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IF 외전 평범한 일상을 포기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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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지역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
그곳엔 무속인처럼 한복을 입은 사람이 방석에 앉은 채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옛날 시골집에 가야만 볼 수 있을 법한 누리끼리한 노란색 장판 위에 대나무 돗자리와 고급스럽게 옻칠된 나무 탁자가 있었고, 특이하게도 청동 단검이 그 위에 놓여져 있었다.
무속인의 뒤에는 멋스러운 풍경과 알아보기 힘든 한자가 그려진 병풍이 자리했고, 천장에는 종이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등롱이 빛을 뿌리는 중이었다.
손님이 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응? 그래서 무속인이 누구냐고?
그건 바로 나, 이하윤이다.
어릴 적 지금의 나처럼 무속인으로서 살아가던 할머니 댁에서 발견한 오래된 책과 녹슬어 버린 단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책에 나왔던 대로 따라 했던 나는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특별한 힘을 얻게 되었다.
마력, 게임 속에서 흔히들 마나라고 나오는 미지의 에너지 같은 것들.
그걸 이용해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일으키고 세상의 규칙을 어그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였던 것일까.
흔히들 귀신이라 부르는 보여서는 안 될 존재마저 보이게 되었다.
신 님께서 새겨 주신 문장 덕분에 나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지만 내 주변인들은 달랐다.
악몽을 꾼다던가, 기력이 없어졌다던가, 아니면 몽유병을 겪어서 일어나보니 베란다에서 난간을 잡고 있었다던가.
선 넘는 장난을 쳐서 결국 칼을 뽑도록 만들었다.
내가 재능이 있었던 건지 신 님께서 가르치는 걸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보이는 귀신들은 모조리 강제로 성불시켜 버린 후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다.
무슨 이상한 이름의 교단이란 것들이 마을에 자리 잡기 전까지는.
사이비 종교처럼 사람들에게 포교해서 세뇌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만, 대신 그들은 사람들을 납치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끔찍한 의식.
정사각형의 제단에 맞춰 사람을 재구성한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미쳐 버렸을 게 분명했다.
피부를 뒤집어서 안쪽의 붉은 근육이 보이는데도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고기 덩어리.
여기 하나만 그러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그곳만 파괴했지만 납치는 계속되었다.
결국, 내 친구에게까지 마수를 펼치려다가 걸린 교단은 사람 한 명 남기지 않고 아예 사라지게 만들었고, 다른 교단들도 가장 약한 곳 하나만 남기고 전부 부숴 버렸다.
분명히 그랬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교단들을 대신하는 것처럼 한 단체가 나타났다.
결사단.
세상의 모든 마법적 지식을 탐구하는 단체…라고 하지만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이상한 정장 입은 떡대들이 사람을 죽이려 들었으니까.
대충 제압하고 나서 외부인이 벌인 일이라는 걸 듣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어찌저찌 해서 좋은 인연도 얻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언제 평범한 삶을 포기했더라…?'
예전부터 그런 마음은 있었다.
물고기 대가리한테 민아가 납치당해서 구하러 갔을 때 본 컨테이너에 같혀 있던 많은 사람들.
어떤 히어로 영화에서도 말하지 않던가.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그렇다면 마법이라는 힘을 가진 내가 그들을 구해야 했던 게 아닐까.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는 내 손이 닿는 곳까지만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제 포기했었더라…. 아, 맞다.'
불의 교단이 일으킨 사건 이후로도 갖가지 사건에 마구잡이로 휘말렸던 나는 내 운명이 왜 이따구인지 한탄했다.
그러고는 나의 평화를 방해할 모든 관심종자와 괴물들을 전부 죽여 버릴 거다—라고 맹세했었지.
그래서 난 지금 할머니가 모시던 신을 데려와 무당인 척하며 지내고 있었다.
서아 언니에게 부탁해 사람이 별로 안 오는 곳으로 집까지 구해서 말이다.
하지만 가끔 호기심 많은 사람이나 주변 상가에서 일하시는 분이 찾아오는 일이 있기도 했다.
팔자나 관상 같은 걸 보는 방법 따위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지만, 옆에서 훈수두는 신 덕분에 돌팔이 소리는 듣지 않았다.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더냐! 옛 존재와 외신은 물론이고 그들이 가르친 마법은 좋지 않다고!"
대신 매일 저렇게 신 님을 욕하느라 시끄럽게 구는 건 많이 짜증 났다.
어제 결사단에서 온 하청을 받아서 현장에 갔다가 딱 한 번 마법을 썼다고 지금 저러는 거다.
지금껏 내 역린을 건드렸던 귀신들은 모두 주먹으로 성불 당했지만….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서 옆을 바라봤다.
때 묻지 않은 새하얀 한복에 갓, 그리고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흰 수염까지.
