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95화 (95/154)

〈 95화 〉 다시 한 번

* * *

눈을 뜨자 약간은 익숙해진 천장이 먼저 보였다.

다음으로는 밧줄로 묶인 사람들과 내 몸.

끔찍한 실패를 했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떠올리면서 손목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듭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 서서히 양팔에다가 힘을 주려다가 순간 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린 다음에 상처 부위에다가 소금을 뿌리고는 불로 지지는 것처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면서도 끔찍한 고통에 온몸의 힘이 풀려 버렸다.

내가 그러는 사이에 깨어난 타케시는 뭍에 올라온 새우처럼 퍼덕거리더니 패닉에 빠져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귀를 찌르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통받은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건 무시하고 밧줄을 빨리 풀기로 했다.

대충 묶어서 그런지 헐거웠던 매듭은 힘을 줘서 몇 번 당기자 끊어지듯이 풀어졌다.

손이 자유로워진 나는 몸과 팔뚝을 묶고 있던 것까지 해결한 다음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그러자 컨테이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고, 자신을 풀어달라는 목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소음 공해에 괴로웠던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윌리엄에게 다가가다가 그의 목에 있는 붉은 무언가를 보고 뇌가 작동을 정지하고 말았다.

마치 예리한 칼날로 베인 듯한 상처가 경동맥을 완전히 절단해서, 그 절단면으로 붉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환각이 괴롭히는 건가 싶어서 멀쩡해진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밧줄을 풀어 줘도 전혀 변하는 건 없었다.

'…실패의 영향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끔찍하다.

거의 매일 같이 악몽에 나와서 날 괴롭히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최대한 눈을 돌려 그들의 상처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행 모두의 밧줄을 풀어 준 나는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캐비넷에서 모포를 찾았다.

이후 이미 알고 있는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계획을 생각하던 나는 간략하게 소개를 마친 후 먼저 컨테이너를 나왔다.

***

일행들의 짐을 챙기고 혼종 경비 둘을 제압한 나는 빠르게 휴게실까지 도달해 나머지 쉬고 있던 이들마저 정리했다.

기절한 이들을 묶어두긴 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들이 깨어나기도 전에 일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무기고의 문을 당당하게 열어젖힌 후 실망한 일행들을 다독이며 이전에 사용했던 가장 멀쩡한 총기를 꺼냈다.

슬슬 익숙해지려는 차가운 감촉을 무시하며 저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다가 순간 에밀리아 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내 죄책감을 끌어올리기에 나는 재빨리 눈을 돌리며 밖으로 나왔고, 뒤쪽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감정의 교류 없이 그저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장한 나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엎드렸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머리가 아닌 다리.

딥 원 주술사가 마법진 근처에 있다는 게 흠이지만, 발동시키지 못하도록 주문 대신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탕!

마치 천둥처럼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지는 총성에 의식장 너머에서 경비를 서던 혼종들은 깜짝 놀랐고, 주술사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들은 그들은 무작정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함정인 것도 모르고.

총성이 또다시 두 번 울리고, 주술사와는 다르게 이마에 구멍이 난 그들은 달려오던 관성에 철퍼덕 앞으로 쓰러졌다.

동굴 내의 위협을 전부 처리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주술사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 녀석이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참아가면서 이곳을 탈출하려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거의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손의 피부가 벗겨지면서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녀석이 도망치는 것보다는 괜찮았다..

무슨 주문을 중얼거리는 녀석에게 달려가서 총알에 꿰뚫린 다리를 잘근잘근 짓밟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뼈가 아작나서 몇십 조각으로 골절된 다리뼈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근육을 찌르면서 함께 죽자고 말하는 거 같았다.

이상한 비명을 지르는 녀석의 입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올 때까지 다리가 연체 동물처럼 될 정도로 계속해서 밟자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끼에윽…. 대체 왜 이러는 거냐…?"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녀석이 동굴 전체에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비명을 지른 덕분에 일행들이 겁을 먹었는지 한 명도 내려오지 않은 덕분에 나는 폭력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끄, 끄아아아악! 알겠습니다! 나가게 도와드릴 테니 제발 다리만은!"

"너무 순순히 말하는 걸. 많이 수상하니까 내가 진심을 느낄 때까지만 참아라."

