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불의 화신
* * *
이성을 잃고 폭주하며 그저 자신의 본분인 태운다는 걸 이행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북유럽 신화의 수르트 같았다.
물론 화염 거인이 아니라 평범한 크기니까 이름 뒤에다가 주니어를 붙여야겠지만.
아무튼 가만히 서서 옥상 전체에 서서히 불길을 옮겨 가던 그는 갑자기 보호막이 나타나 방해하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황빛을 넘어 거의 샛노랗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마치 녹아내려서 일렁거리는 황금처럼 보였다.
"크아아!"
마치 생존자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좀비처럼 보호막을 마구 때리는 모습은 좀 멍청해 보였다.
하지만 부족한 지능은 피지컬로 채울 수 있는 법.
어디서 나온 괴력인지 벌써부터 보호막에 금이 생겨서는 그 틈새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빙결 주문을 준비하던 결사단원들은 로브에 새겨진 방호 마법으로도 그게 제대로 막아지지 않았던 것인지 괴로워하면서도 주문에 박차를 가했다.
이 정도면 간부도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때 수현이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부채꼴의 형태로 냉기가 앞으로 퍼져 나갔고, 결사단원들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하기엔 일렀다.
열기를 버티진 못한 콘크리트에 금이 가면서 안에 있던 철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녹아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붉게 물들었을 뿐이라 지지대로서의 역할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버티리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한다면 옥상이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렇게 판단을 내렸을 때 앞에서 마법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북풍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을 꺼뜨리며 이기는 듯싶었지만, 점점 열기가 거세지며 사그라들던 불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어디서 연료로 쓸 마력을 어디서 끌어오는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지만, 내 눈에 약간 작아진 그의 영혼이 보였다.
"호오, 그런 거였나. 하윤아 저기 저 녀석 좀 한 번 봐라."
"뭐가 이상해요?"
흥미를 느낀 내가 꼬리를 움직여 하윤이에게 녀석을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눈을 찡그리면서 무언가 변한 거라도 있나 살피더니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저런 화력을 내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으아…. 많이 위험해 보이는데 무슨 방법이라도 없을까? 하윤아."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다 끝날 거예요. 서아 언니. 그리고 이번엔 제가 아니라 여기 아저씨가 잘 해결해 줄 거 같고요."
"응? 잠깐만. 지금 내 얘기하는 거야?"
"그럼 누구 이야기겠어요?"
"저걸 상대하라고?"
"진심을 내면 가능해 보이는데요."
하윤이는 그렇게 말하며 에반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이전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게 존재했던 불꽃이 이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어째선지 저걸 보는 순간 귓가에 여자아이가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에반이 골목길에서 상대의 화염 마법을 조종한 것도 저걸 다스리느라 얻은 부수물이겠지.
하지만 과연 영혼마저 불사르며 폭주하는 놈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평소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윤이가 저렇게 장담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는 기대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자, 빨리 가 봐요!"
"어, 어어어! 밀지마!"
"혹시 쫄았어요?"
"아니! 그래도 준비할 시간은 줘야지!"
강제로 등이 떠밀리는 에반은 어떻게든 속력을 줄여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보호막 바로 앞까지 도달한 그는 이성 한 줌 없이 그저 두들기기만을 반복하는 사람 형태의 불꽃과 마주하게 되었다.
***
가만히 뒤에서 구경이나 하던 나는 하윤 양에게 등이 떠밀려 타오르는 사람 앞으로 오게 되었다.
여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할 텐데 내가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일부러 힘을 줘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저렇게 가늘은 팔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신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상대를 신경 써야 할 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붉은색이었는데 이제는 노란색으로 타오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불의 화신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나의 눈이 새하얀 눈동자와 마주치자 어떤 파괴욕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쓰읍…. 이걸 어디서 봤더라?'
분명 오늘에도 본 거 같은데.
'…아! 꿈속에서 마주쳤던 그 거대한 불덩어리!'
존재감은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눈앞의 불의 화신이 빈약하지만 그 대상이 비정상적으로 엄청난 것일 뿐이다.
태양과 성냥불을 비교하면서 후자가 너무 약하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작은 불꽃이라도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법.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땀을 옷소매로 훔치면서 방법을 떠올려봤다.
그동안 지하의 비밀 연구소에 갖혔던 사람들에게서 불꽃을 꺼낼 때는 마력을 주며 천천히 주도권을 가져 왔었다.
하지만 이걸 보라.
