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바다에서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
* * *
"오오, 저게 우리가 탈 거예요?"
"아뇨. 저희는 다른 걸 탈 겁니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저렇게 큰 군함이라면 타고 있는 사람도 많을 테니 이해하기로 했다.
점점 이동하면서 보이는 배들도 작아지는 걸 느끼며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저게 우리가 탈 배라고요?"
"네."
차에서 내리고 고개를 들자 새하얀 민간용 배가 보였다.
수십 명은 거뜬히 탈 수 있을 정도로 크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함포 같은 무기는 달려 있지 않았다.
"응? 저거, 마법이 얼마나 새겨져 있는 거야?"
"그야 결사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한 것이니까요. 정말로 써야 할 때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그러면 저기 있는 전함들은 뭐예요?"
"저들은 그저 훈련으로만 알 겁니다. 저희는 심해인들의 관심을 끌며 저기로 올라가려는 걸 저지하는 역할이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출항해야 하니 빨리 올라타라고 말했다.
나는 배의 겉으로 드러난 마법들을 확인하다가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었다.
목이 아파올 정도로 이리저리 돌리며 관찰하다가 천장이 낮은 곳으로 들어가면서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지만, 고통보다 호기심이 앞서서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그렇게 복잡한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조타실에 도착한 나는 새하얀 정복에 멋들어진 모자를 쓴 선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죠."
수현 씨와 선장님은 서로 악수를 나누더니 곧장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배가 서서히 움직이며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육지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멀리 나왔을 때, 아래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배에 새겨진 선을 따라서 빠르게 움직이던 그것들은 하나의 기계처럼 복잡한 술식을 발동시켰다.
"다행히도 마법은 정상적으로 발동했군요. 오래전에 만든 거라서 안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네?"
"하핫, 농담입니다. 당연히 새벽에 테스트를 몇 번 했었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래된 건 사실입니다. 방호 마법 덕분에 튼튼하겠지만, 만약 똟린다면 침몰하는 건 금방이겠죠."
나는 부디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길 기도하면서 넓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무런 배도 돌아다니지 않아서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 잠시 꿈속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때 봤던 거대한 존재의 마력을 떠올려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변해 버린 팔을 바라보며 이게 좋은 변화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도중에 어떤 승무원이 말하는 게 들렸다.
"동남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물체 다수 발견!"
"혹시 실수로 물고기를 감지하는 경우는 없겠죠?"
"사람만 한 것들부터 그 이상까지만 감지되도록 설정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대형 어종이라면요?"
"그렇다고 해도 일괄적으로 다가오기만 하는 경우는 없겠죠."
"아하."
이쪽으로 다가오는 심해인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던 나는 창가로 다가 갔다.
혹시 마법사가 밖으로 나와서 직접 공격하는 방식인 걸까 생각했지만, 선박 외벽에 보였던 마법진이 공격용이었던 것인지 빛무리가 모이는 게 보였다.
잠시 후,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바닷속으로 뻗어가면서 저기 레이더에 보이는 점들 몇 개가 멈추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직 남은 점들이 수십 개는 넘어갔고, 내가 시력을 강화해서 멀리 쳐다보자 우글거리며 헤엄쳐 오는 녀석들 사이로 고래만큼 거대한 심해인들도 몇몇 있었다.
일반적인 녀석들은 공격을 받으면 바로 죽어 버렸지만, 거대한 녀석들은 맞아도 끄떡 없는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다가왔다.
"저기 커다란 놈들은 멀쩡한데요?"
"네? 잠시만요."
수현 씨는 그러더니 몇 마디 주문을 외우고는 살포시 눈을 떴다.
"흠, 그렇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는 작은 것들만 처리해도 충분하니까요."
"그게 무슨—"
나는 설명을 더 해 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물보라가 일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어엉!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물보라는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심해인들은 크고 작은 거 상관없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지금 타고 있는 배보다 몇 배는 커다란 전함과 그걸 호위하듯이 있는 함선들이 보였다.
***
"하아…. 말년에 이렇게 대대적인 훈련이라니. 김 이병, 너는 무슨 소식 못 들었냐?"
"이병 김병일! 잘 모르겠습니다!"
