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옛날 옛적에
* * *
점점 그녀의 부채를 든 손이 파들거리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기뻐하는 거 같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짜증 내는 듯한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입꼬리를 가리며 주춤거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뱀의 것처럼 변했다.
고통스러운 건지 신음소리를 내던 그녀는 자유로운 반대쪽 손으로 허리춤에 묶인 무언가를 꺼내더니 마구 흔들었다.
—딸랑!
금으로 만든 방울이 여럿 매달린 막대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춤추며 청명한 소리를 내었다.
그걸 듣자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그녀를 향한 적대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작스레 뒤바뀌는 감정에 당혹스러웠던 나는 그녀에 대한 경계도를 한 단계 더 올리며 조용히 마법을 짜올리기 시작했다.
"흐윽, 잠시만요. 설명을, 윽!"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제압만 하려고."
상상하는 것은 한 줄기의 벼락.
그녀가 죽지 않도록 최대한 약하게 만들면서 나는 주변 상황을 살펴봤다.
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는 아직까지 멈추지 않았고, 어째선지 저기 장독대에 놓인 수많은 항아리들이 살짝이지만 기우뚱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건 아닐 게 분명했다.
나는 더욱 빠르게 마력을 배열해서 마법을 완성시킨 후, 손바닥 안에서 파직거리는 전기를 쏘아낸다는 느낌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는 거 같으면서도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번개는 순식간에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다.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됐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려던 와중에 수풀 속에서 번쩍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찰나 같은 시간 속에서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튀어나온 그것은 그녀 대신 번개를 맞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경련하는 그것은 방금 전까지도 봤던 익숙한 녀석이었다.
반짝거리는 비늘에 날카로운 눈동자, 바로 사육장을 탈출한 뱀이었다.
계속해서 몸을 배배 꼬며 괴로워하던 뱀은 결국 경직하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본 그녀의 입꼬리는 슬퍼하는 것처럼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온 손바닥에 인해 막히고 말았다.
눈을 찡그리며 표정을 제어할 수 없는 게 괴로워 보이던 그녀는 다시 방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쓰러질 것처럼 움직이던 항아리도 그랬던 적이 없는 것처럼 멈췄다.
"흐으, 잠시 제 얘기 좀 들어 주시겠어요?"
"그건 제압하고 나서도 들을 수 있겠는데?"
"에이, 서아야. 너무 매섭게 대하는 거 아니야?"
저 방울 소리의 영향인지 경계심 가득한 모습의 서현이는 어디 가고, 그녀를 제압하는 걸 꺼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만일에 대비해서 하나 더 만들어 둔 마법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혀를 찼다.
"쯧. 헛소리를 지껄이면 바로 전기로 지져 버릴 줄 알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방금 떨어뜨렸던 부채를 주우며 입을 열었다.
"먼저 자기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뱀신을 모시는 무녀, 이름은…."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뭐?"
어떻게 사람이 자기 이름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기억 상실증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럼 일단 무당 아가씨라고 부를게."
"네. 아무튼, 저는 신께서 명령을 내리신대로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숲속에서 질척하고 끈적한 악의를 발견했죠."
"흐음, 뭔지 알 거 같네."
"저는 불길함에 뒷걸음질 쳤지만, 신께서는 저를 그곳을 향해 밀쳤답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이더군요."
"그렇다면 그 뱀신이라는 녀석이 원흉인 건가?"
애초에 우리나라에 뱀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이 있던가.
나는 그동안 조사했던 것들을 떠올려봤지만, 뱀과 관련된 신앙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온 건가? 아니면…'
죽었으면서도 섬뜩했던 거대한 뱀의 눈빛을 상상하자 나는 소름이 끼치면서 바르르 떨었다.
하윤이의 이야기로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신을 자칭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여기엔 얼마나 있던 거야? 밖에 사람들이 많이 있던데."
"그러게요. 저도 기억이 띄엄띄엄 나다 보니 많이 혼란스럽답니다."
"하아, 곤란하네."
나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고민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인데.'
저 무당 아가씨가 말했던 걸 곱씹으며 무언가 오류는 없는지 확인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응? 잠깐만. 뱀신의 목소리를 따라 어느 장소로 갔더니 저쪽 산이었다고?"
"예. 그럴 겁니다."
