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미국으로
* * *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서아가 실험하는 걸 구경이나 하면서 지내던 나는 보람찬 나날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논문을 작성 중일 때 키보드 위에 올라가서 실수인 척 삭제한다던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실험 기구들을 떨어뜨린다던가.
하지만 그것들에 모두 대비해 둔 서아는 논문을 수시로 저장해서 원본은 백업해 뒀고, 실험 기구에는 깨지지 않도록 일일이 강화 주문을 걸어뒀다.
물론 그렇게 사고를 막았다고 해서 화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젠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듯이 보호막으로 출구를 가로막은 서아는 내 부드러운 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래도 그 주문을 가르친 게 누군지는 잊은 모양이다.
그저 앞발로 툭 건드려서 날 막는 장애물 따위는 간단하게 파훼한 나는 여유롭게 실험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러고는 어떤 마법사의 어깨를 빌려 엘리베이터로 향한 다음 모두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상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야경과는 다른 맛이 있는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다가 느껴지는 약간의 진동에 도착한 걸 알아차린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전에 봤던 것처럼 와인잔에다가 포도 주스를 따라놓고 흑막처럼 웃고 있는 박수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무언가 초조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아마 니알라토텝이 활동했다는 거겠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기척을 느낀 그는 뒤돌아서 내게 인사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오랜만에 보는군. 그런데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미국에서 미친 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 지부의 결사단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찾은 단서는 붉은 보석과 관련되었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붉은 보석…?"
"예. 혹시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흠, 이건 내가 따로 해결하도록 하지. 결사단은 테러의 방지와 수습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두고 내려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마치 내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미국에다가 사건을 일으켰네. 그럼 슬슬 존 왓슨에게 접근할 준비를 해야겠군.'
만약 그에게 중요한 의뢰라도 들어왔다면, 미국으로 보낼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거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누가 탐정에게 살인사건 같은 걸 맡기겠는가.
부인이나 남편이 바람피는 거 같다면서 미행해 달라는 의뢰나 들어오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붉은 보석이로군.'
사람을 광기에 차게 만들어 테러를 일으키도록 만든다는 점에서부터 루비처럼 평범한 것은 절대 아닐 거다.
'니알라토텝이 뿌려 둔 붉은 보석…. 무엇인지 알겠군.'
그건 아마도 빛나는 부등변다면체일 것이다.
특수한 의식을 통해 니알라토텝의 화신인 어둠에 깃드는 자를 불러 지식을 얻고, 그 대가로 아마 수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거겠지.
아니면 정신력이 부족해서 미쳐 버린 것들이 날뛰는 경우도 있을 테고.
결사단이 그들을 일일이 사살하거나 제압해나가며 힘내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 자체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샘물처럼 계속 솟아날 거다.
'아무래도 빨리 런던으로 가야겠네.'
어느새 서아의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껑충 뛰어 캣타워 꼭대기에 오른 다음 푹신한 모피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지금 저택에 있는 첫 번째 화신에게 의식을 돌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아우성을 지르는 영혼이 든 병을 한 번 툭 쳐주고 방을 나온 나는 곧장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브의 방으로 향하자 방금 일어난 건지 동물 잠옷을 입은 채로 하품을 하면서 눈을 비비는 이브가 보였다.
고개를 약간 꾸벅이며 그냥 다시 잘까 고민하는 듯한 그녀를 향해 조심히 다가가자 흐릿하던 눈이 점차 맑아지는 것이 보였다.
"후아암,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그동안 심심했니?"
"아뇨. 지난번에 여행 갔다 오고 나서 공부하고 에반 아저씨랑 대련도 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그렇구나. 이번엔 이브 너 혼자만 외출할 거라서."
"같이 여행가는 거예요?"
"아니. 혹시 추리 소설 같은 건 좋아하니?"
"사건인가요?"
이브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그래. 자세한 사항은 재미만 떨어뜨릴 테니 말하지 않겠지만, 같이 갈 사람도 한 명 있단다."
"누군데요? 하윤 언니? 아니면 저번에 처음 봤던 서아 언니?"
"아니, 존 왓슨이라고 영국인 탐정."
"에엥…."
전혀 모르는 사람과 같이 다녀야 한다는 말에 싫다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긍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당연히 탐정이 등장하는 게 맞겠네요. 그래도 항상 곁에 있어 주실 거죠?"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네가 대처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내가 나서도록 하마."
