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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127화 (127/154)

〈 127화 〉 옛날 옛적에

* * *

어느 한적한 도로 위를 차량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통화를 하면서 운전을 하다가 가끔 파인 부분을 밟아 중앙선을 넘어가는 게 위태로워 보였지만, 다행히도 반대편 차로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 예에. 물건은 제대로 받았습니다. 예? 아하하, 물론이죠!"

그는 전화를 받은 상대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기계처럼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 행동을 기억한 몸이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상자 안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 아닙니다! 신뢰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죠!"

그는 조수석에 놓인 고급스럽게 옻칠된 나무 상자를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심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럼 최대한 빨리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뚝.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은 그는 운전을 하다가도 가끔씩 눈동자를 옆으로 힐끔 굴렸다.

상자 뚜껑에 음각된 뱀 그림의 눈동자로 박힌 보석이 그를 계속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궁금증과 공포심을 참지 못한 건지 브레이크를 밟으며 도로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천천히 검지손가락의 끝을 상자에 갖다 댄 그는 등골을 스쳐 가는 한기에 온몸이 진동했다.

"후, 후우…. 날씨가 추워서 그런 거야. 빨리 확인만 하고 다시 출발하자."

볼을 찰싹 때리며 다짐을 한 그는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잠금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걸 풀고 뚜껑을 잡은 다음 심호흡을 하더니 곧바로 힘을 줬다.

소름 끼치던 한기와는 다르게 가볍게 열린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스르르 열리는 상자의 안을 본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뱀 사체…?"

안에는 목이 잘려서 죽어 있는 뱀의 사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럽다기보다는 독극물처럼 보이는 보라색 천에 올려져 있는 그것은 아직까지도 울컥울컥 피를 뿜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아직까지도 신경이 살아 있는 건지 혀를 날름거리면서 먹이를 찾듯이 꿈틀거렸다.

"으윽!"

그는 심하게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코를 쥐면서 급하게 상자를 닫았다.

축축하게 젖은 보라색 천의 새하얀 끄트머리가 점점 물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로.

"어후, 사장님도 참 취미가 특이하시지."

그렇게 말하던 그는 계기판에 있는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아이구! 이렇게 시간이?! 정말 빨리 가야겠는 걸."

그러고는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더니 엑셀을 밟으며 가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계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화면이 치직거리면서 기괴한 안내 음성이 나올 뿐이었다.

"뭐야? 이건 또 왜 이래?"

이럴 땐 매가 약이라면서 그가 네비게이션을 몇 번 툭툭 치자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길을 안내하는 색이 기존 색에서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지만, 사소한 오류에 불과하리라.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길을 쭉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갈림길에 도달했다.

그는 원래 왔던 길이 아닌 다른 쪽 길로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기계가 틀릴 리는 없다며 핸들을 돌렸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서서히 안개가 끼자 주변이 어두워졌다.

"여긴 날씨가 왜 이래? 참, 오늘 정말 이상한 날이네."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엑셀을 더욱 세게 밟으며 속력을 높이 올린 그는 저 멀리 있는 터널을 발견했다.

옆에 무슨 붉은 표지판 같은 게 보이긴 했지만, 오래 돼서 그런지 칠이 대부분 벗겨져 뭐라고 써져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함이 목뒤로 스쳐 지나갔지만 조수석에 있는 상자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점점 천장의 조명이 약해지며 결국엔 차의 전조등을 제외하면 빛을 발하는 건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비포장 도로에 들어간 것처럼 차량이 덜컹거리는 거에 그가 깜짝 놀랐다.

"우와악!"

핸들을 꽉 잡아서 버틴 덕분에 벽에 부닥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터널의 벽이 자연 동굴의 것처럼 변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저기 멀리서 출구로 보이는 빛이 보였다.

그는 그것에 기뻐하며 빠르게 밖으로 나오자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볼 수 있었다.

—끼이익!

그걸 보자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큰 충격이 몸 전체를 뒤흔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이 흔들리며 하얀 무언가가 얼굴을 강타하는 것과 함께 그는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끄응…."

정신 차린 그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신음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에고고…나 죽네."

그리고 완전히 찌그러진 앞부분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희망을 품고 키를 꽂아 시동을 걸어 봤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휴. 그럼 그렇지. 일단 사장님께 전화라도 하고 근처 마을을 찾자."

한숨을 내쉰 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통화권 이탈이라고 나온 걸 보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해했다.

그러고는 폰을 던지려는 것처럼 팔을 높이 들었다가 화를 삭이며 천천히 내렸다.

"마을로 가면 전화가 되겠지…?"

