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꿈속에서 꿈틀거리는 끔찍한 광기
* * *
동굴 같은 환경과 목이 꺾여서 죽은 심해인 혼종, 그리고 비늘이 뽑혀져서 끔찍한 심해인 주술사까지.
그것들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바다 아래의 동굴이라는 것을.
제임스의 트라우마를 깨트릴 방법이 아마 이곳을 탈출하는 것일 테니 눈앞이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냥 나가는 건 어때?'
"에휴, 개소리하지 마라.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나의 광기가 하는 헛소리를 흘려들으며 이곳을 탈출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봤다.
'심해어가 저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엄청 깊은 모양인데, 그럼 사람을 마법으로 데려온 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다른 마법에 대해서도 찾아볼 걸 후회하며 나는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저쪽에 횃불이라도 있는 건지 주먹만한 크기의 불꽃이 저기 멀리서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비추는 불빛이 보였고, 왼쪽으로 몸을 틀자 익숙한 공간이 나타났다.
'분명 여기에서 제임스가…?!'
하지만 이곳의 상황은 방금과 매우 달랐다.
가죽이 벗겨진 채로 쓰러진 제임스의 위로 심해인 하나가 걸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번뜩이더니 곧바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걸 고개를 비틀어서 피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녀석은 거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가까이 따라왔다.
"큭!"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불가능한 건 손바닥으로 막으며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느새 등에 벽이 닿았다.
"이런…!"
녀석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명치를 향해 정권을 질렀다.
보호막도 만들 시간이 없어서 무작정 마력을 방출하며 속도를 늦춰서 양손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갈비뼈가 몇 대 나갔는지 흉부에서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녀석의 복부를 발로 차며 멀리 떨어뜨린 다음, 보호막을 시전하며 회복에 쓸 만한 생명체는 없는지 탐색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동굴에 자생하는 식물이 있을 리가 없을 터.
눈 앞의 상대를 쓰러뜨린 후, 그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수 밖엔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나는 눈을 찌푸리며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만약 방금 전에 심해인이 내 명치를 향해 손톱을 찔러왔다면 난 무조건 죽었을 거다.
그러나 녀석은 손톱이란 게 없다는 것처럼 주먹만 휘두르며 싸웠다.
혼란스러움에 잠시 시야가 어그러지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두통에 지끈거리는 걸 참으며 다시 눈을 뜨자 보호막을 마구 두들기는 그가 보였다.
"젠장, 환각이었나."
'친구끼리 죽이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걸 들으며 나는 눈 앞의 제임스를 바라봤다.
방금 꿈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핏발이 선 채로 광기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는 그의 뒤로는 비늘이 벗겨진 심해인 주술사가 보였다.
'광기를 억누를 방법이 없나?'
이러다가 까딱 잘못하면 친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방금 마력이 충분했다면 근접전은커녕 그냥 원거리에서 마법으로 상대했을 텐데, 마법사가 아닌 제임스는 오직 피하는 방법 밖엔 없으니 위험했을 거다.
"일단 좀 잠들어라."
이제는 보호막을 머리로 내려치는 그의 이마를 손으로 잡은 후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그의 눈꺼풀에서 점점 힘이 빠지며 풀썩 쓰러지더니 금방 잠들고 말았다.
"그럼 이제 다른 괴물이 나올 텐데…?"
또다시 마력 탈진으로 인한 탈력감으로 인해 힘이 빠진 나는 벽에 기대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언가 튀어나오는 건 없었다.
"무슨 특수한 조건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무슨 행동을 했었는지 기억해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제임스에게 접촉하고는 마법을 사용해려고 했다는 게 괴물이 나오기 전 마지막 행동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를 건들이는 것과 마법을 사용하는 것, 혹은 둘 모두를 하는 것.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일단 마법을 쓰는 건 아니야. 내가 그 닌자랑 싸우면서 몇 번이나 썼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촉수 괴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난입했을 터.
"그렇다면…."
나는 발을 움직여서 앞에 쓰러져 있는 제임스를 쿡쿡 건드려봤다.
그래도 주변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피부끼리 맞닿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찔러봤다.
"음, 안 나타나네. 잠깐, 내가 그때 사용하려던 마법이 분명…."
