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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91화 (91/154)

〈 91화 〉 깊은 해저 속

* * *

내가 모든 기억을 잃고 처음 깨어난 장소.

컨테이너에서 모두의 밧줄을 풀어 준 나는 곧바로 모포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뭐 하시는 건가요?"

"뭔가 쓸 만한 게 있을까 찾아보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아마도… 메리였던가.

낯을 많이 가리던 사람으로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있던 인물들도 점점 이름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때도 최대한 쾌활한 모습을 보이려 했던 에밀리아.

딥 원에 대해 알고 있고, 내가 아는 지인들과 같은 출신인 이한설 씨.

정의감이 넘치던 윌리엄과 평범한 대학생인 타케시까지.

정말 그리웠던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볼 때마다 목이 그인 채로 피를 흘리는 모습이 오버랩되어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가 자기소개가 늦었나요?"

"아하하, 괜찮아요. 혹시 이런 상황에 익숙하신 건가요?"

피눈물을 흘리던 에밀리아가 다가와 괜찮다고 대꾸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황해하며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녀의 얼굴은 핏자국 하나 없이 멀쩡해졌지만, 당황스러웠던 나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요. 저기요?"

"아, 제가 잠시 기억이 혼란스러워서요."

"당신도 그러세요? 저도 머리가 지끈거려가지고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는 제임스라고 합니다. 아마도 특수 부대원이고요."

이전에 가파른 절벽을 오르거나 딥 원 혼종들을 쓰러뜨리는 걸 보고 다들 특수 부대원이 아니냐고 했었으니 이번에 잘 써먹기로 했다.

혹시라도 끔찍한 환각을 다시 볼까 싶어서 최대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린 나는 캐비넷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어두운 녹색의 커다란 모포.

"여기 있었네."

"뭔가 찾았나요?"

내 혼잣말을 들은 에밀리아가 곁으로 다가와 같이 캐비넷 안을 살펴봤다.

"이건… 모포네요."

"밖은 어두우니까 이걸 덮고 다닌다면 웬만해서는 납치범들에게 들키지 않을 거야."

"오! 좋은 생각이네요."

에밀리아가 모포를 하나 꺼내 머리까지 뒤집어쓰는 동안 나는 옆에 있던 캐비넷도 확인했다.

"자, 다들 이리 와서 하나씩 챙겨요."

저기서 자신들을 왜 납치했는지 추리하던 남자들과 옆에서 우물쭈물거리던 메리에게 모포를 하나씩 나눠 주던 그녀는 나에게도 하나를 씌워줬다.

"잠시만요. 여기 모서리를 이렇게… 됐다."

"감사합니다."

"튼튼하게 묶었으니까 잘 안 풀릴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묶인 매듭을 약간 당겨봤지만, 간단히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나는 캐비넷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자세히 살펴봤지만 안에는 오직 모포 뿐이었다.

"일단 나갈까요? 여기 있어 봤자 납치범을 기다리는 거니까."

"빨리 나가서 경찰에 신고하죠!"

창밖을 보며 수상한 그림자는 없는지 확인한 후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깊은 어둠과 그걸 밝히는 작은 광원이 보였다.

길을 이어 주는 발광석.

이걸 따라서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왔던 거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이게 길인가 보네요."

"일단 이걸 따라가야겠죠…?"

"지금은 선택지가 없네요."

"혹시 모르니까 약간 떨어져서 가죠."

나는 타케시가 가져온 밧줄을 빌려 허리에다가 묶었다.

그걸 잡은 일행들을 이끌어 선두에 선 나는 발광석으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져서 길을 따라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몇 분 동안 걷자 입이 근질거렸는지 에밀리아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가 여길 온 건지, 자기는 여행을 하다가 수상한 사람을 만났다며 물꼬를 트기 시작한 그녀는 갈림길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쉬지 않았다.

하나 둘 씩 대화에 참여하던 그들도 에밀리아의 입담에 지친 건지 등이 따가울 정도로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가— "

"갈림길이네요."

"앗! 그럼 어느 쪽으로 갈지 정해야겠네요!"

이제서야 수다의 폭풍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나오는 타케시는 재빨리 의견을 꺼냈다.

나도 일단 뒤돌아서 대화하기 위해 밧줄을 잡자 단단하면서 거친 느낌이 아닌 물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밧줄을 묶어뒀는데 어째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내리자 선홍빛의 기다란 것이 허리에 묶여 있었다.

고무처럼 탄력이 있으면서도 미끌거리는 느낌에 불쾌감이 들어 바로 놓고는 고개를 들자 그제서야 이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의 배가 갈라져서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고, 그 상처로 튀어나온 창자가 하나로 엮여져서 내 허리에 묶여져있던 거였다.

"너때문이야너때문이야너때문이야너때문이야."

"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

피가래가 들끓어서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나를 질타했다.