옥상의 거의 절반 이상을 채운 불길에게 마력을 퍼부으면서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아마 탈진해서 기절하고 말 거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일단 정령에게서 조언을 기대해보자.
그리 생각하며 손바닥 위로 작은 불꽃을 만들어 끈을 흔들었다.
그러자 찾아온 정령은 앞에 있는 불의 화신을 보더니 몸을 회전시켰다.
"인간? 아니, 불꽃?"
"정령아. 저걸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끄는 것. 거의 불가능."
"역시 그러겠지. 응? 거의?"
"저것보다 더욱 강력한 마법이라면 가능함."
"글쎄. 난 냉법이 아니라니까."
"뒤에 있는 마법사. 강해 보임."
"강하긴 하지. 그런데 나설 생각은 없어 보이네."
"의문."
한쪽 계열의 극한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화염 계열과 전격 계열만 팠는데, 지금은 얼음 마법을 좀 배워둘 걸—같은 생각이 들었다.
"맞불을 놓으려고 해도…. 아니 애초에 그건 타버릴 물질을 미리 태우는 건데."
"인간. 어째서 고민?"
"불에다가 불을 붙이는 건 모순되잖아."
"그게 어째서 모순?"
"응?"
정령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옆에서 귀여워하는 눈빛이 날아오긴 했지만, 그걸 무시하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위대한 존재의 불꽃. 무엇이든 태울 수 있음. 불꽃도."
"그러니까 이게?"
나는 반대쪽 손가락 위로 자그마하게 심장 속의 불꽃을 가져왔다.
청백색으로 타오르는 모습이 온도가 높아 보이긴 하지만 이게 모순되는 행위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니.
다시 봐도 믿기진 않았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 심장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은가.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 따듯한 열만 뿜어내는 이게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믿어봐야 하나….'
어느새 보호막을 두들기며 쿵쿵거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옥상을 뒤덮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도 사라지고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니까 부담감이 어깨 위에 한가득 올라온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그럼 알겠어. 네 말대로 해볼게."
"수고해라. 인간."
손바닥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불덩이는 정령이 떠나가자 가만히 멈췄다.
나는 거기에다가 심장에 있는 모든 불꽃을 때려 박은 다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력을 집어삼키며 더더욱 덩치를 불려 나가는 화염구는 흰색으로 타오르며 자신이 먹어 치울 것이 어디 있는지 불길을 날름거렸다.
저기서 마구잡이로 팔을 움직여대던 불의 화신도 나의 마법을 보고는 행동을 멈추더니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녀석은 여기서 살려보낼 수 없었다.
나는 원래의 크기보다 약 두 배 정도 커진 화염구를 올려다봤다.
저번에 그림 속의 세상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들의 집합체를 쓰러뜨릴 때보다 작아졌지만 위력은 더욱 커졌다.
마치 폐에 있는 모든 공기를 빼내려는 것처럼 숨을 내쉰 다음 힘껏 팔을 휘두른다.
—!
보호막을 통과하고 너머에 있는 불의 화신에게 화염구가 닿자 흰색의 불길이 전염되듯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는 괴로워하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서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다.
불이 불을 태운다는 모순되는 공간의 중심에서 가만히 몸을 맡기던 그에게서 어떤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 재앙을 가져왔을지도 모를 자신을 막아줘서 그런 것인지.
혹은 불타오르는 고통을 끝내준 것에 감사한 것인지.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 인사를 받은 나는 그저 멍하니 타오르는 모습만 지켜볼 뿐이었다.
"흠. 제 생각과는 다른 결말이지만, 수고하셨네요."
"그래. 다음에는 날 시키지 말고."
"후후후.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정말이지. 내가 얼마나, 어, 으아아!"
"어라?"
옆에서 들려온 하윤 양의 말에 대답하다가 갑작스레 느껴진 부유감에 입에서 자연스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느껴진 모든 장기가 붕 뜨는 듯한 감각은 불쾌하다 못해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였다.
등에 느껴질 충격에 대비하며 눈을 꼭 감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통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두운 눈동자.
바로 하윤 양의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주변에는 녹아내린 철근이 반쯤 박힌 콘크리트 파편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윤 양의 양팔에 마치 공주님처럼 안겨져 있었다.
이 무슨 언밸런스함인가—생각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저기… 내려주지 않을래?"
"넹."
—철퍼덕.
그녀도 날 계속해서 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인지 날 그대로 자유 낙하 시켜줬다.
등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던 나는 옷에 붙은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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