마음속의 유교가 깨어나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가끔씩 말해주는 할머니 이야기도 반쯤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니까 아무리 효율이 좋다고 해도 그러면 안 돼! 요즘은 시대가 변했는지 다들 가성비니 효율이니 따지지만…."
"네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또 마법을 쓴 게 어제 아니더냐!"
"에휴. 계속 그러시면 항아리로 보내요?"
"어허! 내가 무슨 악령도 아니고 그런 항아리에다가 집어넣겠다는 거냐!"
"성주신도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건 항아리에다가 쌀도 넣고 보자기로만 덮어두지 않더냐. 너는 날 가두고 금줄에 부적까지…."
"금줄만 해 두면 빠져나오면서."
"당연하지! 내가 사악한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이런 취급은 당해 본 적도 없었다."
옆에 있던 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제는 신세 한탄을 했다.
"어릴 적부터 재능이 보여가지고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왜 그런 의식을 해가지고—"
자기가 찜한 걸 뺏긴 어린아이처럼 굴거나….
"아무리 우리가 외신이라고 분류하긴 하지만 그런 존재를 신 님이라고 부르면서—"
아, 이번엔 정말로 선을 넘었다.
"후우…. 제 역린이 뭐라고 했죠?"
"네 가족과 친구, 그리고, 끄응…."
"손님 올 때까지 안에서 반성이나 하고 계세요."
"아무리 그래도 난 절대, 우아악!"
뭐라고 주절거리려는 신을 항아리로 빨아들인 다음 빠르게 보자기를 덮은 후 부적이 묶여 있는 금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걸 탁자 아래에다가 숨겨 놓은 후 나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슬슬 민아가 대학에서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신호음이 들린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어, 민아야. 요즘 대학은 어때?"
"교수님도 친절하시고 좋아."
"그래? 혹시 귀찮게 구는 사람 있으면 말해. 해결해 줄 테니까."
"고마워. 너는 어때?"
"나?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거 말구."
"…학생 때도 이렇게 살았는데 당연히 괜찮지. 솔직히 옆에서 시끄럽게 잔소리하는 잡신이 더 힘들다."
"어머, 아하하. 정말 하윤이 너답네."
그렇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미소를 짓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다시 표정이 굳었다.
"손님 온다. 이만 끊을게."
"어. 나도 나중에 찾아갈게."
"그래."
그러고는 통화를 끊고 잠시 기다리자 문에 매달아둔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맡아져오는 고소한 냄새와 가벼운 발소리.
손님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무당님. 잘 지내셨어요?"
"어휴, 할머니. 저한테 존댓말 하시지 말라니까."
"신령님을 모시는 분께 어떻게 그래요. 아, 여기 오늘 남은 떡인데 드세요."
"감사합니다. 받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 점이라도 한 번 봐 드릴게요."
"어유, 그럼 감사하죠."
인근 건물에서 떡집을 하시는 할머니인데 내가 손녀 같다며 가끔씩 찾아오신다.
일단 점을 치기 위해 방금 봉인해 두었던 항아리의 금줄을 몰래 풀었다.
그러자 목줄 풀린 개가 뛰쳐나온 것처럼 시끄러운 신이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나 죽네!"
삭신이 쑤시다며 허리를 툭툭 치는 시늉을 하며 내게 눈치를 주던 그는 찾아온 할머니를 보더니 눈빛을 바꿨다.
나는 일단 그에게서 점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음, 요즘 가게는 어떠세요?"
"예전이랑 비슷하죠. 명절날에는 많이 팔리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오질 않아요."
"그렇군요."
"혹시…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을까요?"
"잠시만요."
할머니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나는 옆에 있는 신에게 눈치를 줬고, 그는 금방 답을 내주었다.
"쯔쯔쯔, 액운이 씌였구나."
"애, 응?"
"뭐라구요?"
"아뇨. 이번 달에도 운세가 좋으실 거라고요."
"어휴, 감사합니다."
옆에서 경악한 신의 눈초리가 쏘아졌지만, 그걸 무시하고는 할머니를 돌려보냈다.
내게 고개를 꾸벅이는 걸 막으면서 일어나가지고 배웅까지 해주고 나서야 이곳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아이고, 하윤아!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아니.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액운이 씌였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그걸 씌운 녀석만 잡아서 족치면 다 괜찮아지겠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으려고 그러느냐."
"음…. 오랜만에 이쪽 구역 좀 정리할까요?"
"하윤아.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귀신이란 건 무조건 강제로 퇴치해선 안 되는 거란다."
"악업이 쌓여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래!"
"그럼 절 데려가려는 차사를 족치면 되는 일이죠."
나는 굳어 있던 관절을 움직여 풀어내면서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는 죽음조차 죽여 버릴 거니까."
고양감에 헛소리를 내뱉어서 조금 부끄러웠던 나는 붉어진 볼을 가리며 옆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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