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빛나는 부등변다면체
* * *
아침을 든든하게 챙긴 일행들은 집주인에게서 받은 마을의 약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그런데 이거 나가도 괜찮으려나?"
"으음, 어제 그렇게 쫓겼는데 하루 만에 잊었을 리는 없겠지…."
"그래도 일단 나가 볼까요? 좀비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케이트 언니 뿐이고, 어차피 집에 숨어들면 쫓는 걸 멈추잖아요."
"아직 이곳 집주인에 대한 의심을 거둔 건 아니야. 아직 그가 흑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의심을 거둘 수 없었던 케이트는 여전히 먹구름이 낀 듯한 수정구를 바라보다가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거의 외우다 싶이 봤던 약도도 함께 넣은 후 나갈 준비를 했다.
창문을 통해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천천히 문을 열자 웃는 사람 몇 명이 길을 따라서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어제의 소란은 기억에서 사라진 건지 케이트를 보더라도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약도에 있는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을 찾아서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 버리고 간 차를 발견했지만, 누군가가 파괴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혹시 몰라서 시동을 걸어보려 했으나 당연하게도 걸리는 일은 없었다.
그걸 본 케이트는 속으로 욕을 한 사발 내뱉었는지 얼굴이 붉게 변해가지고는 보닛을 세게 내리쳤다.
"이봐, 괜찮아?"
"그나마 내 차가 아니어서 괜찮, 기는 개뿔! 흑마법사 새끼,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녀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웃는 사람에게 화풀이라도 하는 건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인 모습이 화를 더 돋구게 되었지만 말이다.
먹통인 수정구로 녀석들의 머리를 깨뜨리려는 케이트를 존이 막아 내며 우리는 근처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집은 갈색 지붕의 이층 집이었는데 커튼이 쳐져 있거나 하진 않았다.
존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노크를 하자 문이 그 충격에 스르르 열리며 내부를 보여줬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싸늘한 집.
그 안에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로 머리에는 피가 굳어 있는 시체가 고개를 숙인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죽은 지 얼마나 오래된 건지 바닥에 뿌려진 피는 검게 변색됐지만, 이상하게도 파리가 꼬여 있거나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다니진 않았다.
이런 현장이 익숙할 케이트는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존도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며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브는 문장 덕분에 정신적인 충격은 없을 텐데 처음 보는 피가 꺼려지는 건지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흐음, 단 한 발로 완벽하게 머리를 관통했군. 날아갔을 탄환은… 저기 벽에 박힌 모양이네."
"누군가 마법으로 조치를 취한 건가? 흔적이 없는 걸 보면 결계의 영향?"
"그쪽은 전문가인 당신이 하시고. 어디 보자…. 머리에 난 상처나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면 타살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고."
둘은 마치 검시관처럼 시체를 살펴보더니 금방 자살했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하지만 의문점이라면 좀비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인데."
"머리에 눈에 띄는 상처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시체를 치우지 않은 점도 이상해. 흑마법사는 겉보기에 행복한 마을을 만들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리 결계를 만들었다고 해도 모든 곳은 살필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쯧, 결계를 제대로 살피고 올 걸 그랬어."
그렇게 말하며 주방이나 다른 방까지 살피고 온 그녀는 다른 집으로 가자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음 집은 안에서 웃는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고, 그다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식탁을 스윽 훑어서 묻어나오는 먼지를 확인한 존은 손을 탁탁 털면서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몰라서 다락방까지 살펴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금방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째선지 웃는 사람이 이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거닐며 네 번째 집으로 향하자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만 갔다.
일행은 가려는 곳 근처에서 파티를 하는 건가 생각하고 나아간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목적지에서 하고 있었다.
굳이 직접 안을 확인하지 않아도 집주인이 멀쩡하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기에 등을 돌리려 할 때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자 모두 경계를 하며 다시 뒤돌았다.
완전히 열린 문으로 나타난 것은 푸짐해 보이는 인상의 아줌마였다.
기름 같은 게 튄 앞치마를 입고 한 손엔 국자를 든 그녀는 예상과 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자하기보다 기괴하다 싶은 일그러진 웃음을 띈 입이 열렸다.
"파티하고 가요!"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고음의 불쾌한 목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여길 벗어나야겠다 싶어서 고개를 돌렸던 케이트는 혀를 차며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쳇, 단단히도 준비한 모양이네."
"파티하고 가요! 파티하고 가요! 파티하고 가요!"
"저 입 좀 닥치게 만들고 싶군."
"싸울 준비나 해요!"
