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바다에서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
* * *
빛을 완전히 흡수해 원근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검은색은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 이걸 손톱으로 긁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손가락을 갖다 댔는데 어째선지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
그래서 검게 변한 손가락을 가까이서 보자 손톱처럼 튀어나온 것 없이 굴곡져 있을 뿐이었다.
이런 변화에 당황스러웠던 나는 핸들에 이마를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잠시 진정한 후 다시 손을 확인했지만, 손가락 끝이 검은 건 그대로였다.
"어라? 잠깐만, 다시 자랐어…?"
그런데 이번에는 손톱이 정상적으로 있는 것이었다.
지금, 이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고민하던 나는 꿈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무너진 벽과 그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
그곳에서 나온 심해인들이 경배하듯이 절을 하자 나온 존재의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고 꿈에서 깼다.
'그리고 손가락이 이 모양이란 말이지….'
나는 심해인이 저주라도 남긴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날 강타하는 금관악기의 웅장한 저음 같은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곳으로 오라!
"윽!"
귀로 들어온다기보다는 아예 뇌에다가 직접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건지 태연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목소리에 괴로워하면서 원흉이 있을 바다를 쳐다봤다.
이렇게 강력한 저주라면 시전자도 가까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바닷속에서 커다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꿈에 나타났던 거대한 존재와.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허억—!"
세포 하나하나가 겁에 질린 것처럼 근육은 자신이 할 일을 잊고 경련했다.
숨이 막히자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으며 마력을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흔들린 정신은 티끌만큼의 마력도 움직이기 어려워했다.
결국 눈앞이 깜깜해지며 이렇게 죽나 생각할 즈음, 심장에서 만들어진 어떤 파동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심장 박동과는 다른 강렬한 두근거림이 순식간에 육체를 진정시키며 원래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몇 초 밖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 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만 같았던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폐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것처럼 느껴질 때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
잠시 멈췄던 산소 공급을 다시 이어가기 위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나는 다시 바다를 쳐다봤다.
혹시 그 괴물이 아직도 있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문장을 믿고 고개를 돌린 내 눈에는 오직 파랗게 반짝이는 수면만이 보일 뿐이었다.
'설마 나에게만 존재감을 드러낸 건가? 어째서지?'
도대체 내게서 어떤 걸 바라기에 날 이렇게 몰아세우는 걸까.
나는 복잡한 머리를 잡고 끙끙거리다가 또다시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이제는 손가락만이 아니라 손목 부근까지 검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하아, 미쳐 버리겠네."
검은색 바탕에 청백색과 흰색의 점들이 이리저리 박혀 있는 손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건들다가 답답한 마음에 꽉 잡았다.
—꽈드득!
그러자 무언가 단단한 게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게 뭐여."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지만, 핸들에 남은 내 손바닥 자국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에 무언가를 만지기가 두려워진 나는 마치 병아리를 만지는 것처럼 천천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며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발이 폰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원흉은 바로 고양이.
장난이라도 치고 싶다는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순수해 보였지만, 저 눈동자 안에서 느껴지는 흥미로움이 그가 내려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오셨네요."
"그래. 너는신기하게 변했구나."
"덕분에 핸들은 이 모양이 됐거든요?"
"그건 어쩔 수 없다냥. 알아서 힘 조절이나 배워라냥."
"꿀밤 마렵네."
나는 손을 부들거리다가 지금 있는 곳이 밀폐된 차량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좁으면 마땅히 피할 만한 공간도 없을 터.
게다가 손이 이렇게 변하고 나서 근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으니, 다른 것—예를 들어 민첩성—도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망설이기보다는 바로 실행에 나서야 하는 법.
나는 곧바로 주먹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으엥?"
나는 떨어지던 꿀밤을 멈추며 어디로 갔는지 살피다가 이마로 다가오는 분홍색의 젤리와 마주했다.
—몰캉!
