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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119화 (119/154)

〈 119화 〉 IF 외전 ­ 평범한 일상을 포기했다면

* * *

움직이기 편하도록 한복에서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나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묶었다.

검은 야구모자를 쓰고 포니테일을 넘긴 후, 방에서 나와 탁자 위에 있던 청동 단검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 끝. 같이 갈 거예요?"

"혼자 보내면 주먹질로 끝낼 게 분명하니 따라가야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동안의 업보다 이 녀석아."

뒷짐을 지며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러면 항아리에 들어갈 것이 뻔하므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불을 끄고 문까지 잠가둔 후 건물 복도를 거닐며 무언가 느껴지는 건 없나 살펴봤다.

소름이 끼친다거나 오한이 든다거나 하는 기운이 어디 없나 두리번거려도 딱히 기감에 걸리는 건 없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애초에 여기 근처로 오는 귀신이 있겠느냐? 네 심장에 떡하니 새겨져 있는 게 있거늘."

"쓰으읍. 그럼 도대체 어떤 새끼가 액운을 씌운 거지?"

"귀신이 아니라면 사람, 그것도 괴이를 다루는 쪽이겠지. 에잉 쯔쯔쯧."

"뭐가 불만이에요?"

"무속인이라면 운명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할지언데, 짐승이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그래서 지금 예절 주입하러 가는 중이잖아요."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신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누르면서 상대방에게 눈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근처 학교 교복에 가방. 윗층 학원에 다니는 학생인가 보네.'

슬슬 시간이 6시에 가까워졌으니 그럴 시간이긴 했다.

나는 뒤이어 오는 학생들의 행렬을 지나치며 밖으로 나오자 아직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원흉을 조지겠다고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첫걸음을 내디딜 곳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떡집 할머니에게 가서 최근에 수상한 사람과 마주친 적이 없냐고 물어봐야 할까.

하지만 그럴러면 안 좋게 나온 점괘부터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근처에 새로 생긴 점집이라도 있나 찾아봐야 하려나?'

오늘을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할머니의 점괘를 본 적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때의 결과는 평범함.

길하지도 않고, 흉하지도 않았다.

한 달 동안 마을 바깥으로 외출했을 가능성도 떠올려보긴 했지만 퇴근할 때마다 불이 켜져 있는 떡집의 그림자를 보면 현저히 낮았다.

즉, 범인은 외부에서 찾아온 존재일 터.

귀신이라면 주먹으로 성불시킬 생각이었지만, 녀석들 특유의 음침한 듯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슨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내 특기는 추적술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그런 특기를 가진 사람을 부리면 되는 법.

나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서아 언니."

"어, 왜? 오늘은 일거리가 없는데. 혹시 어제 다치기라도 했어?"

"아니. 따로 조사할 게 있는데, 그게 사람을 추적해야 하는 일이여서."

"흑마법사야?"

"그렇게 추정하고 있어. 오늘 아는 할머니 점괘를 봐드렸는데 누가 액운을 씌웠다고 해서."

"그래? 흐음…. 그럼 나중에 한 번 네 옆에 있다는 신령 좀 빌려도 될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그건 왜요?"

"결사단이 한국에 들어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 그래서 잊혀진 주술들도 많고 그래."

"연구용으로 쓴다는 거죠?"

"어."

잠시 귀에서 폰을 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신령을 바라봤다.

서아 언니와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전혀 듣지 못한 그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네가 지휘할 거야? 아니면 내가 미리 명령을 내려 둘까?"

"저는 알아서 돌아다닐 테니까 그쪽에서는 흑마법사만 찾으라고 해 둬요."

"응. 그럼 끊을게."

"네."

통화를 끊은 나는 폰을 여전히 귀에 대고 있는 채로 신령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사람 구경은 거기까지 하시고 이제 찾으러 가죠?"

"응? 벌써 통화는 끝난 게냐? 그런데 전화기는 아직도 귀에 붙여둔 것인고?"

"그럼 허공에다가 말이라도 걸어요? 사람들 돌아다니는 곳에서?"

"그걸 생각지 못했구나. 그래서 어디로 가려 하느냐?"

"점집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일단 발을 옮겼다.

최근 생겼다면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겠지만, 일단 인터넷에 검색해가면서 정보를 찾아다녔다.

일일이 건물에 들어가서 안내판도 확인하고 하면서 다니다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수상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근처에서는 처음 보면서 속에는 마력을 품은 사람을.

캐쥬얼하게 입고 구두을 또각거리며 걷는 그녀의 뒤로 기척을 죽인 채로 천천히 따라갔다.

상가 건물이 밀집한 상업 지역에서 아파트나 빌라 등이 밀집한 거주 지역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걸음을 빠르게 했다.

혹시 들켰나 싶어서 아예 투명화 주문을 사용하고 가까이 다가가도 그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길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더니 상품을 고르는 척하면서 이쪽을 힐끗 쳐다보기까지 했다.

완전히 들킨 건가 싶어서 물러나려는 나의 옆쪽으로 갑자기 수상한 남자가 지나갔다.