"에휴. 게다가 여기까지 수영으로 올 사람도 없을 텐데 왜 경계를 서라는 거야?"
"저… 박 병장님. 이런 훈련에 민간 선박이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응? 뭔 개소리야?"
"저기 배 한 척 있지 않습니까. 파티라도 하는지 빛이 번쩍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구만. 너 지금 나 놀리냐?"
"아, 아닙니다! 정말인데…."
빠릿빠릿해 보이는 한 명과 게을러 보이는 한 명의 해병이 넘실거리는 파도를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병이라는 녀석은 소질이 있는지 저기 서아가 탄 배가 보이는 듯싶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반인인 병장에겐 보이지 않아서 정강이를 까였다.
그들은 함포가 발사되며 나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면서 물보라가 이는 걸 구경했다.
"그래도 이번 훈련만 끝나면 제대네. 넌 앞으로도 수고해라, 난 먼저 간다."
"그래도 병장님 덕분에 군 생활이 재밌던 것 같았습니다."
"에이, 아부하지 마. 그래도 나중에 너가 제대하면 술이라도 한 번 사줄게."
"감사합니다!"
둘은 자신들이 플래그를 쌓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그러다가 대략 십 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 이변이 일어났다.
—끼긱. 끽.
"응?"
"왜 그러십니까?"
"아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뭔가 긁는 소리 같았는데."
병장은 그렇게 말하며 선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가 목을 쥐며 뒷걸음질 쳤다.
"컥, 커걱."
"박 병장님? 저 놀리는 거 아닙니다."
이병은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보다가 팔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는 급하게 다가가서는 지혈을 돕기 위해 목을 쥔 그의 손을 꾹 눌렀다.
"의무병! 아니, 누구 없어요?!"
지금 병장을 도울 사람을 찾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라?"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힙겹게 고개를 돌려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추악한 모습의 딥 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침입을 허용하게 된 건지 서아 쪽의 상황이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곧장 일어날 학살극에 저항할 인간들의 행동이 궁금했다.
—타다다다당!
다른 곳에서 경계를 서던 해병이 심해인을 발견했는지 총소리가 들려오며 점차 소란이 확산되는 게 느껴졌다.
어느샌가 먹구름으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이용해 어둠 속으로 숨어서 몰래 움직이던 딥 원들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사람들의 목을 긋거나 심장을 후볐다.
하지만 총소리를 들었는지 내부에서 대기하던 해병들이 나오면서 기울었던 전세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조명이 켜지며 딥 원을 발견하는 족족 방아쇠를 당기는 그들의 눈빛에는 점차 공포감이 사라지며 자신감으로 차올랐다.
'죽일 수 있는 괴물이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런 그들을 검은 악몽이 덮쳤다.
"데켈리리!"
생명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에 겁먹은 몇몇은 얼어붙고, 다른 이들은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저 다가오는 속력을 늦출 뿐이었다.
—푸확!
쇼고스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상반신이 날아가며 안에 들은 장기들이 튀고 피보라가 퍼지며 전함 위를 붉게 물들였다.
총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걸 알아차린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치다가 금방 올라온 딥 원에게 사냥당했다.
그렇게 저들이 죽어 가는 와중에 서아가 탄 배의 인식 저해 마법이 해제됐다.
정체를 들키는 걸 피하기보단 인명을 구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마법진 위로 모인 빛무리의 크기가 아까보다 더욱 커졌다.
그걸 방해하기 위해 해일이 몰아치고 번개가 떨어졌지만, 보호막에 가로막히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발사된 여러 갈래의 빛줄기는 정확히 쇼고스와 딥 원만을 노렸다.
죽을 위기에 처했던 해병들은 그 빛을 천국에서 내려온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든 게 환상이었나 눈을 비비다가 바닥에 흩쀼려지다 싶이 떨어진 피와 내장 조각이 현실이라고 일깨워줬다.
하지막 상황은 더욱 최악을 향해 나아갔다.
"어, 어어어?"
"이건 너무 기울었, 으아아!"
바다에서 튀어나운 거대한 팔이 잡고 점점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딥 원들의 아버지, 다곤.
그가 동해 한복판에 나타났다.
"선 넘네?"
물론 나에게 있어서 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무뢰배나 만찬가지지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