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다시 한 번
* * *
암전된 의식이 점점 부상하면서 눈꺼풀 너머로 빛이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온몸이 으깨지는 듯한 격통에 저절로 눈이 뜨이게 되었다.
벌써 두 번이나 실패한 나의 눈에는 싫지만 익숙해지려는 천장이 보였다.
마치 물을 잔뜩 흡수한 솜처럼 무거운 몸은 몽둥이로 오랫동안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서 움직이기 힘들었고,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잠깐만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정신이 되돌아왔고, 멀쩡하면서도 피로한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서 밧줄을 풀어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캐비넷을 뒤져 모포를 찾고 자기소개마저 마친 후 바로 컨테이너를 나온 우리들은 바닥에 박힌 발광석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괜히 쓸데없는 가방이나 짐을 챙기러 오른쪽으로 가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단 의식장 쪽으로 직행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갈림길에 도달하자 일행들을 설득했다.
사람이란 게 자신이 선택했다가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기에 왼쪽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혼종 경비가 어디 쯤에 있을지 가늠하면서 힐끗 뒤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목이 베인 상처에다가 추가로 눈이 파여서 피눈물을 흘리는 일행들의 모습은 제정신으로는 보기 힘들었다.
허리에 묶은 밧줄의 감촉이 내장처럼 물컹거리던 밧줄처럼 빳빳하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탈출한다는 일념만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앞에서 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갑자기 멈추자 당황한 일행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금방 눈치를 챈 윌리엄이 조용히 하라고 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에이, 진짜. 이 새끼들은 짐 옮길 때 알아서 꺼낼 것이지. 왜 우리한테 시키고 지랄이야?"
"야, 네가 참아라. 이번 의식만 성공하면 우리도 이딴 동굴말고 밖에서 당당히 걸어 다닐 수 있어."
"하찮은 인간들을 노예로 삼고 말이지? 하하하!"
녀석들이 하려는 의식의 정체는 뭔지 몰라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긴장감은 하나도 없이 뒷담이나 까며 걸어가던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허리에 묶었던 밧줄을 풀었다.
뒤에 있던 일행들이 뭐 하는 거냐고 작게 소리쳤지만, 난 그걸 무시하고 조심스레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들의 발소리에 맞춰 살금살금 걸어가 금방 녀석들의 뒤로 도달한 나는 손날로 한 명의 뒷목을 가격했다.
"억!"
"무, 무슨?!"
다행히도 한 번에 기절한 경비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당황해하며 뒤돌던 녀석에게는 인중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는 어떻게 팔을 들어 올려 막아보려고 했지만 내 주먹이 닿는 게 더 빨랐고, 앞니가 부러지는 감촉과 함께 누런 무언가가 핏방울과 함께 튀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쓰러지지 않아 얼굴을 몇 번 더 때려주자 그제서야 녀석은 기절했다.
그걸 본 일행들이 감탄하는 걸 들으면서 쓰러진 경비의 총기를 빼앗아 탄창을 확인했다.
한 번도 쏜 적이 없는지 가득 차 있는 황동색 총알을 보던 나는 다시 끼운 다음 노리쇠를 당겨 탄피가 잘 나오는지도 봤다.
'딥 원 주술사는 믿을 것이 안 된다…. 다리를 쏘지 않는다면 출혈 걱정은 없이 고문할 수 있겠지만, 녀석의 정신을 꺾을 수 있을지가 문제로군.'
나는 저번에 했던 실책을 떠올리며 가능한 방법을 떠올리려 했다.
'한설 씨에게 맡겼던 경우에는 갑자기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서 전부 몰살 시켰지. 그게 무조건 나타나는 건지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지 확인해야 할까?'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발톱이 목을 가르고, 이후 느껴진 고통이 아직까지도 가끔씩 환상통으로 나타나서 괴롭히기에 나는 약간 망설여졌다.
일단 지금은 주술사를 처리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한 나는 다시 갈 길을 걸어갔다.
이제 이쪽으로 올 경비는 이게 끝이지만, 그걸 모르는 일행들을 위해 허리에다가 밧줄을 묶은 채로 의식장에 도착한 나는 망원경을 빌려달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에밀리아 양의 가방에 있었는데 내가 바로 왼쪽으로 가자고 한 바람에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더 잘하면—'
—찰싹!
다음은 무슨 다음이란 말인가.
죽어도 돌아오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은 그만둬야 한다.
만일 날 이리로 보낸 그가 계속된 실패에 실망해서 이 회귀를 멈춘다면, 나의 고생도 고생이지만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 일행들의 얼굴이 악몽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성공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양손으로 뺨이 뜨거워질 정도로 때린 후 벽에 기대서 의식장 쪽으로 슬쩍 고개를 넘겼다.
횃대에 불이 붙어 있었지만 이곳까지는 닿지 않아 들킬 걱정이 없던 나는 천천히 이동해서 주술사가 어디 있는지 확인한 후, 방아쇠 위에다가 손가락을 올렸다.
—탕!
귀를 찌르는 익숙한 총성이 세 번 울린 후 뒤이어 들리는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적응할 수 없는 바다 냄새가 섞인 비릿하면서 역겨운 피비린내 너머로 화약 냄새가 맡아졌다.