그녀가 말한 악의라는 건 하윤이가 죽인 뱀이 남긴 것이 분명할 것이다.
사체를 처리하며 뒤처리를 하는 동안 보고를 받았으니까.
'분명 처리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려서 땅에 묻은 후 일단 봉인하겠다고 했었지.'
이전에 왔을 때, 그걸 제외한다면 산에서 느껴지던 악의적인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저 무당 아가씨는 현대의 인물이라는 뜻인데.
"방금 바깥의 사람들을 '외부인'이라고 했지?"
"예. 아마도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도 외부인 아닌가?"
"네? 그게 무슨, 으윽!"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윽고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혹시나 그녀가 미쳐 버려서 달려들까 싶어서 등 뒤로 숨겨둔 손에다가 아까와 같은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비틀거리던 그녀는 더욱 선명해진 눈동자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여, 여길 어서 빠져나가야 해요!"
"뭐?"
"뱀신이 저를 조종하면서 저도 그의 목적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것의 목적은—"
그녀가 말을 완전히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 보니 약간 비틀어진 걸쇠와 금이 간 문이 보였다.
"이게 무슨…?"
—쿠웅!
다시 한 번 더 소리가 울리며 문이 들썩거렸다.
문고리에 걸려 있던 걸쇠는 점점 휘어지며 약간 부서진 문의 틈새로 텅 빈 눈동자가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
"일단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전 두고 가세요!"
"뭐?"
"저는, 으윽. 그냥! 두고 가시라구요!"
절규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점점 피부 곳곳에서 비늘이 돋아나던 그녀는 의문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으으으, 꺄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비늘이 더욱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어. 하지만 그는 아니야! 그렇다면 어째서?"
"무슨 소리야?"
"그래. 당신들이었어. 당신들이 여기로 들어오고 나서 부터…!"
이제는 온몸이 완전히 비늘로 뒤덮인 그녀는 횡설수설하더니, 이제는 사람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샤아악!
괴물로 변모해 버린 그녀가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부딪치며 들썩이던 정문도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그것에 이어 항아리의 뚜껑이 스르르 열리더니 안에 있던 뱀들이 기어 나와서는 우리 근처를 맴돌았다.
"…망했네."
"어떡하지?!"
무당 아가씨가 뱀 인간으로 변해서야 정신을 차린 서현이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과 뱀들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일단 우두머리를 노려야겠어.'
나는 그녀였던 것을 향해 손을 뻗어 만들어 둔 주문을 해방시켰다.
그러자 한 줄기의 번개가 날아갔지만, 기어 다니던 뱀 중 한 마리가 뛰어오르더니 대신해서 맞았다.
이럴 걸 예상했던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면서 옆의 서현이를 툭툭 쳤다.
그러면서 보호막을 전개하자 달려들은 사람들과 뱀들이 그것에 부딪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에 금이 간 게 보였고, 정신 차린 서현이가 주문을 외워 그걸 보강했다.
점점 균열이 메꿔지며 안전해지나 싶을 때, 다시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자신이 다치는 건 신경 쓰지 않고, 머리가 찢어져서도 태연하게 움직이는 그들이 섬뜩해 보였다.
이러다간 보호막 안에서 마력 고갈로 쓰러지겠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무당집이 갑자기 무너지기 전까지는.
—쿠우웅!
하늘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떨어지며 집을 무너뜨리자 보호막을 두들기던 사람들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하, 웃기네."
그리고 반파된 집의 안쪽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후속작이 없을 줄 알았던 영화의 2편이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먼지들을 치우며 나타난 것은 교복을 입은 하윤이였다.
현재 상황이 귀찮아 보이는 그녀는 손을 휘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이 뱀 새끼들아. 니들은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그렇게 비아냥거리던 하윤이가 뱀 인간이 된 무당을 보더니 눈을 찌푸렸다.
—샤아악!
무당은 호기롭게 소리 지르며 달려들려 했지만, 상대가 많이 안 좋았다.
내가 한 번 눈을 깜빡이자 하윤이의 위치는 반파된 집에서 무당의 앞으로 변했고, 가죽을 세게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하늘을 날았다.
공격한 순간의 빈틈을 노리고 뱀들이 뛰어올랐지만, 하윤이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것들은 공중에 고정된 것처럼 옴짝달싹 못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까딱하자 모든 뱀들의 목이 날아가며 피 분수를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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