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깊은 해저 속
* * *
피를 흡수해 더욱 짙어진 녹색의 모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냄새가 났다.
수르스트뢰밍이라고 아는가?
스웨덴의 전통 음식으로 청어를 소금에 절여 삭힌 음식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 신기록을 경신할 거 같았다.
'아니, 생선 대가리가 달리긴 했지만 먹을 건 아닌가?'
수르스트뢰밍은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녀석은 삼키기라도 한다면 큰일 나니까.
나는 썩은 청어 몇백 마리가 바다에서 날뛰는 듯한 냄새를 풍기는 모포의 매듭을 풀어 버렸다.
혹시나 옷에 조금이라도 묻지는 않았을까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동하는 곳이 다른 동굴이던 바깥이던 간에 이제는 모포가 필요 없어졌으므로 저 멀리 냄새가 닿지 않는 곳에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온 나는 한설 씨가 마법진을 살펴보는 것을 봤다.
바닥을 손으로 스윽 훑으면서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딥 원 주술사의 시체를 뒤졌다.
그러더니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새하얀 가루를 꺼내서 피를 닦으면서 지워진 마법진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대충 뿌리는데도 정해진 자리라도 있는 것처럼 떨어진 가루는 천천히 원래 모습을 복원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된 마법진 위에 선 우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설 씨의 헹동을 기다렸다.
"후…. 만약 실수한다면 큰일 나겠지만, 어차피 저희에겐 이 방법밖에 없네요."
"혹시 마력이 많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도울 의향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마법들은 마력을 별로 쓰지 않아요. 전투 마법사는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라 많이 필요하겠지만."
그가 말한 큰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점점 발밑의 마법진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동굴 전체를 뒤덮을 거 같은 빛이 우리를 삼키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마치 놀이기구라도 타는 것처럼 내장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몰라 방아쇠 위에 올려 둔 손가락에 힘을 줄 준비를 하며 눈을 가리는 엄청난 빛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니 이상해진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꺼풀 너머로 빛이 사그라들자 나는 당황해하는 딥 원 주술사와 혼종 경비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이마에다가 붉은 구멍을 사이좋게 하나씩 만들어줬다.
곧 총성을 들은 다른 경비들이 이쪽으로 몰려들 것이 분명하니 일단 이곳을 밝히는 횃불들을 모조리 꺼버리기로 했다.
녀석들이 손전등을 가지고 다닐지도 모르겠지만, 어둠 속에서 방심한 채로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것들에게는 모두 바람구멍을 선물해주기로 결심한 나는 기둥 사이에 놓여 있는 횃대를 쓰러뜨려 칭칭 감긴 천 부분을 밟았다.
숯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불티를 흩뿌리던 횃불에 발이 점점 뜨거워지며 신발이 약간 탄 거 같았지만 횃불은 무사히 끌 수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각자 횃불을 끄는 걸 확인한 나는 미리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로 발을 옮겼다.
줄사다리 근처, 내려오는 경비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고, 반대편에서 오는 녀석들과는 일직선으로 위치해 있으니 저격하기도 좋은 장소이다.
만일 위치가 발각된다면 기둥 뒤에 숨을 수도 있어서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였다.
나는 일행들이 어떻게든 찾아온 걸 확인한 후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눈을 감으며 귀를 기울였다.
동굴 안에서 총성이 울려 퍼져서 메아리가 쳤으니 제물들이 잠들어 있는 컨테이너까지도 소리가 들렸을 터.
혹시 경비들이 모두 휴게실에 있는 걸까.
내가 있던 동굴의 녀석들이 컨테이너로 온 것은 그럼 도대체 뭐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삐걱거리며 무언가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밧줄이 흔들리며 벽에 부딫혔다.
"니미럴, 썅놈 새끼들. 제일 짬밥 덜 먹었다고 나만 보내? 보나 마나 신병 새끼들이 잘못 쏜 거겠지."
천운이 따라 준 것인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경비는 단 한 명뿐이었다.
"씨이뻘. 여긴 왜 이리 어두워? 야! 누가 불 껐냐?!"
구시렁거리면서 내려오는 그가 거의 전부 내려왔을 때, 나는 녀석의 뒷목을 잡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어, 어어?!"
그대로 뒤통수로 바닥과 찐하게 키스한 녀석은 머리를 강타한 엄청난 충격에 끄응대는 소리밖에는 내지 못했다.
