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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존재가 되었다-140화 (140/154)

〈 140화 〉 바다에서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

* * *

처음에 봤을 때는 무슨 바람 빠진 짐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무와는 다른 질감과 덩그러니 달린 입에서 나는 기운 없는 소리를 듣자 사람이었던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익. 시이익—"

"우욱!"

쇼고스에게 몸을 개조당한 것인지 슬라임처럼 한 덩어리로 된 육체는 흐물흐물해 보였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기 위해 살짝 손을 대보자 그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악! 끄아악!"

마치 뱃살을 만지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쑤욱 들어간 손가락은 안쪽의 무언가와 닿았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가 비명을 지르기에 나는 바로 손을 땔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있던 왓슨 씨는 방금 그걸 듣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기 위해 들어왔다가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주먹으로 벽을 때리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일단 끔찍하게 변한 그를 되돌릴 가능성은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겉모습을 살펴봤다.

눈이나 코, 귀나 생존에 필요한 다른 구멍들은 없이 그저 입만 달려 있는 걸 보면 쇼고스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사람이 비명 지르는 걸 좋아하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살짝만 손을 대도 고통스럽도록 만들었을 거고.'

녀석을 조금만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 나는 방금 만졌을 때의 감촉을 떠올렸다.

'말랑… 아니, 물컹하다고 해야 하나. 몸이 저렇게 퍼진 걸 보면 지탱할 뼈가 아예 없어진 거겠지.'

그렇다면 약간만 손상되도 위험할 뇌는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칼을 갖다 대고는 열어봐야만 한다.

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시야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게 느껴졌다.

보고 있던 벽이 갑자기 회색으로 변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겉의 피부는 사라지고 뼈만 보이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투시 마법인가?'

혹시 내가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일으킨 건 아닐까 싶었지만 체내의 마력량은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내 팔이 변한 것처럼 눈도 변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곧바로 폰으로 카메라를 켜서 확인했다.

'음… 딱히 변한 건 없는데.'

저번에 심장에다가 문장이 새겨진 이후로 조금 더 검게 변한 눈동자는 아무런 이변도 없었다.

'잠깐만…문장?'

그러고 보면 내가 꿈에서 만난 존재 때문에 팔이 이렇게 변했다고 했을 때, 라니아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분명히 문장 어쩌고 중얼거렸지.'

그렇다면 내 팔이 변한 이유가 심장에 자리 잡은 이것 때문이라는 걸까?

하지만 문장의 효과는 그저 정신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일 텐데.

'잠깐, 최근에 패닉에 몇 번이나 빠지지 않았던가?'

이틀 전에 사극 세트장 같은 곳에서 강림했던 뱀들의 아버지를 보고 한 번.

그리고 어제 꿈에서 나타난 심해인처럼 생긴 존재를 보고 또 한 번.

문장의 한계라고 보기엔 이전에 함께 있었던 하윤이가 멀쩡했던 걸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슬프게도 내 정신 방벽이 너무 허접해서 원래의 성능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소리겠지.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 문장은 내 육체를 변화시킨 것이고.

나는 이전에 봤던 라니아의 본체를 떠올리면서 변해버린 팔을 바라봤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생긴 걸 보고도 그와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이마를 치며 자책하던 나는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닌데.'

나는 고개를 돌려 입만 달려 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의 피부가 투명해지듯이 변하며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장기가… 뭐야. 왜 위치가 마구잡이지?'

방금 만진 걸로 확인한 것처럼 뼈는 없었고, 심장이나 폐, 간 같은 장기들은 어린아이가 어지른 장난감처럼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창자는 길게 늘어뜨려져서는 어딘가 마구 묶여져 있었고, 기관지는 어디 가고 폐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심장은 뇌 바로 아래에서 펌프질하고 있었지만, 이어진 혈관이 없어서 헛짓거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지 의문일 정도의 육체는 아직까지도 그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몸을 새로 만드는 편이 더 낫겠네."

나는 다시 간부에게 전화를 걸며 두꺼웠던 서류를 떠올렸다.

지금, 이런 상황에 놓인 집이 수십 곳이나 더 있을 텐데, 나 혼자만 다니는 건 부족했다.

'지금의 페이스대로 다닌다고 해도 몇 주는 더 걸리겠지.'

폰에서 들려오는 수신음이 뚝 끊기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지금 결사단원은 보냈나요?"