어느새 계기판이 있는 곳 위쪽으로 이동한 그가 앞발로 내 이마를 꾸욱 누른 것이었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인지, 아니면 말랑말랑한 감촉이 마음을 사르르 녹여 버린 것인지.
금방 진정하게 된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튼, 신기하구나."
"저도 그러긴 해요. 저기 심해인 놈들을 때려잡으면 사라지겠지만."
"응?"
"아니에요? 무슨 건물만큼 커다란 심해인이 꿈에서 나타난 이후부터 이렇게 변했는데."
"글쎄다. 흠, 아니지. 그렇다면 문장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문장이 어쩌고 말한 걸 보면 심장에 자리잡고 있는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검은 손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네 손에 관한 건 예상가는 게 있지만 말하지는 않겠다."
"네?! 왜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이것 참, 씨앗은 다른 곳에 뿌렸는데 이런 열매가 자랄 줄이야."
그는 재미있다는 것처럼 쿡쿡 웃더니 턱을 까딱거렸다.
"자, 그럼 가자꾸나. 존 왓슨이 있는 곳으로."
"그건 어떻게 알아요?"
"알아서 생각해 보거라."
"치, 말해주면 덧나나. 그리고 이런 핸들로는… 어라?"
나는 이렇게 우그러진 핸들로 어떻게 운전하냐고 말하려 했지만, 고개를 돌리자 원래대로 돌아온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떻게 고친 건지 감탄하며 나는 손에 최대한 힘을 뺐다.
그리고 핸들 위로 살포시 얹은 후 엑셀을 밟으려다가 시동을 걸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운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나 할 법한 실수를 저질러서 부끄러웠던 나는 차를 몰아 호텔이 밀집한 거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존 왓슨 씨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다시 난관에 빠지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켜야 하지?"
나는 도움을 받기 위해 보조석에 누워 있는 그를 향해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시큰둥해하며 뒹굴거렸다.
오히려 왜 그리 간단한 걸 못하냐는 것처럼 바라보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폰은 정차한 후에 하기로 했다.
그렇게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엄청나게 높은 빌딩 앞이었다.
해안가의 바로 앞에 있어서 사람들의 예약이 많을 거 같은 이곳은, 바깥에서 봐도 로비에 있는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 사이에 존 왓슨 씨가 있는 건 아닐까 기대했지만, 코트를 입은 외국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 맞아요?"
"그래."
내가 길을 헤매는 걸 보고 그가 답답해하다가 알려 준 주소로 오긴 했지만, 정말 이곳이 맞긴 한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믿지 않는 티를 낸다면 말랑한 육구 대신 냥냥펀치가 올 테니 나는 다시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힘을 빼며 엄지를 움직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거, 마법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곧바로 마력을 움직여서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들어 낸 나는 전원을 켰다.
손이 이렇게 변했으니 지문 인식이 전혀 안 되므로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연락처로 들어가 어제 등록했던 번호에다가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몇 초 동안 신호음이 들리고는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Hello?"
"앗, 잠깐만요."
나는 깜빡했던 통역 마법을 사용하고는 다시 폰을 귀에다가 갖다 댔다.
"여보세요?"
"예. 서아 양이시죠?"
"네. 슬슬 수사해야겠는데, 어느 호텔인가요?"
"딥씨 호텔이에요."
"아아, 네. 그럼 금방 갈 테니까 로비로 나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끊은 나는 호텔의 이름을 확인했다.
DEEP SEA HOTEL.
"맞았네요."
"내가 뭐라 했느냥."
그나저나 심해 호텔이라니.
안에 수족관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괴악한 작명 센스에 고개를 저으며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아, 저깄네."
"쟤는 네 차도 알아보지 못할 텐데, 직접 가는 게 어떻겠냥."
"그래야겠네요."
나는 로비에서 체크아웃을 하는 그에게 다가가다가 호텔리어와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서다가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호텔리어를 살펴보니 뭔가 이상했다.
뒤로 벗겨진 머리, 약간 튀어나온 눈, 그리고 목에 그어진 실선까지.
어제 해부했던 심해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