일행들의 얼굴에 난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흐르더니 눈알이 녹아내리며 입꼬리는 귀까지 찢어졌다.

저들의 고개가 돌아가선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며 점점 다가오려 하자 나는 한 발자국 뒷걸음질했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내게 닥쳐올 원망들을 기다리자 정상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제임스 씨? 괜찮으세요?"

"어, 예? 괜찮습니다. 잠시 헛것이라도 본 모양이네요."

"납치당할 때 방망이 같은 거로 머리를 맞은 건 아닐까요? 저도 일어날 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는데."

"혹시 어지러우면 제가 앞에 설게요."

모두 내게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게 방금 들렸던 원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정신 차리기 위해 자국이 남을 정도로 양 뺨을 세게 때린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일단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하는 게 우선일 거 같네요."

"주변에 사람은 안 보이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럼 다수결로 갑시다. 저는 오른쪽이 좋을 거 같아요."

오른쪽에는 가방이라던지 여러 가지 짐이 보관된 컨테이너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도 또한 오른쪽을 골랐고, 다행히도 과반수 이상이 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

일행들이 컨테이너를 조사할 때 혼종들이 도착했었으니 조금 빨리 가야겠다 싶었던 나는 발걸음의 빨리 했다.

바위를 대충 깎은 것처럼 여기저기 돌출된 곳이 있는 바닥을 오랬동안 걸어 다니느라 불평 하나쯤은 나와야 할 텐데 모두들 꾹 참으면서 가다 보니 저 멀리서 불이 켜져 있는 컨테이너가 하나 보였다.

나는 당연하게도 나중에 올 혼종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서겠다고 말했고, 이전과 똑같이 윌리엄도 같이 서기로 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밝은 옷가지가 모포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그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나는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저기 멀리서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줄기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저번에 숲속에서 봤던 반짝이는 안광이 스쳐 지나가는 듯이 보였다.

이곳의 광원이라고는 바닥의 발광석이나 컨테이너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밖에는 없어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환각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이래서는 위험하겠다 싶어서 검지 손가락의 마디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자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입안에서 비릿한 쇠 냄새가 맴돌았다.

물고 있던 입을 떼자 상처 부위에서 송글송글 맺힌 핏방울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혹시나 혼종들이 피 냄새라도 맡지 않을까 상처 부위를 핥았다.

'상어는 물 속에 퍼진 피를 몇백 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다고 하니까. 반은 생선인 녀석들도 그럴 수 있겠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도 모포로 닦아낸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환각이 계속해서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손가락 덕분인지 컨테이너의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제외하면 무언가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있느라 윌리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 냄새라도 맡은 것인지 그의 목소리에서 당황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저기 제임스 씨, 혹시 어디 다치신 건가요?"

"아뇨. 아니, 다치긴 다쳤는데 제가 직접 한 겁니다."

"자해를 했다고요?"

"방금 전부터 이상한 게 보여가지고, 이러다가 누군가 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아서요."

만약 바닥에 깔린 발광석을 따라 혼종 두 명이 걸어오는 환각이 보였다면, 나는 곧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마치 저기에 오는 그림자처럼… 응?'

나는 환각이 다시 나타난 건 아닐까 깨물지 않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옆에 있는 윌리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윌리엄, 저기 보여요?"

"…사람?"

"일단 조금만 뒤로 물러섭시다."

어둠 속에서 몸을 가려 저들에게 보일 리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저들의 밤눈이 밝아서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제가 멀리 있는 녀석을 맡겠습니다."

나는 윌리엄에게 한 마디만 남긴 후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다가 갔다.

저들이 나를 지나쳐 컨테이너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 왼쪽에 있던 녀석의 입을 가리며 한쪽 팔로 경동맥을 압박했고, 옆에 있던 혼종은 깜짝 놀라며 내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윌리엄에 의해 저지당했다.

여기서 그대로 목을 꺾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옷을 들추지 않는 이상 이들은 겉보기엔 인간처럼 보일 테니 내가 특수 부대원이라고 속였어도 충격을 받을 건 자명했다.

비명을 질러봤자 도울 사람도 없으니 입을 막던 손으로 녀석이 허튼짓을 못 하도록 몸통을 꽉 붙잡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빠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살펴 녀석이 의식을 잃은 걸 확인한 후 바닥에다가 버렸고, 금방이라도 윌리엄의 구속에서 풀어나려는 혼종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동료가 당한 것에 당황한 혼종의 얼굴에 곧장 내 주먹이 꽂혔고, 혹시 몰라 명치와 목젖을 힘껏 때려주니 괴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끄헤엑…."

—털썩.

쓰러진 녀석은 꿈틀대다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죽었나 싶어서 맥을 짚었더니 정상적으로 심장은 뛰고 있었다.

사람을 놀래키는 녀석을 위해 미리 빌려 둔 밧줄로 녀석들을 묶은 다음 소란을 듣고 나온 일행들을 반겨 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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