이브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나도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자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럴 때가 아니라면서 아침을 먹으러 바삐 계단을 내려갔고, 나는 준비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몇 시간 후, 검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은 이브는 빨리 출발하자고 말했다.
이전에 만들었던 존 왓슨의 사무실 근처 좌표를 떠올려 공간을 비틀자 벽이 일그러지더니 구멍이 뚫렸다.
접근하는 이는 하나도 없는 뒷골목으로 온 나는 구멍이 닫히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걸어가면서 모습을 바꿔갔다.
검었던 머리는 갈색이 섞인 금발에 눈동자는 푸른 벽안으로.
그리고 키도 약간 줄여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 나는 준비해 둔 서류 가방을 손으로 가져왔다.
묵직한 종이 다발로 가득 채워진 가방은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었고, 그 감각을 즐기며 걷다 보니 사무소에는 금방 도착했다.
—똑똑.
문에다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사람이 나왔다.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아, 어서 들어오세요."
존은 안으로 들어가며 차라도 대접하려는 건지 전기 포트를 키는 소리가 들렸고, 그동안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사무실 내부를 구경했다.
저쪽에 있는 책상에 반으로 접힌 신문은 그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고, 그 말은 들어온 의뢰가 없어서 여유롭다는 뜻이었다.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려오고 금방 기성품 홍차의 향기가 코를 멤돌았다.
곧 밀크티 세 잔을 가져온 존은 각설탕을 하나 넣고는 한 모금 마시더니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의뢰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이 아이를 미국의 한 건물로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음…. 여기는 아동 보호소가 아닌데요."
"일단 여기 선수금부터 보시죠."
나는 가져왔던 서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린 후 잠금장치를 풀어서 존에게 보여줬다.
"이, 이건?"
"총 7만 파운드입니다. 물론 선수금은 이것의 절반이고, 의뢰를 완수했을 경우 나머지 절반을 드리죠."
"…오히려 수상하군요. 아이 한 명을 보내는 데 이 정도의 금액이라니."
"아, 그게 의뢰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는데 쓰일 의뢰금도 포함이니까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신다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서류 가방에 든 지폐 다발을 차곡차곡 쌓은 뒤 주소지가 적힌 메모지를 그 위에다가 뒀다.
그러고는 가방을 다시 잠근 후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행운을 빌죠."
혹시나 거절할까봐 답변조차 듣지 않고 사무실을 나온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두 번째 화신을 변화시켜 마치 인형처럼 데포르메시킨 다음 이브의 곁에다가 이동시켰다.
마법적인 자질은 전혀 없는 존은 알아차릴 수 없는 나를 발견한 그녀는 나를 껴안고는 모자 부분에다가 볼을 비비적거렸다.
아무 말도 없는 이브 덕분에 내가 마시지 않은 밀크티와 함께 분위기도 함께 식어갔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 중인 듯한 존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일단 며칠 동안 함께 다닐 테니 이름을 알아야겠지? 나는 존 왓슨이라고 해. 편하게 존 아저씨라고 불러."
"이브라고 해요. 성은 없어요."
"커헉!"
성이 없다는 말에 무서운 일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밀크티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린 그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기침을 했다.
"콜록! 크, 크흠. 그게 무슨 뜻이니?"
"부모였던 사람들이 좀 막장이라서 그냥 제가 버린 거예요."
"방금 같이 왔던 사람은…?"
"제 보호자 겸 여러 가지로 스승?"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니 더 묻지는 않으마."
"더 물어봤으면 제가 당신을 물어뜯었을 거예요."
"응?"
"…농담이에요."
진담인가 싶었지만, 부끄러운지 볼이 붉어진 걸 봐서는 정말로 농담인가 보다.
존은 피식 웃더니 식은 밀크티를 원샷하고는 미국으로 가는 티켓을 예약하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갔다.
가장 저렴한 이코노미 클래스를 고르려던 마우스 커서가 잠깐 멈칫하더니 그의 시선은 탁자 위의 돈다발로 옮겨졌고, 커서는 비즈니스 클래스로 이동했다.
표를 예매하고는 의자에 앉아서 다시 신문이나 읽으려던 그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미국에서 테러가 많이 일어났는데, 설마 그걸 해결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동안 수수께끼의 저택에 끌려오고, 그림 속 세상으로 납치되고, 무덤의 구울과 만나면서 내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 직감이라도 생긴 걸까.
정답에 가까운 추리였다.
그렇다고 그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