"네. 어제 당신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그에게 연락했더니 근처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 사람에겐 아니겠지만."

"하하, 그러게 말이죠.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쇼고스가 잠입한 집이 한 곳이 아닌 모양이에요. 두 번째 집에 탐문하러 왔는데 여기도 있더라고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소집령을 내리도록 하죠."

"저번에 불의 교단 사건 이후로 얼마나 지났죠?"

"글쎄요. 이제서야 안정적으로 실험할 수 있을 텐데, 원성이 자자하겠네요."

폰 너머로 피곤하다는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저번에 연구하는 이들까지 동원하는 소집령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그러면서 생길 손해라던지 여러 가지가 막막한 모양이다.

"하아…. 결사단의 원래 목적은 이런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가만히 둘 수는 없지요."

"그런가요?"

"그리고 정부와의 계약이 있기도 하고요. 이쪽 세계의 일은 결사단이 해결해라. 이런 거 말이죠."

"그런데 심해인들이 지상을 정복하려 들면 심각해지는 거 아닌가요?"

"뭐, 예전부터 있던 일이니까요. 지금의 군대라면 심해인은 물론, 쇼고스도 어찌저찌 처리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긴 아무리 비늘이 단단하다고 해도 총알세례를 받으면 벌집이 되는 건 순식간일 거다.

총알도 버티는 쇼고스라고 해도 포탄이나 폭발물에 피해를 받으면 죽을 것이고.

"그러나 그레이트 올드 원이 개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위대한 옛 존재요…?"

"네. 심해인들의 아버지, 혹은 저 멀리 태평양 아래의 르뤼에에 잠든 자가 깨어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심해인들의 아버지라고요?"

"네. 가장 최근 기록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어떤 독일 해병이 남긴 글이로군요. 이후에는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단순합니다. 그저 심해인을 거대화하면 끝이니까요."

나는 꿈에서 봤던 거대한 존재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전혀 두통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런 변화를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심해인들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동해 쪽에 위치하는 모양인데요."

"…정말입니까? "

"제 꿈에도 나왔고, 일어나서 바다를 봤더니 그것과 눈이 마주쳤어요."

"오, 신이시여."

잠시 우리들 사이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그가 먼저 말했다.

"일단 청와대에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군함이 필요하겠군요."

"네? 군함이요?"

"그리고 일본 지부에도 연락해서 협력을 요청하고요. 한국의 무력 도발로 보이면 큰일이니까요."

"제가 할 일은 없나요?"

"지금은 그저 잠입한 쇼고스들을 처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혼란을 일으킨다면 곤란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스케일에 잠시 벽에 기댔다.

그러다가 마찬가지로 벽에 기댄 왓슨 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래도 방금 통화를 들었는지 질문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궁금한 거라도 있어요?"

"방금 말한 군함은 무슨 소립니까?"

"아무래도 저희, 그거 타고 바다로 나갈지도 모르겠네요."

"…머라고요?"

그는 당황해하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들은 게 맞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일단 나는 다른 곳에 잠입해 있을 쇼고스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여야만 했다.

안방을 나와 소파에 누워 있는 그녀를 마법으로 몇 시간 동안 깨지 않도록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끄응…."

"앗."

그러자 왓슨 씨가 기절시킨 경비원이 슬슬 정신 차리며 일어나고 있던 게 보였다.

—톡톡.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쳐서 주의를 이끈 다음, 손바닥을 얼굴 위에다가 올렸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미안하게 느껴졌지만, 일반인인 그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철퍼덕하고 바닥에 쓰러진 그를 벽에다가 기대게 만들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뒤따라 나온 왓슨 씨와 함께 타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혹시 다른 경비원이 수상하게 여길까 봐 천장 구석에 달린 CCTV를 노려보자 스파크가 튀며 망가졌다.

'엥? 마법을 쓰려고 했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아파트 밖으로 나온 나는 차를 타고 다른 주소로 향했다.

하지만 다음에 방문한 집도, 그 다음도, 다다음 집도.

바닥과 벽에 남은 혈흔을 제외하면 어떠한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뿌려진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피는 줄줄 흐르며 바닥에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왓슨 씨. 혹시 생존자는…?"

"없습니다. 이전 집과 마찬가지로요."

"그럼 나머지도 똑같겠죠?"

"그래도 확인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그리고 우리들은 다음 집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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