯이 질문을 해왔지만, 내 몸을 들리지 않는 건지 무작정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이 저 사람의 목에 닿기 직전에—

"여기까지."

—불쾌감이 생긴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저기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도, 목젖까지 검이 닿은 눈앞의 사람도, 그리고 지금 사람을 베려고 했던 내 몸— 아니, 망령의 몸까지.

그리고 반쯤 잠들어 있던 의식을 또렷하게 일깨운 후 움직이자 겹쳐져 있던 시야가 분리됐다.

직후 뒤를 돌아 망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자 피범벅인 옷을 입고 얼굴이 녹아내린 사내가 보였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산성 용액은 없을 테니 아마도 이 사람은 독에 당한 거겠지.

하지만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아직까지 남아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려드는 걸까.

나는 방금 검을 휘두르려는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연약한 인간의 피부 따위는 간단하게 자를 것처럼 나아가던 묵직했던 감각이 나에게 있어 불쾌감을 가져왔다.

범죄를 저질렀거나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흑마법사라면 몇 번을 베어 죽여도 괜찮지만 무고한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을 죽인다면 나도 그 범죄자나 흑마법사와 다를 바가 없기에.

일단 나는 이 환상을 벗어나기로 했다.

녀석의 원한이 커지고 커져서 결국 인간의 지성마저 잡아먹어 버린 건지 호의적인 느낌은커녕 금방이라도 내 몸을 빼앗으려 드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선비로 보이는데 남자가 여자애 몸을 빼앗으려는 게 정상이냐?!"

마력을 꾹꾹 담아 한 번 발을 구르자 바닥에 금이 가더니 점점 퍼져서 하늘까지 균열이 생겼다.

잠시 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조각조각 박살 난 배경은 저 아래로 떨어지면서 가루가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조각이 전부 사라지면 꿈에서 깨야 정상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저쪽에서 검을 든 선비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걸 노려본다고 해야 하는 걸까.

얼굴이 녹아내려서 눈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저 선비는 거열형이라도 당했는지 어깨와 허벅지 관절 부위에 무언가 꿰멘 흔적과 함께 옷이 찢어져 있었다.

그럼 아마 흉악한 범죄를 일으켰다는 뜻일 텐데 이렇게 망령으로 남았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양심이 터져가지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거나 억울하게 형벌을 받았거나.

방금 느꼈던 두려움이 가득 찬 숨소리라던가 얼굴이 녹아내릴 정도의 독을 맞았던 걸 생각한다면 아마 후자 쪽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 달콤한 꿈을 방해하는 녀석일 뿐이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려 양단해 버리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그를 가만히 기다린다.

그동안 어느 정도로 때려야 성불하지 않을지 계산을 하다가 그가 내려치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그는 힘으로 손을 빼내려 들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성불 펀치!"

적당히 힘을 조절해서 녀석의 명치에다가 한 방 세게 꽂아버리니 북 치는 소리 정도가 아니라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충격에 피부가 터지며 갈비뼈는 완전히 으스러졌고, 그 상처를 통해 진득한 원한이 새어 나왔다.

"이러니까 그동안 건든 무당이 없지. 어지간히도 쌓여 있네."

이전에 할머니한테서 배웠던 주술로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어디서 계속 솟아나는 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 방식대로 해야겠다 싶어 명치에다가 손을 집어넣고는 최대한 많은 원한을 뭉쳐서 빼냈다.

그러고는 별빛을 그러모아 불태워 버리자 괴상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이 정도면 수학여행 동안은 사고 치지 않겠다 싶어서 손을 놓으니 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하, 감사 인사도 없네. 망령이 그렇지 뭐."

이번에야말로 의식이 각성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니 버스는 멈춰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민아도 사라져 있어서 창문 밖을 보니 휴게소에 도착했던 거였다.

나는 망령 새끼가 정신도 못 차리고 미쳐 날뛴건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휴게소에 왔으면 간식을 사 먹어야 하는 법.

가성비는 최악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집에서 해먹으면 그냥 무난한 맛일 뿐이지만 분위기라는 게 그걸 다 커버하는 거다.

'—라고 수학여행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이 말했다.'

나는 미어캣처럼 애들이 다 나갔는지 살펴봤다.

몇몇 애들은 폰이나 만지면서 무언가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가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혹시 내가 늦게 일어나서 들어올 시간일까 싶어서 창밖을 다시 보니 간식 가게 앞에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지금 나갔다가 바로 선생님이 부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겠다 싶어서 지갑을 들고 건물까지 뛰어가니 민아가 감자 구이를 두 개 들고 있었다.

"어, 일어났네? 피곤할까 봐 그대로 뒀는데."

"그래도 조금 자니까 개운하더라."

"아, 여기 이거."

"오, 땡큐."

잠자고 있던 나를 위해서 이걸 사 온 민아에게 감동하며 나무 꼬챙이로 큰 알맹이를 하나 찍어서 그대로 입으로 가져오자 버터의 향이 스르륵 흘러가면서 설익은 감자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오, 오오오!"

"맛있어?"

"그냥 평범하네."

"뭐야 그게."

하지만 무언가 중독성이 있는 맛에 반복해서 먹다 보니 버스에 들어가기도 전에 종이 접시가 텅 비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민아한테 뭔가 말할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응? 왜 그래?"

"이번 수학여행은 좀 조심하는 게 좋겠어."

"또 그거야?"

"내가 자면서 약간 손 좀 봐줘가지고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네 할머니께서 주신 부적이면 괜찮겠지?"

"잠깐만."

나는 민아가 지갑에다가 넣어 둔 부적이 제대로 된 효과를 내도록 마력을 약간 집어넣었다.

노란 괴황지에 닭 피와 여러 가지를 섞은 것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주문을 적어둔 부적은 존재만으로 잡귀 정도는 몰아내지만, 짬이 찬 병장처럼 한으로 가득한 귀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만났던 녀석은 내가 직접 원한을 불태워주긴 했지만, 그 원흉을 찾아서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원한은 우물처럼 계속 솟아날 거다.

민아의 부적에 적힌 주문을 활성화하며 추가로 증폭 주문까지 더하며 나는 생각했다.

'그 망령을 조진다고 쳐도 원흉이란 녀석은 여전히 존재할 테니까 어떻게든 둘 다 같이 없애버려야겠지.'

버스에 올라타 다시 엔진이 움직이는 걸 느끼며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고민은 중간의 체험 활동까지 마치고 숙소에 도착한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숙소 뒤쪽에 있는 산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자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나를 쳐다봤다.

"뱀 새끼가 어딜 쳐다보는 거냐."

집요하게 날 쳐다보는 시선을 손짓으로 치워 버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산이 우리가 내일 담력훈련을 할 장소였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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