안심하고 나오려는 일행에게 손짓해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흐릿하게 불빛에 비쳐진 사다리 쪽으로 경비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이 내려오고 나머지 두 명은 무방비한 상태로 아직 내려오고 있기에 그들의 등을 향해 선물을 줬다.
뼈를 부순 납탄을 고스란히 폐에다가 간직한 그들을 피를 토하며 사다리에서 떨어졌고, 높은 곳에 있던 하나는 그대로 즉사했다.
진작에 내려와서 경계를 하던 경비는 깜짝 놀라서 이쪽으로 총을 겨누지만 난 이미 그에게도 여러 발을 선물했다.
마찬가지로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는 경련하다가 결국 미동도 하지 않았고, 위험 요소를 전부 처리한 나는 안심하고 의식장으로 향했다.
제물들을 묶어두었던 기둥들과 가운데에 피로 점철된 마법진.
내가 가는 걸 보고 따라온 일행들은 그걸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뒤에서 인신 공양이니 물고기 괴물이니 떠드는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기억 속의 것과 대조시켜본다.
눈앞에 단검을 든 녀석이 목을 그으려고 달려들기에 자세히 살펴볼 경황은 없었지만, 대충 봐도 확연히 다른 모양새였다.
수많은 선들과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은 제물들이 흘린 피와 목숨을 집어삼키고 동굴을 무너뜨렸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저번처럼 괴물에게 죽을 것이 눈에 선했다.
차라리 경비라도 한 명을 살려 둬서 지상으로 나가는 마법진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쿨럭!"
아니, 아직 안 늦었다.
사다리를 거의 다 내려오다가 총을 맞고 떨어져서 그런지 다른 녀석과는 다르게 즉사는 피했나보다.
그러나 폐에 구멍이 나서 피를 토하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간 나는 흐리멍덩한 눈을 보며 신에게 빌었다.
부디 쓸 만한 걸 말하기 전에 죽지 않기를.
"너, 지상으로 가는 마법진을 아나?"
"쿨럭! 끄르륵."
—짜악!
"빨리 말해!"
"나는, 쿨럭, 컥."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금세 흐리멍덩한 눈에서 빛이 사라지며 고개가 꺾였다.
'…실패인가.'
부들거리는 손을 꽉 쥐며 일어선 나는 마법진을 고치는 한설 씨를 바라봤다.
'아니,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피는 흘릴 터.
시도해 보지 않고 이렇게 좌절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
이미 설명을 마친 건지 미리 마법진 위에 오른 일행들을 따라 올라선 나는 빛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벽을 찢고 나타난 괴물이었다.
그것이 팔 같은 것을 한 번 휘두르자 멀찍이 서 있던 경비와 주술사를 난도질해 버렸고, 내가 견착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날라왔다.
또다시 목 없는 내 몸을 바닥에서 바라보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웃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네 번째.
일행의 모습에 상처가 추가됐다.
이번에는 배가 찢어져서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경비들을 제압해나간 나는 의식장에서 주술사를 죽인 후 기절시켰던 녀석들을 깨워서 고문을 했다.
그걸 본 일행들이 반감을 느끼며 그들을 도우려 다가 갔다가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날카로운 손톱에 목이 찔려 죽은 그녀에 분노한 나는 총으로 모든 경비를 죽이고 자살했다.
다섯 번째.
마치 송곳이 뇌를 관통한 것 같은 고통에 깨어난 나는 밧줄을 풀고 일어났다.
목이 찢어져서 반쯤 덜렁거리는 일행들을 바라보다가 혼자서 행동하기 위해 그냥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이후 경비들을 제압하고 주술사를 죽인 나는 바다로 이어진 곳으로 가서 정보를 말하지 않는 녀석들을 하나씩 빠트렸다.
심해의 수압에 몸이 버티지 못해 터져 죽어 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곱씹으며 컨테이너로 돌아온 나는 일행들을 이끌고 마법진으로 향했고, 한설 씨에게 경비에게 들었던 것들을 설명했다.
그러나 들은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우리들은 미아가 되었다.
탈출할 방법조차 없는 그곳에서 굶어 죽기 전에 우리들은 차라리 고통 없이 가기로 했다.
일일이 방아쇠를 당긴 나는 마지막으로 턱에다가 갖다 댔다.
—탕!
여섯 번째.
이번에는 이마에 구멍이 뚫린 일행들을 보다가 밖으로 나섰다.
두통이 심해지며 집중력이 떨어진 나는 그만 경비들을 제압하다가 허벅지에 총을 맞고 말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는 겨눈 총구였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
열 번째 이후로는 일일이 세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드디어 뇌를 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을 참으며 주술사를 죽이고 경비들을 제압했다.
"지상으로 나가는 마법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
—탕!
그렇게 말하며 대답을 듣기 전에 한 명을 죽인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 뭐든지 말하려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죽인 녀석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그려보라고 시킨 나는 그들이 그린 것을 일일이 확인하여 대조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어째서!"
"너희들은 죽는 게 답이다."
그런 다음 일행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구석에다가 시체를 숨긴 나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이제는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이 된 일행들을 데려와 한설 씨로 보이는 덩어리에게 마법진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 일행들을 무참히 살해하더니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둘러싸고 눈만 드러낸 그는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여기서 닌자가 왜 나와.'
나는 목이 뎅겅 잘리는 것을 느끼며 또다시 비웃음을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