"도대체 뭐, 뭘 하려고?!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하나 남은 다리로 어기적 기어가는 녀석에게 다가가 멀쩡한 다리 쪽의 발목을 잡아서 마법진으로는 가지 못하도록 당겼다.

녀석은 날카로운 손톱을 바닥에다가 박아서 버티려고 했지만, 얼마나 예리했던 건지 오히려 바닥이 먼저 젤리 자르듯이 잘려 나갔다.

"그럼 먼저 하나—"

"끼에에에엑!"

다리 부분에 새로 난 비늘인지 다른 단단한 것들보다 부드러운 게 보여서 그걸 어떻게든 뽑아냈다.

도마 위에서 활어가 펄떡이듯이 경련하는 녀석을 위해 옆에 있던 비늘도 뽑아주자 꺽꺽대며 입인가 아가미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나를 더 뽑자 이번에는 잘못했다며 내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손이 발이 될 정도로 싹싹 빌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 개를 동시에 뜯어내자 손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손을 꽉 쥐더니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 모습에 희생자들이 살려달라고 빌 때는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상상하면서 단단한 녀석을 하나 뽑았다.

"끼에에…."

녀석은 힘이라도 빠진 것처럼 점점 비명 소리가 약해졌지만, 호흡의 빈도라던가 맥을 짚어서 심장의 고동을 느껴보면 점점 고통에 익숙해져 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통이란 절대로 무뎌지지 않는 법.

이럴 때는 새로운 자극을 가하면 되는 거다.

녀석의 한쪽 팔을 잡아 반대로 뒤집어 버린 나는 괴로워하는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길 바라는 듯한 눈빛에 역겨움을 느낀 나는 비늘이 벗겨진 쪽을 잡아서 거친 바위 바닥에다가 문댔다.

"끄어, 끼에에엑!"

우둘투둘한 표면과 그 사이에 있는 미세한 돌 조각이 비늘 너머에 있는 연약한 살결을 파고들었다.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파상풍이나 패혈증에 걸릴 게 분명했지만, 사람도 아닌 것에게 그런 건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슬슬 고문은 멈춰야 할듯하다.

관통된 녀석의 다리를 짓밟아서 연쇄 골절까지 일으켰으니 뼛조각이 혈관을 건드렸을 게 분명했고, 출혈량이 심상치 않아서 계속 고문을 이어간다면 싸늘한 시체로 변할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하게 행동한 건지 후회하면서 얼굴을 쓸다가 느껴지는 감촉에 피가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느끼는 고통에, 녀석이 내지르는 비명에 희열이라도 느꼈는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하려는 이가 광기에 먹혀서는 고문하는데 집중하면 어쩌자는 건지 자책하면서 나는 절벽에다가 이마로 박치기를 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따듯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끼다가 모포로 간단히 닦아냈다.

그제서야 주변을 가득 채운 생선 썩은 내와 피비린내가 반반 섞인 듯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후우, 이봐."

"예, 예!"

"나는 위로 올라가서 일행들을 데려올 거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공포심을 믿었다.

그것이 꾸며진 감정이라는 건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이전에 에반이 말했던 걸 잊지 말아야 했었다.

마법을 쓰는 이들은 대부분 정신력이 엄청나니 어떤 상황을 겪더라도 버틸 수 있다는 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느껴졌던 쓰라림을 참으며 일행들에게 탈출하자고 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들은 녀석의 주문에 당해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악몽에서 보던 익숙한 장면.

기둥에 묶인 우리들의 목을 베서 의식을 하려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때 순응했다면 일행들이 고통을 겪는 걸 안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생존 본능은 나를 묶었던 밧줄을 풀고 단검으로 그으려는 혼종의 손목을 잡도록 이끌었다.

당황해하는 녀석의 경동맥을 베어내고 눈에 보인 건 방금 죽인 혼종처럼 똑같이 목이 그인 일행들—

"으아아!"

다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를 맞이하는 것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동굴이었다.

—쿵! 쿠구궁!

주저앉은 채로 눈물이나 흘리다가 고개를 올리자 집채만 한 바위가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본능은 빨리 움직여서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온갖 감정에 사로잡힌 육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인 나는 그저 고통이 빠르게 지나가길 빌었고, 온몸이 으스러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암전됐다.

—푸흐흐.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듯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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