그런 녀석을 위해 내가 목 위에다가 발을 올린 후 조금씩 힘을 가하자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며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지만, 이것들은 혼종일 뿐 사람이 아니라며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움찔거리는 시체를 발로 밀어내고는 휴게소에 있을 녀석들을 소탕하기 위해 천천히 사다리를 오르던 나는 내려오고 있던 경비를 만났다.
"야! 빨리빨리 움직여야 될 거 아니야! 아래는 왜 불도 꺼진 거야?"
"내가 껐으니까."
"…어? 너 왜 목소리가—"
이상함을 알아챈 녀석이 다른 짓거리하기 전에 빠르게 올라가 발목을 잡은 후 그대로 당기자 저항하는 듯싶더니 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다.
"으아아—!"
—퍼억!
아래에서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즉사한 것에 안심한 나는 다시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배나 벅벅 긁으면서 TV를 보던 경비들도 간단하게 죽인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방송… 연도가 틀린데?"
내가 저택에서 깨어난 연도는 분명 2021년이었다.
하지만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보다도 몇 년 전.
혹시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그곳에서 깨어난 걸까?
의구심이 들어 TV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다.
"뭐야, 그냥 비디오였나. 심해니까 그럴 만하네."
전기는 어디서 끌어왔는지가 의문이었지만, 어딘가에 발전기가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내려가기로 했다.
그 사이에 경비가 찾아왔다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까.
여전히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나는 바닥이 끈적하게 늘러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환각인가 싶어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혀를 씹어서 알싸한 고통이 날 일깨우도록 했다.
그러고는 일행들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어째선지 끈적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쇠 냄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냄새가 근처를 나돌고 있었다.
마치 주변을 피칠갑이라도 한 것처럼 공기를 가득 채운 농후한 피 냄새가.
초콜릿 같으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한설 씨? 아멜리아 양? 장난치지 마세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직감했지만,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일행들의 이름을 부르며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다.
"타케시 씨! 메리 양! 윌—"
그리고 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여러 쌍의 안광을.
이 세상의 생명체가 아닌 듯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퍼졌고,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흔들리며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머리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으로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것이 뛰어오른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떨어졌다는 것을.
뒤늦은 주마등인지 내 행적들이 빠르게 눈앞을 지나갔고, 금방이라도 의식이 끊길 거 같았다.
'저 괴물만 아니었다면—'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빛무리가 생기더니 괴물을 삼킨 후 금방 사라졌다.
나는 누군가가 비웃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으로 의식이 가라앉았다.
—후후후.
***
"1회차는 이렇게 마무리인가."
이전의 행적을 따라 휴게실에 있던 혼종 경비들을 제압하기까지는 같았지만, 그 이후는 달랐다.
원래 같았으면 발광석이 없는 길 쪽으로 갔다가 심해 동굴에 있다는 걸 자각한 후 녀석들에게 걸리고 말지만, 이번에는 그걸 알고 있던 제임스가 주술사까지 죽이고 말았다.
계획대로라면 비늘을 뜯어내던 손톱을 뽑아내던 고문을 해서 탈출하는 거였지만 이한설 덕분에 비틀리고 말았다.
그는 도박수로 자기도 알아보지 못한 마법진을 사용해서 다른 기지로 이동하고 말았지만, 내가 거기에다가 한술 더 추가해줬다.
이름하야 '공간의 틈새에서 사는 괴물'.
틴달로스의 사냥개와는 다르게 공간 이동을 하다 보면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더욱 낮은 확률로 만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다이스 갓이 손을 써서 엄청난 확률을 뚫고 그 괴물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가 손을 쓴 것이지만 말이다.
관심을 가진 녀석을 쫓아 공간을 찢고 따라가서 넘어간 공간에 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몰살해 버리는 괴물이다.
사냥감만 노리는 사냥개보다 더욱 악질인 녀석은 내 명령을 수행한 후 자기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누가 본다면 추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제임스가 구르는 걸 구경하고 싶은 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흠…. 약간의 재미를 위해 이걸 조금만 추가해야겠군."
이전과는 다르게 바뀐 제임스의 일행을 바라보던 나는 암전된 그의 의식이 점점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두 번째 환상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렴. 겨우 한 번으로 좌절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나는 소리죽여 웃으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기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