사라졌던 웃는 사람들이 어느새 길가나 골목을 가득채워서는 모두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존이었다.
코트에서 권총을 꺼내 상대를 겨누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은 곡예를 부리는 비행기처럼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파티하고 가라며 재촉하는 여인의 미간을 꿰뚫을 것만 같았던 그것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국자에 막히고 말았다.
—팅!
"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건지 모든 웃는 사람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브와 케이트는 빠르게 주변에다가 여러 겹으로 보호막을 설치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들고 온 식칼이나 공구로 자신들을 가로막는 것을 깨뜨리려고 했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이들도 주먹으로 쾅쾅대며 두들겼고, 점점 충격이 누적되며 보호막에 금이 가는 게 보였다.
"이런, 무슨 뾰족한 수라도 없어?"
"나는 정보부장이라니까! 전투부장이었으면 싹 다 죽여 버리고 나왔겠지!"
"젠징! 이브 너는 뭐 없니?"
"기다려보기나 해요!"
이브는 그렇게 소리치며 껴안고 있던 나를 바라보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보호막을 두들기는 손이 더욱 바빠졌고, 저 멀리서 구경만 하던 아줌마는 고개를 거의 직각으로 꺾으며 무표정으로 변했다.
—뚜둑!
이제는 고개가 꺾이지 못할 방향으로 꺾인 그녀가 국자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와 힘껏 내리치자 아슬아슬했던 보호막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건지 그녀는 계속해서 국자를 내리쳤고, 엄청난 충격에 단단하던 보호막에 빠르게 금이 갔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겠다 생각한 케이트는 주문을 날려보지만 전부 쳐 내질 뿐이었고, 존이 발사한 총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든 보호막이 깨지고 웃는 사람들이 난입해 일행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붙잡자 상황은 끝났다.
"꺄흑!"
목이 꺾인 녀석이 이브를 내동댕이치고 가슴팍을 밟았을 때 나서서 전부 갈아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제압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았다.
어차피 주문만 완성된다면 모두 끝이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자 웃는 사람들이 비키면서 길을 터줬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흑마법사들 사이에 유행이라도 하는 건지 로브를 쓴 인물이었다.
많이 늙었는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온 그녀가 후드를 벗자 나이를 보여주는 듯한 백발이 보였다.
"홀홀, 제물이 찾아왔나 싶었는데 방해꾼이었구나. 덕분에 납치하려던 것도 포기했으니 어쩔게냐?"
"미친년. 나이를 먹을 거면 곱게 처먹을 것이, 커헉!"
"나는 쓸데없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단다."
흑마법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케이트를 구속하고 있던 좀비가 그녀를 발로 걷어차며 말을 끊었다.
"흐으음, 세 명은 부족한데 말이지…. 응? 아이야, 심장에 특이한 걸 품고 있는 모양이구나."
"저리, 꺼져!"
"입이 험한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
이브를 밟고 있던 녀석에게 입을 막도록 시킨 후, 흑마법사가 천천히 손을 뻗길래 이젠 나도 참지 않기로 했다.
인형 같은 모습은 벗어던지고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며 손에는 흑단나무 지팡이가 나타났다.
—딱.
"거기까지."
"어머나. 아이야, 네가 기르는 사역마…는 아닌 모양이구나."
"나는 검은 역병, 죽음보다 먼저 오는 장의사. 그대, 연명의 욕구로 가득 찬 흑마법사여.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네."
"글쎄, 후회하는 건 누구일까?!"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제압하고 있던 녀석을 제외한 웃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나를 잡자 피부에 검은 반점과 고름이 생겼지만, 이전에 봤던 것보다는 속도가 느렸다.
"뭣? 결계에는 분명 부패를 막도록 조치를 해 두었을 터인데…."
"흐음, 하찮은 주문일 것이 분명하구나."
"네놈! 어디 그 오만한 모습이 어디까지 가나 보겠다!"
"글쎄다. 모든 것은 부패하리라."
나는 부패의 저주로 이브를 구속하고 있던 녀석을 순식간에 썩어들어가도록 만들었고, 그 틈을 타서 이브는 주문을 완성시켰다.
"어떤 주문이라고 해도 나를 막을 수, 막을…. 이게, 무슨…?"
"자기소개를 다시 하도록 할까? 나는 전지하지 못한 전능, 그리고 네게 죽음을 안겨다 줄 존재노라."
하늘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균열이 생겨나더니 점점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점점 깨져나가던 푸르른 공간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자 마을을 둘러싸던 결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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