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92화 (92/154)

〈 92화 〉 깊은 해저 속

* * *

여행 가방을 챙겨서 나온 일행들은 쓰러져 있는 혼종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잘못했으면 이들처럼 다시 밧줄에 묶여서 무슨 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일행들이 기절한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한 명, 한설 씨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혼종에게 다가가 동공이라던지 손을 관찰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잠시 추리를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커다란 동굴에다가 컨테이너까지 갖다 두고는 사람들을 납치할 수 있는 단체는 중동 쪽의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거든요."

"테러리스트 말인가요?"

"솔직히 중동 근처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여행하는 사람을 납치한 것도 수상한데, 순찰을 돌고 있던 사람의 외모를 보니까 더욱 수상하게 느껴지네요."

"거기는 다른 국적 사람도 받지 않아요? 자발적으로 들어오거나 납치했는데 유능하면 그런 거로 알고 있는데."

옆에서 고민하던 윌리엄도 우리가 대화하는 걸 들었는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한설 씨는 혼종이 입고 있는 옷을 들춰서 안에 비늘이 있는 걸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발견했나요? 문신이라던가?"

"아뇨. 아직까진 가설의 영역이니 함부로 말해봤자 혼란에 빠질 뿐입니다."

그는 벌써부터 이곳이 어디인지 대략 알아차린 모양이다.

우리가 심해어를 발견하고서 그가 말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하겠지.

"일단 이 사람들은 묶어두고 총기만 가져가죠."

"제가 절대 풀지 못하는 매듭법을 알고 있어요!"

"저는 총 같은 건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전 아직 미필이라."

"음…. 하나는 제가 챙길 테니까 나머지 하나는 원하시는 분께서 들고 계세요."

모두들 방아쇠를 당겨서 어쩌면 한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꺼려지는지 망설였지만, 결국 결심한 윌리엄이 나서서 총대를 맸다.

나는 견착하고 조준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다음 안전장치를 걸어두었다.

위험한 상황에만 풀라고 몇 번이고 말한 나는 다시금 바닥에 박힌 발광석을 따라 길을 떠났다.

갈림길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나는 거의 매일 악몽에서 보던 의식장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에밀리아의 가방에서 나온 망원경을 빌려서 딥 원 주술사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끔찍한 모습을 처음 봤을 때보다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눈을 찌푸리는 걸 본 일행들은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다지 보는 건 추천하지 않을게요."

"혹시 잔인한 건가요? 인신 공양이라던가."

"그럼 설마 저희도…?"

"잠시만요."

인신 공양이라는 단어를 들은 한설 씨는 내게서 거의 망원경을 빼앗아가듯이 가져가고는 의식장을 살펴봤다.

"흠, 아뇨, 인신 공양은 아니네요."

"그럼 저도 한번 볼래요!"

"쉬잇. 들킬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하시고, 유혈이 낭자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까 하지 마세요."

"에이…."

궁금해서 죽으려던 에밀리아는 두 명이나 보지 말라고 경고해서 그런지 망원경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사고를 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 해저 동굴에 있을 혼종들의 수를 셈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일단 예전에 했던 것처럼 절벽을 올라가서 의식장을 우회하고….'

손을 움직여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위적으로 깎인 듯한 절벽을 만져 본다.

올라가기 편하지는 않지만 손가락을 걸칠 정도로 거친 표면이니 내 감각을 믿고 올라가야겠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높은 절벽을 오른 건지 생각하던 나는 혼종들의 휴게소로 생각되는 방에 대해 떠올렸다.

안에서 쉬고 있는 이들은 총 셋.

총을 쓰지 않아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줄사다리로 의식장과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경비가 찾아온다면 큰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다리를 떨어뜨린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그것 때문에 딥 원 주술사가 증원을 데려왔으니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한 명에게 그쪽의 감시를 맡겨야겠는데….'

까마득한 높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으니 만일 경비가 올라오려고 한다면 강제로 손을 떼버리거나 사다리 자체를 떨어뜨려서 죽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한순간의 망설임이 실패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결단력이 있는 사람을 세워놔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거다.

책임감을 알면서도 나선 윌리엄에게 맡겨야 할까, 혹은 이들이 혼종인 걸 아는 한설 씨에게 맡겨야 할까.

'그냥 둘 모두에게 맡겨야겠다.'

물론 의식장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혼종이 오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 지 안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는가.

일단 나는 일행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기로 했다.

"—라서 저 경비들을 뚫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 저는 여기로 우회하려고 해요."

"여기요?"

"네. 여기요."

내가 반쯤 기대고 있는 절벽을 노크하듯이 두들기자 일행들은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 절벽을 오르시겠다고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편이 더 안전할 겁니다. 말하긴 어렵지만 저쪽으로는 무사히 건너가기가 어려울 거예요."

