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옛날 옛적에
* * *
뱀들의 목이 잘려 나가며 분수처럼 솟아난 피들은 익숙한 보라색이었다.
그것들이 땅에 떨어지자 치이익—하며 부식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무리 봐도 맡으면 위험해질 것처럼 보여서 코를 막으며 이쪽으로 오지 않도록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스멀스멀 올라오던 연기가 점차 사라질 때 즈음 뒤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키야아아악!"
그와 함께 우리의 옆을 녹갈색의 잔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쿠웅!
무슨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고, 그 소리의 발원을 찾아 앞을 쳐다보자 서로 주먹을 맞대고 있는 하윤이와 뱀처럼 변한 무당이 있었다.
힘겨루기라도 하고 있는지 다른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 둘의 모습은 차이가 컸다.
하윤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것처럼 쳐다보면서 팔을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무당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은 그녀의 등 밖에 보이지 않지만 표정이 어떨지는 상상이 갔다.
'분명 잔뜩 일그러졌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이의 얼굴이 완전히 무표정으로 변해 버렸고, 무당은 또다시 벽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그걸 따라서 시선을 뒤로 향하자 주춤거리는 인간들과 부서진 벽의 잔해들을 던져대며 일어나는 그녀가 보였다.
승산 없는 싸움에서는 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무당은 땅에 떨어진 뱀들의 토막을 보더니 다시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땅에서 솟아난 검은색의 사슬로 묶여 버린 그녀는 하윤이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고 노력했지만 전혀 옴짝달싹 못했다.
오히려 사슬이 점점 당겨지며 무당의 팔이 떨어질 것처럼 늘어나자 고통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끼엑, 끼에에엑!"
"사람이었으면 사람 말을 해. 아오, 진짜. 이걸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하윤이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치들자 무당은 겁먹은 것처럼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혹시 무언가 잘못돼서 저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씩 움직이는 꼬리를 보면 죽은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찌푸린 하윤이는 무당에게 가까이 다가가 턱을 잡고 올렸다가 그녀가 뱉은 보라색의 독액에 얼굴을 맞았다.
"하윤아!"
"쿠케케켁, 크헤헤!"
이런 거에 속아 넘어가냐는 듯이 비웃은 무당은 마무리하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속박하고 있는 사슬은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술자가 죽는다면 발동된 대부분의 마법은 취소돼야 하는데, 당황해하는 무당의 얼굴이 안 봐도 한눈에 보였다.
잠시 후 무당의 턱을 잡았던 하윤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뿌드득하며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끼에엑!"
그와 함께 들려오는 고통스런 비명 소리에 나는 무심코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으아, 아프겠다."
"그러게."
반대쪽 손으로 얼굴에 묻은 끈적이는 독액을 털어낸 하윤이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싶은 표정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저 무당은 죽겠지만,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주변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생각하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봤다.
'분명히 무당은 뱀신이란 녀석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죽는다면 그건 실패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어떤 이유인지 사람들을 모아서 저렇게 의식만 빼앗아 둔 다음, 무당의 집을 감시하는 것처럼 배치한 건 어째서일까.
'아직 무당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해서? 하지만 방금 저렇게 변이한 걸 보면…. 잠깐, 시선?'
그녀는 어떤 시선이 닿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그게 우리가 오고 나서라고 했으니, 그 시선의 주인은 아무리 봐도 뻔했다.
"애옹."
"역시나."
언제 올라온 건지 모를 고양이가 내 어깨 위에 있었다.
저기 무당을 살벌하게 지켜보고 있던 하윤이도 이걸 보더니 미소를 한가득 지었다.
그러면서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이 보이는 게 빨리 끝내고 돌아가려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였다.
"하윤아, 잠깐!"
"응? 왜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데 저 무당 좀 살려주면 안 돼?"
"흐음…. 잠깐, 무당이요?"
하윤이는 내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지금 사슬로 구속해 둔 무당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불쌍한 사람을 본 것처럼 혀를 차더니 손을 거두었다.
"휴우. 그럼 다시 그것 좀 해주시죠?"
"그거라니."
"저 무당이 정신 차린 이유가 당신이 쳐다봐서 그런 거 아니에요?"
"글쎄.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어서 잠깐 관심을 가졌을 뿐이지. 녀석은 어림짐작한 모양이지만 말이야."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느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무언가 있을까 싶어서 나도 고개를 돌려봤지만, 무너진 벽과 그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산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흐흠, 재미있구나. 제 자식의 복수를 도우려 했으면서 내 눈치를 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몇백 년도 전의 이야기니 너무 길어지겠군.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몇백 년 전이라니.