칙칙한 색의 옷에다가 검은 모자, 거기에다가 화룡정점으로 검은 마스크까지 쓴 그는 나 스토커요—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스토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다.

같은 여자인데도 뒤를 돌아보고는 걸음을 빨리한 것.

마법사인 걸 알아차린 걸까 생각도 했지만, 체내의 마력을 갈무리했으니 어떤 마법사가 찾아온다고 해도 들키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스토커 따위에게 저렇게까지 겁을 먹은 걸까.

마법사라면 주문으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텐데.

'그냥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가?'

마치 귀신을 볼 수 있는 눈, 영안을 타고나는 것처럼 말이다.

"쯧. 사람을 잘못 찾았네."

"저렇게 두고 갈 게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만."

"스토커는 조지고 가야죠. 애초에 저거 범죄인데."

"폭력도 범죄 아니더냐?"

"들키지 않으면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편의점으로 들어간 남성을 관찰했다.

과자가 진열된 칸으로 가서 고르는 척 몰래 감시하던 그는 여자가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도망치듯 나오자 다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뒤따라가다가 일단 그녀를 돕기 위해 투명화를 풀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츄리닝에다가 모자까지 썼으니 운동하는 사람으로 보이리라.

몰래 쫓아가는 남자를 지나쳐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어? 야, 오랜만이다!"

"어, 어어? 응. 그러게…?"

그녀는 처음에 내가 말을 걸자 무슨 일인지 의아한 듯 보였지만, 이내 자신을 도우려는 걸 알아차렸는지 잘 대답했다.

뒤에 있는 스토커는 잠깐 멈추더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우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교육하기 위해 주변에 CCTV나 블랙박스가 있는지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그녀의 얼굴로 돌렸다.

그런데 무언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의 낯빛이 파리해져서는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흠, 혹시 내가 보이느냐?"

"히, 히이익!"

"일단 좀 진정할래?"

나는 그녀가 심호흡하도록 이끈 다음 등을 토닥여줬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갑작스레 찾아온 현자 타임은 내 머릿속의 엑셀을 밟았다.

급발진을 시작한 나는 신령에게 그녀를 맡겨두고는 뒤에 있는 스토커에게 향했다.

그걸 보자마자 그는 바로 도망치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치려면 한참 전에 그랬어야지."

"어, 뭐야?!"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도달한 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대로 부러뜨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피해자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윽, 이거 놔!"

"응, 싫어."

"무슨 여자가 힘이…!"

"너는 남자가 이렇게 약하냐?"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그에게 비아냥거리며 강제로 끌고 왔다.

"자, 이제 한 번 이야기나 합시다!"

"어, 어어! 스토커를 왜 끌고 와요?!"

"내가 왜 스토커야! 너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면 안 되냐?!"

"당연히 안 되지. 그거 범죄야 임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를 위해 나는 약간의 도움을 줬다.

"에잇!"

—뿌득!

그건 바로 눈높이 교육.

나는 그의 종아리를 부러뜨려서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끄, 끄아아악! 미친년이!"

"내가?"

"내 눈에는 그리 보이는구나."

"저도 할아버지 말에 동의해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금방 친해진 것인지 둘 다 내 욕을 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살려주세요! 여기, 여기 살인자가…!"

"미안한데 친구. 이곳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일은 없는 거 같은데요?"

"어? 우와!"

"마법이라도 쓰면 잔소리를 하려고 했건만. 준비가 철저하구나."

나를 중심으로 부적들이 빙빙 돌아가며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스토커는 이런 불가사의한 상황에 패닉에 빠졌는지 비명을 지르다 말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그를 위해 부적을 하나 가져와 입에다가 붙여주자 읍읍거리며 그가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마법적 소질도 없는 그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럼 이 녀석이 뭘 했는지 설명 좀 하실래요?"

"네! 그러니까—"

설명을 들어 보니 참 가관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면서 접근하더니 고백했다가 차이고, 이후로 계속해서 미행하며 우편함까지 뒤적거렸다고 그녀는 말했다.

"참. 귀신보다 인간이 더 무서울 때가 많아요.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역겹다고 해야 하나?"

"나도 이런 사람은 거의 처음 보는 거 같구나."

"훌쩍. 경찰도 제 말은 제대로 들어 주지 않고…."

"어이구. 많이 힘들었겠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한쪽 발로는 스토커를 찼다.

옆으로 쓰러진 그는 기어서라도 여기를 벗어나려 했지만 속도가 굼벵이보다 느렸다.

"앞으로는… 아니다. 그냥 이 사람에 대한 건 전부 잊게 해드릴게요. 운이 좋지 않다면 백치가 되겠지만."

"읍! 으읍!"

"어지간하면 그런 마법은 쓰지 말라고 하고 싶다마는…. 이 녀석은 염라대왕이 와도 고개를 젓겠구나."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스토커는 잠들었고, 마력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감싸듯이 마법을 만들었다.

"자, 이제 완전히 끝!"

"아, 감사합니다."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까 내가 원래 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네?"

"내일 여기 명함에 나온 주소로 찾아오시겠어요?"

"예, 뭐."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1일차의 수색은 막을 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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