"도대체 뭘 봤길래 그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그 방법은—"

일행들이 한 명씩 입을 열자 시장이라도 온 것처럼 금방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하기에 나는 헛기침을 해서 이목을 끌었다.

"크흠! 뒤에 납치범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강행 돌파를 한다는 도박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안전 장비도 없이 이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것도 도박수나 마찬가지잖아요."

"맞아요. 아무리 특수 부대원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을까요?"

"어려워도 불가능은 아니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에 묶은 밧줄이 튼튼한지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절벽에 있는 틈에다가 손가락을 넣어서 무너지지는 않는지 확인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단단한 암벽의 느낌이 물컹한 육벽처럼 느껴졌지만, 이빨이 깨질 정도로 이를 악물거나 피가 날 정도로 혀를 깨물어서 최대한 환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해 발을 헛디디거나 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위에 도착한 나는 밧줄을 고정시킬 만한 바위를 찾아서 묶었다.

그러고는 아래에 있을 일행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몇 번 흔들자 요동치던 밧줄이 누군가 잡은 것인지 무게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매듭이 풀릴까 봐 바닥에 앉아 줄을 꽉 잡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올라온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기 보시지만 마시고 손 좀…."

"아, 미안합니다."

밧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절벽을 오르는데는 체력은 물론 심력도 많이 소모될 테니 저렇게 팔이 부들대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이러다간 메리 양의 손에서 힘이 빠질 것만 같아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 조심스레 잡아당기니 가볍게 끌어당길 수 있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저기 뒤에서 잠시 쉬시죠. 저는 올라오는 분들을 돕겠습니다."

"네. 그럼 저기… 뒤에 있을게요."

이후 에밀리아, 타케시, 이한설 씨와 윌리엄이 모두 올라오는 걸 도운 나는 묶었던 밧줄을 풀어 일행이 메고 있는 가방에다가 집어넣었다.

그리고 휴게실이 있을 곳으로 걸어가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이전과는 대화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특수 부대원이라서 그런가 대단하네요."

"나는 맨손으로 절벽 오르는 거는 뉴스에서 밖에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게다가 익숙한 것처럼 밧줄도 풀고 바로 방을 수색하고."

"아하하, 많이 해서 그런지 본능에 새겨졌나 봐요."

거짓말을 해서 뜨끔거렸지만 이대로 철면피를 쓰고 나아가지 않으면 계획이 망할 수도 있으니 나는 양심이 말하는 소리를 무시했다.

아래에 있을 녀석들을 주의하며 조용히 말하면서 걷다 보니 저 멀리서 어두운 암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문이 보였고, 문틈 아래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며 가끔씩 그림자가 오갔다.

"아무래도 저희가 출구 후보에 도달한 모양인데요."

"오, 저긴 누가 봐도 출구라고 광고하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안에 납치범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문에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엄폐물이라던지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이 탁 트인 절벽과 저 너머에 보이는 줄사다리.

에밀리아가 문에다가 살짝 귀를 갖다 대며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사다리 쪽으로 가서 아래를 확인했다.

경비를 서고 있지만 탈출한 사람이 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하는 건지 하품을 쩍쩍 내쉬며 가만히 서 있는 혼종 경비가 둘.

그리고 이상한 문양인지 글자가 복잡하게 새겨진 마법진과 그걸 둘러싼 기둥이 있고, 딥 원 주술사는 그 기둥에 등을 기대고는 거의 졸고 있었다.

이러면 사다리는 떨어뜨리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나는 다시 일행에게 돌아갔다.

"아, 오셨어요? 뭐 확인하시러 간 거예요?"

"저기 사다리가 있길래 혹시 올라오지 않을까 확인했습니다."

"저희가 여기 있는 사람을 제압하는 와중에 오면 어쩌죠?"

"괜찮을 겁니다. 경비도 대충 하면서 하품이나 하고 있고, 한 명은 대놓고 졸던데요?"

"음…."

"그럼 윌리엄 씨와 한설 씨가 저쪽에서 사다리를 맡아주시겠어요? 누가 올라오려고 그러면 바로 떨어뜨리세요."

"네 명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압하실 수 있으신가요?"

혹시라도 안에 있는 납치범들이 많아서 역으로 제압당하면 어떡할지 고민하는 게 보였다.

"그다지 쓰고 싶지는 않지만, 최후의 최후를 위한 무기가 여기 있잖아요?"

나는 메고 있는 총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직후 기습 작전에 대해 설명을 마친 나는 모두 각각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문에다가 노크하기 위해 손을 갖다 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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