'그렇다면 아마 조선 시대이려나.'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악의라면 눈에 보일 정도인 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자식이라니. 정말로 뱀신이 존재하는 거야?"
"그래. 모든 뱀 신앙의 원형. 뱀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레이트 올드 원."
"뭐라고…?"
"분명 나는 이런 걸 추가했던 기억이 없거늘. 아니면 혹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하윤이의 어깨 위로 이동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그에게서 내려온 축복을 벗겨내야겠구나. 뱀 인간의 후손은 참 신기하군."
그러면서 그가 무당을 매섭게 노려보자 그녀는 두려움에 찬 괴성을 외치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사슬에 묶여져 있던 그녀가 도망칠 곳은 없었고, 점차 자라났던 비늘이 녹아내리듯이 피부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날카롭던 손톱도 떨어지며 뭉툭하게 새로 자라났고, 가늘었던 꼬리도 떨어지더니 몇 번 꿈틀거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흐으."
"그래.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당신은? 아, 그렇구나…. 당신이 바로—"
"쉬잇. 너는 그저 네가 섬기는 뱀신이란 것의 계획이나 말하면 된단다."
갑자기 정신 차린 것에 혼란스러워 보였던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해지더니, 곧바로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실토했다.
"뱀신께서는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께서 원수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수학여행 때 그거 이야긴가 보네."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갈던 그분께서는 어느 날 알아차렸습니다. 그 원수라는 자는 이미 성불해서 지옥으로 갔다는 것을."
"음음, 그랬었지."
"그래서 뱀신께서는 이리 생각하셨답니다. 그자가 지옥에 있다면, 문을 열어서 끌고 오면 된다고."
지옥의 문을 연다니, 어지간히도 복수에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발상을 할 리가 없는데 참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뱀신께는 그럴 만한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희생시키자니, 실패했다간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가 문제였죠."
"그래서 그에게 도움을 청한 건가?"
"네. 뱀들의 아버지, 이, 끄학!"
"어허. 그저 이름을 부르려고 했을 뿐인데 그렇게 화를 내다니. 정말이지 쉽게 분노하는구나."
"하악, 흐으윽."
무언가 이름을 말하려던 무당은 갑작스레 각혈을 하더니 호흡이 가팔라졌다.
다행히도 그의 조치 덕분에 금방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어떤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흐윽,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그렇게 재미없게 군다면… 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구나."
"네… 알겠어요…."
무당은 그리 말하고는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뱀신께서는 떠올렸답니다.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영광스러웠던 과거, 마법에 능통하며 제국까지 세웠던 나날을."
"호오."
"물론 번성이 있다면 몰락도 있는 법. 빙하기를 맞이하며 점차 쇠락해가던 선조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버림으로써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야기가 저승의 문을 열겠다는 계획과 무슨 상관이냐."
"그렇다면, 만약 나 혼자만이라도 위대한 아버지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어머니를 위한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을 납치했고?"
"예. 저들은 문을 열기 위한 제물들. 나머지는 모두 지하에서 이미 공양되었, 우욱!"
그렇게 말하던 무당은 자신이 한 짓을 떠올렸는지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막았다.
나는 도대체 지하에서 무슨 짓을 벌였길래 저러나 싶어서 반쯤 무너진 집으로 향했다.
"많이 역겨울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에이, 저는 언니가 더 걱정되는 걸요? 어차피 저기 무당 언니도 진정하려면 많이 걸릴 거 같고."
나를 따라오는 하윤이가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되어 가만히 있기를 종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걱정받았다.
"에휴. 나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찾아다니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멀쩡한 방으로 시선이 끌렸다.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가 장지문을 열자 그 안에는 병풍과 작은 탁자, 방석, 그리고 각종 기물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그런 물건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은 돌을 깎아서 만든 조각상이었다.
얼마나 정성스레 만든 것인지 비늘 하나하나를 전부 새긴 그것은 이상하게도 팔이 한 쌍 달려 있었다.
이게 그 뱀 인간인가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조각상의 눈동자가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살피자 그건 처음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너무 민감해졌다고 생각하며 찬찬히 방을 뒤져 보자 방석 아래로 문이 하나 있었다.
그걸 열자 어두운 공간과 사다리가 나타나며 엄청난 피 냄새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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