쓸데없는 희망을 품으며 숲을 가로질러 걸어가다 보니 그는 어느새 마을이 보이는 절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모습은 이상했다.

커다란 기와집 몇 채와 수많은 초가집들, 그리고 드넓은 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영화 세트장인가?"

하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를 찍고 있는 카메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현기증이라도 느꼈는지 뒤로 털썩 넘어졌고, 그 광경을 몇 분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양손으로 뺨을 때리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뒤로 뛰어갔다.

"헉, 허억! 터널, 터널로 가야 해! 분명 그게 통로일 거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무에 들이받은 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그는 터널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바위들로 막혀져 있는 동굴의 흔적이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비척비척 걸어가서 그것들을 빼내려 노력했지만, 단단히 박혀 있는 돌들은 전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아아악! 왜애애!"

바위와 씨름하느라 숨이 찬 그는 뒤로 드러누워 크게 숨 쉬다 절규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가며 나뭇잎들이 휘날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내리쬐는 해를 보더니 다시 일어나서 차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트렁크를 열고 무언가 쓸 만한 걸 찾아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차량 오른쪽으로 갔다.

"씨, 씨발…. 이게 어떻게…?"

거기에는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과 함께 나무 상자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뚜껑이 열린 채로 내용물들은 밖으로 나와 있었고, 안에 있던 뱀의 사체는 아무리 둘러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윽, 피 냄새. 잠깐, 이게 뭐야?"

그는 상자를 회수하다가 보라색 천에 닿은 흙에서 독한 연기가 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무심코 그걸 들이마셨다가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감각과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이대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채워나갈 즈음, 수풀 속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며 나왔다.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건 일자로 그어진 보라색의 실선.

그와 함께 더더욱 심해지는 고약한 냄새였다.

상자에 박힌 보석보다 더욱 반짝이는 포식자의 눈동자에 몸이 경직된 그는 목에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과 함께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마치 산성 용액이 혈관을 타고 모든 세포들을 녹여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으, 으으…!"

마비된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그건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

"음, 뭔가 엑스트라가 내 분량을 전부 가져간 듯한 기분이 들어."

"무슨 헛소리야? 서아야."

"여자의, 아니, 마법사의 직감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을 탁 치고 일어났다.

저기 캣타워에서 뒹굴거리는 고양이가 이번엔 또 뭐냐는 것처럼 쳐다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생각하는 건데, 이 뱀이 나한테 말을 걸려는 거 같아."

"으음…. 얘는 그거잖아. 위험한 거 아니야?"

"하윤이한테 부탁이라도 해 볼까?"

"학생한테 뭘 시키려는 거야."

"역시 그렇지?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는 고양이처럼 지내는 존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책상 위에 있는 케이지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손가락 세 마디 정도 되는 굵기의 뱀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바로 저번에 하윤이를 도와주면서 가져온 거대한 뱀을 해부하다가 얻은 알에서 깨어난 개체였다.

단 한 마리만 살아남아서 소유권을 가진 내가 기르게 되었는데, 의외로 키우는 맛이 있었다.

내가 하는 연구는 내 전공을 살려서 하는 일인지라 실험용 쥐를 많이 사육하고 있어서 먹이는 간단하게 구할 수 있었다.

나머지 파충류에게 필요한 전등이라거나 여러 가지를 사려고 했지만, 영물에게서 태어난 거라 그런지 낮에 창가에만 둬도 알아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최근 녀석의 행동이 이상했다.

하루 종일 어느 쪽을 계속해서 바라본다거나, 한입에 삼키던 먹이를 독니로 물더니 괴로워하며 죽어 가는 꼴을 보며 기쁨의 춤을 추기도 했다.

일반적인 뱀이었다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하필이면 부모가 부모인지라 무언가 모종의 마법적인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도 뺄 수 없었다.

"한 번 찾아가 봐야 하려나?"

"어딜?"

"얘가 보는 쪽."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저기 내 보디가드 있잖아?"

"구경꾼이 아니고?"

"위험에 빠지면 돕긴 할 걸? 게다가 마법도 있는데 설마 그러겠어?"

"어."

서현이는 단호하게 말하더니 책상을 톡톡 쳤다.

저건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행동인데.

"일단 간부님은 데려갈 수 없잖아."

"당연하지. 저번에 불의 교단 사건도 아니고."

"하윤이는 학생이고."

"거대한 뱀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평범하진 않지만, 우리보다 어리잖아. 지켜 줄 생각을 해야지."

친구의 팩트 폭력이 마음을 강타했다.

지켜졌던 기억밖에 없던 나는 당당하게 철면피를 깔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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