광기에 찬 제임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그의 정신력을 회복시켜주려 했다.
그렇다면 그 괴물은 악몽이 빚어낸 파수꾼 같은 것일까?
"쯧. 마력도 그렇고 정신력도 그렇고, 다시 채우고 와야겠네."
괴물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마력에 일단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제임스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몇 분만 지난다면 그 말에 너무 혹할 거 같기도 해서 그렇다.
"게다가 제임스한테 나눠줄 정신력도 부족하고."
가뜩이나 정신이 피폐한데 이렇게 모자란 정신력을 더더욱 줄여버린다면 나도 얘처럼 미쳐 날뛸 게 분명했다.
엄지 손가락을 입에다가 갖다 댄 나는 눈을 꼭 감고는 세게 물었다.
그러자 송곳니가 살갗을 파고 들어가며 비릿한 피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그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마치 철을 핥는 듯한 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에서 시작된 불꽃이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천장이다."
"인간. 또 헛소리함."
"헛소리라니."
"위대한 존재가 그렇게 말했음."
"인간미가 없구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지의 상처는 대충 약 바르고 붕대만 감아놔도 저절로 나을 테니 굳이 마법까지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하고 말이지.'
떨어진 정신력을 회복하려면 자연 치유에 기대야 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에 제임스의 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엄지 손가락의 상처는 모두 회복되어 완전히 아물었고, 가슴팍에 난 세 갈래의 것도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누굴 죽이라던지 공포심을 이끌어내는 광기의 속삭임도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마력은 이미 전부 차올랐고 심장 속의 불꽃도 다행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동안 순간 이동 마법이나 전이 마법에 대한 것들도 찾아다닌 나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 괴물과 다시 싸워야 하려나."
두 번째로 제임스의 꿈에 들어갔을 때 마주쳤던 괴인.
도망칠 곳을 아예 없애버린 다음 약점을 공격해서 죽여버렸지만 마력을 전부 소비했던 게 기억났다.
가장 좋은 상황은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겠지.
"후우, 일단 앉아야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법진 위에 누운 제임스를 바라보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혹시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정령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깨워달라고 당부한 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금방 잠에 빠져버린 나는 의식이 흘러가는 것에 순응하며 다시 눈을 떴다.
"여기는…."
어둠을 얕게 빛내는 조약돌만한 크기의 발광석들이 바닥에 박혀서는 길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이건 분명히 제임스가 있을 장소와 컨테이너, 둘 중 한 곳으로 이어져 있겠지.
나는 일단 기감을 넓혀서 어느 쪽에 불꽃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오른쪽 방향으로 주먹 만한 크기의 불꽃들이 있는 게 느껴졌다.
'컨테이너 쪽은 전등을 쓰고 있었으니 이쪽이 길이겠군.'
금방 목적지의 방향을 찾아낸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제임스가 광기에 빠져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몇 분 동안 걷다 보니 점점 말소리가 들려왔다.
"…해! 말하라고!"
"끄엑, 끼야아아악!"
"너는 비명 밖에 못 지르냐?!"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제임스는 핏발이 서긴 했지만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 눈으로 심해인을 고문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이 더 섬뜩하게 보이긴 했지만, 그와 싸우면서 체력을 소모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심해인의 비늘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힘껏 잡아당기며 고문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에 심해인의 목을 꺾었다.
그러고는 뭔가 중얼거리는 모습이 불길해 보였지만, 나는 제임스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이봐, 제임스! 괜찮아?"
"이래도안되고저래도안되면어떻게해야할까이제떠오르는고문법도— 아, 너, 못 보던 주술사구나."
"뭐라고? 난 네 친구—"
"그래. 손톱을 뽑은 다음 강제로 먹여버릴까? 아니면 비늘을 모조리 뽑아버린 다음 다시 심어줄까?"
"젠장할."
그러나 완전히 탁해진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광기에 사로잡혀서 예전의 나처럼 환각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대충 저기 쓰러진 심해인 주술사처럼 보이는 거겠지.
이번에는 그가 다가오기 전부터 보호막을 전개한 나는 주문을 외우며 수면 마법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임스가 보호막에 가로막혔을 때,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스르르 쓰러지는 걸 보고는 곧 튀어나올 괴물에 대비하며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 * *